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간당한 여성, 굶어죽은 아이…음울한 그림들이 극찬받은 이유 [사색(史色)]
[사색-36] “아드님이 전사했습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귀가 멍해지고, 시간도 더디 가는 듯 했습니다. 집에 불현듯 찾아온 군인의 말을 들은 뒤였습니다. 기운이 빠지면서 스르륵 다리가 풀렸습니다. 반문할 경향도 없이 그저 낯선 군인을 멍하니 쳐다볼 수밖에 없었지요.
시간이 약이라지만 항상 그런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아들의 얼굴은 더욱 선명해져만 갔습니다. 아장아장 걷는 순간부터, 처음 “엄마”라고 부르던 순간까지. 하나하나 머릿속을 가득 채웁니다.
조국은 아들의 전사를 10대 무명 군인의 죽음으로 기억합니다. 어머니에겐 달랐습니다. 요람에서 환히 웃던 아기의 죽음이었고, 학교에 처음 입학하던 어린이의 죽음이었으며, 스포츠에 열광하고 첫사랑에 가슴아파가슴 아파하던 청소년의 죽음이었습니다. 누 겹의 죽음이었습니다. 참전하겠다는 아들을 왜 한사코 막지 못했을까. 자조적인 원망이 그녀를 괴롭힙니다.
응어리진 고통을 예술로 소화합니다. 몇 날 며칠을 너머 십 수년을 작품 하나에 매달리지요. 아들을 추모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아이를 잃은 모든 어머니를 위한 위로라고 그녀는 생각했습니다.
그녀는 1867년 독일 쾨니히스베르크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어릴 적부터 그녀의 관심은 노동자의 삶으로 향했습니다. 목수였던 아버지 칼 슈미트의 영향이었지요. 그는 법관을 꿈꿨으나, 자유주의적인 성향으로 공직을 맡을 수 없었습니다. 조국 프로이센은 엄격한 군국주의 국가였기 때문이지요.
아버지 칼 슈미트는 콜비츠의 예술적 재능을 알아챘습니다. 학교에서 그려 온 그림이 범상치 않음을 느꼈기 때문이지요. 당시에는 여자 아이에게 예술교육을 한다는 게 흔치 않은 일이었지만, 칼 슈미트는 자유주의자였습니다. 여성과 남성의 교육에는 차별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다정한 아버지로부터 안정된 지원을 받았지만, 늘 행복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어린 시절 형제·자매를 잃은 기억 때문입니다. 어린 자식의 작은 몸을 부여잡고 통곡하는 부모를 보면서, 케테는 상실의 의미를 생각하곤 했습니다.
이별은 괴로움과 예술의 씨앗을 함께 품기 마련이지요. 어린아이들의 이른 죽음은 그녀의 예술 인생의 주요 주제로 자리합니다.
오빠인 콘라트가 베를린에서 공부하던 1885년이었습니다. 콘라트는 평소 친하게 지내던 의대생인 칼 콜비츠를 동생에게 소개합니다. 평소 돈 없는 사람들을 위해 봉사 다니던 칼의 성품을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노동자에게 연민을 갖고 있던 동생 케테와 잘 어울리겠다 생각한 것이었지요. 오빠의 예감은 적중했습니다. 케테와 칼은 서로에 완전히 빠져듭니다.
둘의 보금자리는 베를린의 노동자 거주지역인 프렌츠라우어 베르크였지요. 매춘에 빠진 가난한 여성들, 직장을 잃고 거리를 배회하는 실직자들 속에서 그녀는 예술혼을 가꾸어 갔습니다. 이곳에서 사랑스러운 아들 한스와 피터도 낳았습니다. 썩 잘 어울리는 커플이었지요. 노년의 케테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내 인생에 가장 중요한 세 가지는 자녀들과, 내 일, 그리고 나의 사랑하는 반려자 칼이었다”고요.
“내가 프롤레타리아의 삶을 묘사한 건 동정이나 위로가 아니었다. 그들의 삶이 아름답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케테라는 이름이 독일 전역에 알려진 건 1898년이었습니다. 그녀의 연작 ‘직조공들의 봉기’가 전시되면서였습니다. 동판화와 석판화로 제작된 여섯장의 그림. 산업화로 가난에 몰린 직조 노동자들의 봉기가 일어난 1844년 사건이 배경입니다.
그림의 파장은 상당했습니다. 노동자들의 가난과 그로 인한 저항이 그대로 숨 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금상 수상이 예상됐지만, 황제 빌헬름 2세가 주제를 문제 삼아 거부하자 더욱 명성을 얻었습니다.
죽음은 가난의 냄새를 맡고 찾아옵니다. 결국 가난을 이기지 못하고 노동자들은 죽어가지요. 이를 견디지 못한 노동자들이 서로 연대하고 봉기합니다.
전투 후 밤이 되어서야 아들의 시체를 찾아 헤매는 어머니의 모습은 그야말로 비극의 절정이었지요. 그녀는 이제 명실공히 독일의 제일가는 판화가로 성장합니다.
1914년은 그녀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상실의 해였습니다. 둘째 아들 피터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전사한 것이었습니다. 그의 나이는 불과 18살. 슬픔이 그녀를 잠식했습니다. 우울한 감정은 수시로 그녀를 덮쳐왔지요.
어린 청년들이 전쟁터를 향해 가는 모습을 그린 ‘지원병들’, 남편을 전쟁에서 잃고 홀로 된 ‘과부’, 아이들을 잃은 ‘어머니들’도 걸작으로 평가받습니다.
권력은 그녀를 표적으로 삼았습니다. 당시 독일은 군국주의자들의 시대였기 때문이지요. 나치가 집권한 이후에는 그녀의 작품은 ‘불온 예술’로 전시가 금지되기도 했었지요. 1936년에는 게슈타포가 방문해 “작품을 중단하지 않으면 수용소로 보내겠다” 협박을 자행합니다.
세계정세는 케테의 삶을 극단으로 몰고 갑니다. 1940년 남편 칼이 사망합니다. 1942년에는 손자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전사했지요. 그 손자의 이름 역시 피터였습니다. 그녀의 삶이 “죽음과의 대화”였다고 불리는 배경입니다.
그의 작품에 비슷한 주제를 반복해서 그렸다는 비판이 나오지 않은 건 세상이 전혀 변하지 않았음을 의미하지요. 아들 피터가 죽을 때와 20년이 흘러 손자 피터가 전사했을 때의 세계는 한치도 전진하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케테 콜비츠가 오늘날 살아있더라도, 같은 주제의 작품을 그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날에도 너무 많은 씨앗이 세계 곳곳에서 짓이겨져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ㅇ쾨테 콜비츠는 판화가, 조각가로서 노동자들의 삶을 그리곤 했다.
ㅇ아들 피터가 제1차세계대전에서 사망한 뒤 반전 메시지를 담은 작품을 여럿 남겼다.
ㅇ나치는 쾨테 콜비츠를 ‘불온예술가’로 여겨 협박을 자행했다.
ㅇ쾨테는 종전을 보지 못했지만, 현재까지 평화의 상징으로 존경받는다.
<참고문헌>
ㅇ조명식, 케테 콜비츠, 재원, 2005년
ㅇ이현애, 독일 미술가와 걷다, 마로니에북스, 201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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