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8위’ 뉴욕 한식당…“요리로 한국문화 전하고파” [ESC]
메뉴판에 한글발음 영어로 표기
음식 역사·식재료도 상세 소개
2018년 개업…예약 매진 행렬
요리는 혼이 들어간 진검과 같아야 한다고 했다. 일본 요리업계를 탁월한 미식론으로 한 차원 끌어올린 요리사 겸 예술가 기타오지 로산진(1883~1959)의 철학은 지금도 유효한 명제다. 하지만 세상사가 어디 고매한 이념대로만 되던가. 그가 설파한 대로 ‘제대로 만든 음식은 그 자체로 예술’이다. 하지만 작품을 빚어야 할 요리사가 혼을 담아 조리하기란 쉽지 않다. 격변하는 외식업계에는 수익만을 우선시하는 각종 유혹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감동을 선사하는 음식을 세상에 내놓은 요리사에게는 찬사가 쏟아진다. 미식의 격전장 미국 뉴욕에서 활동하는 박정현(39) 요리사도 그런 이 중 한명이다.
“우리만의 모습 보여주는 레스토랑”
그가 뉴욕 맨해튼 이스트 30번지에서 운영하는 ‘모던 한식당’ 아토믹스는 올해 상복이 터졌다. 지난 6월 중순 발표된 ‘2023 월드 베스트 레스토랑 50’(W50B) 순위에서 8위로 뽑혔다. 더블유50비는 영국 윌리엄 리드 비즈니스 미디어 그룹이 2002년부터 매년 전 세계 고급 레스토랑을 대상으로 발표하는 평가 순위다. 올해로 123년 역사를 자랑하는 ‘미쉐린 가이드’보다 역사는 짧지만, 발표 때마다 화제를 모으며 전 세계 고급 미식 트렌드를 주도해온 권위 있는 상이다. 과거 서양식 레스토랑 일색이었던 순위에 한국에서 나고 자란 요리사가, 그것도 한식을 기반으로 한 레스토랑이 오른 것은 이례적이다. 더구나 그는 미국 시아이에이(CIA)나 프랑스 르 코르동 블뢰, 폴 포퀴즈 같은 세계적인 요리학교를 졸업한 유학파도 아니다. 앞서 그는 미국 외식업계의 오스카상으로 불리는 ‘제임스 비어드상’에서 ‘뉴욕 최고의 셰프’로 뽑혔다.
198㎡(60평) 규모의 아토믹스는 2018년 문 열자마자 ‘매진 행진’이었다. 뉴욕타임스 레스토랑 평가에서 극찬을 받았고, 이듬해엔 ‘미쉐린 가이드’ 별 두 개도 땄다. 1인당 식사비가 378달러(약 50만원)에 이를 정도로 고가지만, 매일 밤 레스토랑은 까다로운 뉴요커들로 만석이었다. 매달 1일부터 그 다음달치 예약을 받는데, 예약 창이 열리자마자 1시간 안에 두달치가 마감됐다. 바 포함해 좌석 수가 19석뿐이고 저녁 5시30분과 8시30분 두 번만 손님을 받는다.
그의 성공은 동갑내기 아내 박정은씨와의 합작품이다. 두 사람은 경희대 동문으로 조리과학을 전공했다. 정현씨가 요리와 전체 운영을 총괄하고 있고 정은씨는 아토믹스 서비스와 경영을 맡고 있다.
“처음 호명되었을 때 정말 멍한 기분이었습니다. 지금도 꿈만 같습니다. 세계의 유명한 셰프들과 함께 시상식에 참여하는 것만도 큰 영광인데, 높은 순위에까지 오르니 큰 기쁨이었죠. 더욱 열심히 해서 우리만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레스토랑으로 발전시켜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지난달 전자우편을 통해 수상 소감을 묻자 박정현 요리사는 이렇게 말했다. 그가 강조한 ‘우리만의 모습’은 아토믹스 메뉴판에 잘 드러난다. 간혹 외국인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죽’을 ‘코리아 수프’라고 표기하는 레스토랑도 있는데 부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한글 발음 그대로 영어로 옮겨 표기했다. 다시마는 ‘Dashima’로 간장은 ‘Ganjang’, 미나리는 ‘Minari’, 두부는 ‘Dubu’, 잡채는 ‘Japchae’로 기재했다. 정은씨는 “음식뿐만 아니라 의류, 그릇, 음악 등이 어우러진 공간을 통해 우리가 전하고 싶은 것은 한국 문화고, 언어가 가진 힘을 통해 그 문화를 전달하려고 했다”고 했다. 이들은 ‘메뉴 카드’도 만들었다. 카드에는 음식을 만들게 된 이야기와 메뉴의 역사, 우리 식재료에 대한 설명이 들어갔다. 정현씨는 “손님들이 음식을 소비로만 끝내지 않고 오래 기억하게 하는 (‘메뉴 카드 읽기’) 과정을 통해 천천히 (한국 문화에) 흡수됐다”며 이 점을 성공 요인 중 하나로 꼽았다. 계절마다 바뀌는 10가지 한식 코스 메뉴는 재방문 요인이 됐다. 숙주와 팽이버섯을 활용해 만든 잡채와 잣 국물을 곁들인 우뭇가사리 국수 등이 영화의 시퀀스처럼 이어져 “전체적인 하나의 경험”이 됐다는 것이다. “한식의 맛과 멋을 드러내기”에 충분했다. 정은씨는 “청국장을 낸 적이 있는데 좋아하는 외국인이 많은 걸 보고 우리도 신기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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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담양 명인의 장으로 요리
이들은 식재료 선택에도 각별하다. 기타오지는 ‘식재료의 본 맛을 살릴 수 있느냐 없느냐가 요리사의 능력’이라고 했다. 능력 발휘에 앞서 갖춰야 할 조건은 좋은 식재료를 확보하는 일. 특히 장은 한식의 근간이다. “기순도 명인의 장을 직접 받아쓰고, 특수한 식재료는 한국에서 구매해 국제특급으로 받습니다. 한식 재료를 다루는 규모 큰 온라인몰도 활용합니다.”(박정현) 기순도 명인의 장은 전남 담양의 한 종가에서 370여년 넘게 이어온 비법으로 만든 장이다. “외국인들이 한식 하면 강하고 맵고 짠맛을 생각하다가 아토믹스에 와서 좀 더 부드럽고 슴슴한 맛을 느끼고 좋아하는 이들이 많았습니다.”(박정은)
부부는 아토믹스 개업 2년 전에 연 한식 기반 캐주얼 식당 아토보이의 성공이 초석이 됐다고 설명한다. 아토보이는 대략 40달러(약 5만원)를 내면 15가지 한식 반찬 중 3가지를 고를 수 있는 식당이었다. 여기에 밥과 김치가 더해졌다. 한식 특징 중 하나인 ‘반찬’을 내세운 아토보이도 뉴욕타임스의 호평을 받으며 성공을 거뒀다. 이쯤 되면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왜 굳이 뉴욕이었을까. 정현씨는 2006년부터 4년간 영국 런던과 오스트레일리아 멜버른에서 일했다. 2010년부터 2년간은 독창적인 한식을 선보여 주목받았던 서울 정식당 멤버로 활동했다. 그는 “미국 시아이에이 유학을 준비했는데, 런던 레스토랑에서 인턴을 하면서 생각을 바꿨다”고 했다. “그곳에서 훌륭한 셰프, 좋은 팀들과 일을 하면서 현장에서 배우고 경험하는 것이 더 좋겠다”고 판단했다. 2012년 뉴욕 정식당 멤버로 3년 동안 일하면서 ‘뉴욕의 가능성’을 보았다. “전 세계 문화가 용광로처럼 녹아드는 도시가 뉴욕”이라며 “뉴욕만큼 한식이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 있는 곳은 없다”고 생각했단다. 이들 부부는 지난해 10월 뉴욕 록펠러센터에 한식당 ‘나로’도 열었다. “한식 중에 더 슴슴하고 가볍고 건강한 맛을 전달”할 예정이라고 한다.
정현씨는 한식의 미래가 밝다고 강조한다. “케이팝을 포함한 영화 등 한국 문화가 성장하는 힘을 체험하고 있다”며 “지금을 한식 발전의 또 다른 시작점으로 하고, 정부, 미디어, 식음료업계 등 다양한 분야의 많은 분이 각자의 노력을 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박미향 기자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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