강간당한 여성, 굶어죽은 아이…음울한 그림들이 극찬받은 이유 [사색(史色)]

강영운 기자(penkang@mk.co.kr) 2023. 8. 19.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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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36] “아드님이 전사했습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귀가 멍해지고, 시간도 더디 가는 듯 했습니다. 집에 불현듯 찾아온 군인의 말을 들은 뒤였습니다. 기운이 빠지면서 스르륵 다리가 풀렸습니다. 반문할 경향도 없이 그저 낯선 군인을 멍하니 쳐다볼 수밖에 없었지요.

케테 콜비츠의 1903년 작품. ‘죽은 아이를 안고 있는 여인’.
“죄송합니다.” 군인이 조용히 읊조리고 나서야, 눈물이 터져 나왔습니다. 남편을 비롯한 가족들이 애써 달래려 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습니다. 자식의 죽음 앞에 선 엄마를 위로할 방법은 세상에 없는 걸 그들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지요. 아들의 이름을 목 놓아 부르는 것,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것 밖에는 없었습니다.

시간이 약이라지만 항상 그런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아들의 얼굴은 더욱 선명해져만 갔습니다. 아장아장 걷는 순간부터, 처음 “엄마”라고 부르던 순간까지. 하나하나 머릿속을 가득 채웁니다.

조국은 아들의 전사를 10대 무명 군인의 죽음으로 기억합니다. 어머니에겐 달랐습니다. 요람에서 환히 웃던 아기의 죽음이었고, 학교에 처음 입학하던 어린이의 죽음이었으며, 스포츠에 열광하고 첫사랑에 가슴아파가슴 아파하던 청소년의 죽음이었습니다. 누 겹의 죽음이었습니다. 참전하겠다는 아들을 왜 한사코 막지 못했을까. 자조적인 원망이 그녀를 괴롭힙니다.

응어리진 고통을 예술로 소화합니다. 몇 날 며칠을 너머 십 수년을 작품 하나에 매달리지요. 아들을 추모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아이를 잃은 모든 어머니를 위한 위로라고 그녀는 생각했습니다.

독일의 판화가, 조각가였던 케테 콜비츠.
그리고 완성한 작품, ‘슬픔에 잠긴 부모’였습니다. 20세기 독일의 판화가이자 반전 운동가였던 케테 콜비츠의 이야기입니다. 8월 15일 광복절을 맞아 그녀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전쟁과 침탈이 끝날 때까지 아이를 잃었던 어머니들을 기억하기 위해서입니다.
‘슬픔에 잠기 부모’.
노동자의 삶에서 영감을 찾은 쾨테 콜비츠
케테는 예술로써 빈곤·전쟁과 같은 사회의 모순을 비판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녀는 1867년 독일 쾨니히스베르크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어릴 적부터 그녀의 관심은 노동자의 삶으로 향했습니다. 목수였던 아버지 칼 슈미트의 영향이었지요. 그는 법관을 꿈꿨으나, 자유주의적인 성향으로 공직을 맡을 수 없었습니다. 조국 프로이센은 엄격한 군국주의 국가였기 때문이지요.

“저는 노동자의 삶을 그리고 싶어요.” 젊은 시절 케테 콜비츠.
법관을 포기하고, 목수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작업을 해야 하는 고된 일이었지만, 그는 만족을 느꼈지요. 부르주아들의 허세보다는 노동자들의 격식없는 생활에서 인간다움을 본 것이지요. 딸 콜비츠 역시 아버지 일터에 수시로 드나들면서 그들의 삶에 매료됩니다. 세상은 목수와 선원을 “하층 노동자”라 불렀지만, 그녀는 그들을 “친구”, “삼촌”이라고 여겼지요.
형제를 잃은 아픔이 평생의 주제로 남았다
“따님이 그림에 재능이 있네요.”

아버지 칼 슈미트는 콜비츠의 예술적 재능을 알아챘습니다. 학교에서 그려 온 그림이 범상치 않음을 느꼈기 때문이지요. 당시에는 여자 아이에게 예술교육을 한다는 게 흔치 않은 일이었지만, 칼 슈미트는 자유주의자였습니다. 여성과 남성의 교육에는 차별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어린 시절 형제자매의 죽음은 케테의 작품세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사진은 1909년 작품 ‘실업’.
14살부터 유명한 동판 화가인 루돌프 마우어에게 수업을 듣게 된 배경입니다. 18살이 됐을 무렵에는 베를린 여성 예술가 협회에 들었을 정도로 두각을 나타냈지요.

다정한 아버지로부터 안정된 지원을 받았지만, 늘 행복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어린 시절 형제·자매를 잃은 기억 때문입니다. 어린 자식의 작은 몸을 부여잡고 통곡하는 부모를 보면서, 케테는 상실의 의미를 생각하곤 했습니다.

이별은 괴로움과 예술의 씨앗을 함께 품기 마련이지요. 어린아이들의 이른 죽음은 그녀의 예술 인생의 주요 주제로 자리합니다.

“제가 그렇게 어두워 보이세요?” 1893년 자화상.
평생의 사랑을 찾은 쾨테
“내 동생 소개해줄게.”

오빠인 콘라트가 베를린에서 공부하던 1885년이었습니다. 콘라트는 평소 친하게 지내던 의대생인 칼 콜비츠를 동생에게 소개합니다. 평소 돈 없는 사람들을 위해 봉사 다니던 칼의 성품을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노동자에게 연민을 갖고 있던 동생 케테와 잘 어울리겠다 생각한 것이었지요. 오빠의 예감은 적중했습니다. 케테와 칼은 서로에 완전히 빠져듭니다.

“가족은 행복이란다.” 1935년 케테와 칼이 손주들과 함께 한 모습.
보수적이고 권위주의적인 공기가 가득한 독일에서 두 사람은 자신들의 자유로운 생각을 나눴습니다. 숨 막히는 독일에서 둘은 서로에게 산소마스크같은 존재가 되어 주었지요. 첫 만남 6년 뒤에는 평생을 함께하기로 약속합니다. 칼은 의사로서 약한 사람을 도왔고, 케테는 그림으로 노동자를 위로했습니다.

둘의 보금자리는 베를린의 노동자 거주지역인 프렌츠라우어 베르크였지요. 매춘에 빠진 가난한 여성들, 직장을 잃고 거리를 배회하는 실직자들 속에서 그녀는 예술혼을 가꾸어 갔습니다. 이곳에서 사랑스러운 아들 한스와 피터도 낳았습니다. 썩 잘 어울리는 커플이었지요. 노년의 케테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내 인생에 가장 중요한 세 가지는 자녀들과, 내 일, 그리고 나의 사랑하는 반려자 칼이었다”고요.

칼과의 결혼으로 케테는 인생의 행복인 한스와 피터 형제를 낳았다.
‘직조공들의 봉기’ 베를린을 놀라게 하다
케테는 부르주아로부터 아무 흥미를 느끼지 않았습니다. 작품의 주제는 언제나 노동자의 삶과 애환이었습니다. 동정심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케테는 노동자들의 삶이 ‘진정으로 아름답다’고 생각했지요. 그의 일기장에 적힌 문장입니다.
“내가 프롤레타리아의 삶을 묘사한 건 동정이나 위로가 아니었다. 그들의 삶이 아름답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의 삶은 언제나 아름답지.” 케테 콜비츠의 자화상.
그녀가 판화를 선택한 배경도 이런 성향 때문이었습니다. 고관대작의 자택에 걸려 소수가 누리는 작품보다는, 여러 장을 찍어 다수의 서민과 예술의 감동을 공유하고 싶었던 것이지요.

케테라는 이름이 독일 전역에 알려진 건 1898년이었습니다. 그녀의 연작 ‘직조공들의 봉기’가 전시되면서였습니다. 동판화와 석판화로 제작된 여섯장의 그림. 산업화로 가난에 몰린 직조 노동자들의 봉기가 일어난 1844년 사건이 배경입니다.

그림의 파장은 상당했습니다. 노동자들의 가난과 그로 인한 저항이 그대로 숨 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금상 수상이 예상됐지만, 황제 빌헬름 2세가 주제를 문제 삼아 거부하자 더욱 명성을 얻었습니다.

“미안해 아가야, 먹을 것을 주지 못해서.” 연작 ‘직조공들의 봉기’ 중 첫 번째 작품인 ‘빈곤’. 예술사학자 곰브리치는 이 작품을 뭉크의 절규와 비교하기도 했다.
작품을 좀 더 자세히 보겠습니다. 첫 장인 ‘빈곤’의 그림입니다다. 아사 직전의 아이 앞에서 좌절하는 어머니의 모습. 빵 한덩이조차 구하지 못한 채 아이의 얼굴은 점점 창백해져만 갑니다. 할머니는 또 다른 아이를 안고 있지만, 그 역시 손가락만 빨고 있지요. 그림에서 가난이 진하게 묻어납니다.

죽음은 가난의 냄새를 맡고 찾아옵니다. 결국 가난을 이기지 못하고 노동자들은 죽어가지요. 이를 견디지 못한 노동자들이 서로 연대하고 봉기합니다.

“제발 우리에게 먹을 것을 주세요.” 여성들이 아이와 함께 시위에 참가한 모습에서 그녀녀는 ‘혁명의 여성성’을 시유헸다. ‘봉기’.
‘직조공들의 봉기’ 중 ‘최후’.
세상은 케테를 “사회주의자”라고 지칭하지만, 그의 작품은 그렇게 단순하진 않았습니다. ‘직조공들의 봉기’ 마지막 작품인 ‘최후’를 봐도 그렇습니다. 봉기를 일으킨 노동자들을 맞이한 건 결국 또 다른 죽음이었습니다. 혁명의 폭력성이 불러올 비극을 에둘러 비판한 것이라는 분석도 있습니다.
16세기 농민전쟁 중 죽은 아들을 찾아 헤매는 어머니를 묘사한 그림.
‘직조공들의 봉기’의 성공은 ‘농민 전쟁’ 연작으로 이어집니다. 16세기 독일 농민들이 봉건 영주에게 저항했던 사건을 모티브로 또 다른 연작을 1908년 내놓은 것이지요. 직조공들의 봉기보다 훨씬 진하고 강렬한 느낌의 작품이었습니다.

전투 후 밤이 되어서야 아들의 시체를 찾아 헤매는 어머니의 모습은 그야말로 비극의 절정이었지요. 그녀는 이제 명실공히 독일의 제일가는 판화가로 성장합니다.

‘농민전쟁’ 중 하나인 ‘농부’. 1907년.
‘농민전쟁’ 중 ‘강간’. 전쟁이 여성에게 얼마나 처참한 일을 저지르는지 고발한 작품.
인생의 가장 큰 상실을 겪은 케테
“어머니, 저 군대에 가겠습니다.”

1914년은 그녀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상실의 해였습니다. 둘째 아들 피터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전사한 것이었습니다. 그의 나이는 불과 18살. 슬픔이 그녀를 잠식했습니다. 우울한 감정은 수시로 그녀를 덮쳐왔지요.

케테의 둘째 아들 ‘피터’.
그럼에도 그녀는 다시 털고 일어났습니다. 피터를 기리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17년의 걸친 대작업 끝에 ‘슬픔에 잠긴 부모들’이 완성됩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무릎을 꿇고 앉은 채 고통을 감내하는 모습이지요. 참척(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죽는 일)을 본 이 세상 모든 부모를 위로하는 작품입니다.
“아들아, 내 아들아.” 1931년 슬픔에 잠긴 부모. 벨기에 블라드슬로에 있는 작품.
케테는 이제 반전주의자이자, 평화주의자로 거듭납니다. 기득권을 위한 전쟁에 더 이상 소중한 자식을 빼앗기지 않겠다는 외침. 1922년에 완성한 연작 판화 ‘전쟁’이 그 결과물이었지요.
“우리 아이만은 제발.” 콜비츠의 ‘희생’(1922년).
연작인 ‘전쟁’의 첫 작품에 ‘희생’이라는 이름이 달렸습니다. 어떤 알 수 없는 존재가 어머니로부터 아이를 빼앗아 가려는 그림입니다. 어떻게든 아이를 지키려 하지만, 거대한 힘에 굴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조국을 위한다”는 이유로 아들을 국가에 징집당한 모든 어머니를 위로하는 작품이지요. 중국 혁명 당시 루쉰에게 영향을 끼쳐 중국 목판화 운동의 기폭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어린 청년들이 전쟁터를 향해 가는 모습을 그린 ‘지원병들’, 남편을 전쟁에서 잃고 홀로 된 ‘과부’, 아이들을 잃은 ‘어머니들’도 걸작으로 평가받습니다.

‘전쟁’의 작품 중 하나인 ‘과부’. 전쟁의 비극을 묘사한 작품이다.
“불온 예술”로 케테를 공격한 나치
“케테의 작품활동을 중단시키게.”

권력은 그녀를 표적으로 삼았습니다. 당시 독일은 군국주의자들의 시대였기 때문이지요. 나치가 집권한 이후에는 그녀의 작품은 ‘불온 예술’로 전시가 금지되기도 했었지요. 1936년에는 게슈타포가 방문해 “작품을 중단하지 않으면 수용소로 보내겠다” 협박을 자행합니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저작권자=Stanislav Traykov>
케테의 역작인 ‘죽은 아들과 어머니’(1937년). 독일 베를린에 자리한 작품이다. <저작권자=Beko>
하지만 그녀는 굳건히 작품 세계를 펼쳤습니다. 걸작 ‘죽은 아들을 안고 있는 어머니’(피에타)가 나치가 기세를 떨치던 1937년에 완성했지요.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를 묘사한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에 견줄만한 작품입니다. 케테의 작품은 우리 어머니들의 모습을 그대로 담았기에 슬픔이 배가 되지요. 이 작품 앞에선 누구든 숙연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세계정세는 케테의 삶을 극단으로 몰고 갑니다. 1940년 남편 칼이 사망합니다. 1942년에는 손자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전사했지요. 그 손자의 이름 역시 피터였습니다. 그녀의 삶이 “죽음과의 대화”였다고 불리는 배경입니다.

두 아들 한스(왼쪽), 피터와 함께 사진을 찍은 케테.
평화를 부르짖는 삶이었지만, 정작 그녀는 종전을 보지 못했습니다. 1945년 4월, 전쟁의 종식을 불과 몇 달 앞둔 해 그녀가 눈을 감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남편 칼과 아들 피터를 만날 생각에 기꺼이 눈을 감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여전히 ‘평화’가 요원한 세
케테 콜비츠가 세상을 떠나고 80년 가까이 지났습니다. 그녀는 독일 예술의 대표이자, 평화의 상징입니다. 독일 전역에 그녀의 이름을 딴 거리와 학교가 존재합니다. 그녀의 삶과 작품 세계를 다룬 박물관도 네 개나 되지요.
1954년 발행된 케테의 우표. 그녀는 독일 전역에서 존경받는 인물이다.
“우리에게 더 이상 아이를 빼앗지 말라.” ‘어머니들’.
죽을 때까지 평화주의적 예술가로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씨앗들이 짓이겨져서는 안된다’(1942년)는 그녀가 생전에 남긴 마지막 작품입니다. 세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어머니가 팔로 감싸 안은 모습입니다.

그의 작품에 비슷한 주제를 반복해서 그렸다는 비판이 나오지 않은 건 세상이 전혀 변하지 않았음을 의미하지요. 아들 피터가 죽을 때와 20년이 흘러 손자 피터가 전사했을 때의 세계는 한치도 전진하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케테 콜비츠가 오늘날 살아있더라도, 같은 주제의 작품을 그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날에도 너무 많은 씨앗이 세계 곳곳에서 짓이겨져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케테 콜비츠의 ‘전쟁은 이제 그만’.
<네줄요약>

ㅇ쾨테 콜비츠는 판화가, 조각가로서 노동자들의 삶을 그리곤 했다.

ㅇ아들 피터가 제1차세계대전에서 사망한 뒤 반전 메시지를 담은 작품을 여럿 남겼다.

ㅇ나치는 쾨테 콜비츠를 ‘불온예술가’로 여겨 협박을 자행했다.

ㅇ쾨테는 종전을 보지 못했지만, 현재까지 평화의 상징으로 존경받는다.

<참고문헌>

ㅇ조명식, 케테 콜비츠, 재원, 2005년

ㅇ이현애, 독일 미술가와 걷다, 마로니에북스, 201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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