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사대부는 왜 오직 주자(朱子)만을 존숭했나?
송재윤의 슬픈 중국: 변방의 중국몽 <3회>
조선 후기 주자학(朱子學)은 갈수록 더 절대화, 이념화, 극단화되는 경향을 보였다. 오직 주자 1인만을 독존의 지위에 올려 숭배하는 경향까지 나타났다. 병자호란(丙子胡亂, 1637) 이후 숭명(崇明)의 광열이 거세지면서 주자의 독존적 지위는 더욱 강화되었다. 이러한 조선 유학의 극단화 경향을 비판하면 국수주의자들은 “식민사관”이나 “자학사관”이라 반발하지만, 비판과 점검 없는 문명은 쇠퇴를 면할 수 없다. 조선 주자학의 모순과 한계를 비판하는 작업은 자학이 아니라 비판적 자기 점검이다. 주자의 가르침에 따르면, 자기 점검 없는 인간은 향상될 수가 없다.
이 세상 모든 사상, 모든 철학, 모든 이념은 인간의 뇌를 떠나선 존재할 수 없다. 조선의 주자학 역시 절대 진리의 현현이 아니라 조선 유생들의 뇌 속에서 전개됐던 사유의 산물일 뿐이었다. 인간의 모든 사유는 오류 가능성이 있다. 역사상 인간은 수많은 특정 사상과 이념을 “절대 진리”라고 단정하고 맹신하는 심각한 착오를 범해 왔다. 그러나 인간은 비판적 사유(critical thinking)의 능력이 있기에 희망이 있다. 비판적 사유란 모든 관념, 이념, 사상, 기억, 감정까지 객관적으로 냉철하게 분석하고 점검하는 인간 고유의 능력이다. 마음의 눈을 뜨고 스스로 마음 상태를 관찰하고, 반성을 통해 어그러진 마음을 바로잡는 과정과 다르지 않다. 지금은 전통에 대한 맹목적 옹호가 아니라 전통에 대한 체계적 비판과 점검이 필요한 시기다.
관계의 비대칭성, 유용한 개념 틀
2019년 4월 베를린 자유 대학에서 인문·사회과학 연구자들을 초빙하여 “지식의 비대칭성(asymmetry of knowledge)”에 관한 국제 학회를 개최했다. 학술 용어라서 생소할 수 있겠지만, 비대칭성이란 결코 난해한 개념이 아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관계는 비대칭성을 보인다. 연인 사이, 친구 사이, 부모 자식 사이, 스승과 제자 사이, 나라와 나라 사이, 국가와 개인 사이, 기업과 기업 사이 등 이 세상 모든 관계에는 명확한 차등과 격차가 존재한다. 재력, 능력, 기술력, 사교술, 정보력, 홍보력 등등의 격차가 있기에 서로 다른 두 존재는 서로가 필요하여 복잡다단한 여러 형태의 관계를 이룬다.
국제 무역이 대표적이다. 두 나라가 경제적 통상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이유는 바로 두 나라 사이에 존재하는 경제적 비대칭성이 두 나라의 국익을 증진하기 때문이다. 한국과 대만은 중동 산유국들에 대해서 비대칭적 열위(劣位)에 놓여 있지만, 최첨단 기술력에선 비대칭적 우위(優位)를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국제 무역은 상호보완적 비대칭성을 보인다.
반면 역사를 돌아보면 적대적 비대칭성의 사례도 부지기수다. 적대적 비대칭성은 흔히 주종관계나 지배관계로 드러난다. 가장 극단적 경우를 꼽으라면, 경제적 파산을 맞은 한 개인이 타인에게 노예로 팔리거나 군사적 약세의 나라가 강한 나라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사례를 들 수 있다. 한 개인의 노예화는 경제력의 비대칭성에서, 한 나라의 식민지화는 국력의 비대칭성에서 비롯된다.
한·중 관계사와 언어 헤게모니
당시 베를린 자유대학 학회에서는 다양한 분야의 학자들이 여러 재미난 연구를 발표했는데, 그중에서도 나는 당시 프라하 카렐 대학의 철학자 요세프 풀카(Josef Fulka) 교수의 논문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청인(聽人) 문화(hearing culture)”와 “농인(聾人) 문화(deaf culture)” 사이에 존재하는 비대칭성을 수어(手語) 교육의 실례를 들어 분석한 철학 논문이었다. “못 듣는 사람”이 소리에 의존하지 않고 “듣는 사람”의 언어를 수어로 표현할 때 발생할 수밖에 없는 여러 상황을 그는 직접 익힌 수화를 멋들어지게 써가면서 실감 나게 설명했다.
그 학회에서 나는 “역사책 밀수하기(Smuggling Histories)”라는 제목으로 전통 시대 한국과 중국 사이에 존재했던 역사 지식의 비대칭성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다. 북송(北宋, 960~1127)의 수도 개봉(開封)에 간 고려 사신들이 서점가를 돌면서 역사책을 사 모은다는 사실을 알게 된 대문호 소식(蘇軾, 소동파, 1037~1101)은 격분하여 모두 다섯 통의 상주문(上奏文)을 황제에게 진상했다. 그는 고려 사신들에게는 절대로 중국의 역사책을 주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표면적으로 군사상 이유를 들었지만, 실은 변방지식인들의 지식을 유가 경전에만 한정시키려는 의도가 아니었을까. 중국의 민낯이 기록된 역사서가 변방으로 유출되면 중화와 이적의 차이를 강조하는 전통적 화이관(華夷觀)과 중화 우월주의가 유지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찬장에서 풀카 교수와 대화를 나눌 때, 나는 못 듣는 사람들이 듣는 사람의 언어를 익혀서 수화로 표현하는 과정이 한반도에 살던 고대인이 중원 지방에 가서 한문을 익혀서 한문 문법에 따라 사유를 하며 문장을 짓게 되는 과정과도 비슷할 수도 있겠다고 했다. 처음에 그는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내가 한국어는 중국-티베트(Sino-Tibetan)어족으로 분류되는 중국어와는 근원적으로 다른 언어일뿐더러 전통 시대 한국에서 한문을 배울 때는 토를 달아가며 한국식으로 읽었다고 하자 그는 “아하!”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못 듣는 사람이 수화를 하려면 듣는 사람이 젖먹이 때부터 귀로 배운 단어와 문법을 어떻게든 힘들여서 터득해야만 한다. 전통 시대 한반도의 지식인들은 중국 원어민의 구어(口語)를 배우지 않고서 오직 고전의 문장을 익혀서 문자의 세계로 들어가야만 했다. 그 과정은 소리를 못 듣는 사람이 소리 언어의 문법을 따라서 수화를 하는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젖먹이 때부터 중국에서 나고 자라 중국어를 모국어로 익힌 사람이 자연스럽게 고문(古文)을 배우는 과정과는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전근대 한반도 지식인 사이의 지적 활동이 대부분 한문을 통해서 이뤄졌다는 점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한·중 관계사의 “언어 헤게모니(language hegemony)”가 전적으로 중화 문명에 있었음을 의미한다. 단적인 예로 고려와 조선에서는 소동파의 적벽부(赤壁賦)가 널리 애송되었지만, 전통 시대 한국의 지식인들이 일상적으로 한문으로 시문을 지었음에도 당시 중국의 지식계에 큰 영향을 끼친 한국 출신의 문인이나 학자는 거의 없었다. 바로 언어 헤게모니에서 나오는 전통 시대 한·중 관계의 비대칭성 때문이다.
민감하고 미묘한 문제이지만, 전통 시대 한·중 관계사의 특이성을 설명하기 위해선 절대로 간과할 수 없는 중대한 특징이다. 중화 문명은 언어의 헤게모니를 장악했기에 한반도 지식인들의 영혼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고 하면 과언일까. 이 점에 관해선 차후 이어지는 글에서 차차 논할 예정이다.
조선 주자학의 극단화 경향
조선 주자학(혹은 성리학)의 역사를 돌아볼 때, 전통 시대 한·중 양국 사이에 존재했던 문화적 비대칭성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조선의 지식인들은 중국 남송(南宋) 시대 크게 일어난 주희의 성리학을 받아들였던 중화 문명의 수용자였다. 송·원·명 시기 중화 대륙의 지식인들은 주자학이라는 사상 체계를 창출했고, 한반도의 여말선초 지식인들은 서적을 통해서 그 사상 체계를 수용한 후 토착화했다. 조선 지식인들은 송·원·명 시기 중화 대륙에서 전개된 복잡다기한 지적 생산물 중에서 오직 주자학 하나만을 전면적으로, 열광적으로, 일방적으로 흡수했다. 양국 사이에 존재할 수밖에 없는 지식의 비대칭성이 결국 조선에서 주자학의 절대화, 이념화, 극단화를 초래하지 않았을까?
중국사에서 성리학이 제창되어 유포되고 발전하는 과정은 송·원·명 시대 격변의 역사를 배경으로 한다. 그 과정에서 여러 지역에서 실로 다양한 학파들이 생겨나서 서로 경쟁하고, 길항(拮抗)했으며, 때론 격한 정치 투쟁과 이념 대립을 거쳐 갔던 거대한 사상운동이었다. 그 과정에서 중국의 지식인들은 대규모 국가주의 개혁의 실패를 체험했고, 외적의 침략으로 중원 지방을 상실했고, 조대(朝代)의 몰락과 사직(社稷)의 붕괴를 망연자실 바라봐야 했고, 이민족에 통치받는 굴욕을 당했으며, 인구의 3분의 1이 격감하는 극심한 내전과 역병까지 겪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도 그 당시 지식인들은 그 시대의 근·현대사에 관한 숱한 저술을 남겼고, 더 좋은 사회·경제적 제도를 짜기 위한 고민을 담은 방대한 상소문을 작성했으며, 다양한 경전 주석을 계속했고, 다채로운 문예 활동을 전개했다. 어떤 내용이든 새로운 사상과 이념을 창출하는 과정은 그만큼 복잡하고 지난한 역사의 실제 경험을 배경으로 한다. 성리학의 발흥 과정이 그러했다.
인구, 영토, 경제력 등 모든 면에서 한반도보다 압도적으로 큰 규모의 중국 문명은 그만큼 더 풍부한 지적 창조물을 생산했고, 그중 중요한 부분이 바로 성리학이었다. 성리학을 제대로 수용하기 위해선 성리학이라는 범선을 띄운 중국 고전학의 바다를 항해해야 하는데, 그러한 항해는 긴 세월, 많은 노동, 큰 자금이 요구되는 지난한 과정이다. 바로 이 점에 양자 사이에는 문화적 비대칭성이 존재했다. 그 때문에 여말선초의 지식인들은 방대하고 풍부한 중국 사상사의 성과물 중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주자학이라는 사상 체계만을 집중적으로 수용하고 탐구하는 지적 편향성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언어도 문화도 다른 이국의 지식인이 외국에서 장시간에 걸쳐서 고되고 험한 과정을 거쳐서 만들어진 거대한 사상운동의 최종 결과물만을 그러한 사상이 형성된 역사적 맥락은 무시하고, 구체적 경험은 사상한 채로 오로지 관념에 의존하여 이해하려 할 때는 지독한 지적 편향성이 나타나기 쉽다. 비단 조선 주자학만의 문제가 아니다. 지식인들이 지식 생산의 과정과 맥락은 보지 않고서 외래 사상을 맹목적으로 수용할 때 발생하는 문화 전파의 보편적 문제이다. 그렇게 수용자로서 자족하는 지식인의 고질병은 바로 특정 인물, 특정 사상, 특정 이념에 대한 절대적 신뢰와 종교적 맹신으로 나타난다. 조선 주자학이 바로 그 점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교조적 유일사상과 인격 숭배
명·청 교체기 중국의 지식인들은 유가 경전에 대한 비판적 재검토를 거쳐 주자학의 영향에서 적극적으로 벗어났다. 성리학의 시대가 가고 청대 고증학(考證學)의 시대가 열리고 있었다. 반면 조선에선 오히려 주자에 대한 존숭과 추종이 더욱 강화되는 경향을 보였다. “주자 이후에는 드러나지 않은 리(理)가 하나도 없다”는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말은 이미 조선에서 주자학이 절대 진리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명(明, 1368~1644) 중엽 이후 지식인들은 주자학 일변도의 사상적 편향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경전 해석과 실증적 탐구로 나아가는데, 같은 시기 조선의 지식인들은 오직 주자학에 집착하는 이념적 편향성과 지적 편집증을 보였다.
주자에 관한 존경과 흠모에선 서인-노론계와 소론-남인계의 차이도 없었다. 사문난적으로 몰렸던 윤휴(尹鑴, 1617~1680)나 실학의 거장으로 알려진 정약용(丁若鏞, 1762~1836)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물론 장유(張維, 1587~1638), 이익(李瀷, 1681~1763), 홍대용(1731~1783)처럼 소극적으로나마 주자 일변도의 학풍을 비판한 사례는 있지만, 그러한 비판이 창조적인 사상운동으로 발전하지 못했다. (김영식, <중국과 조선, 그리고 중화>, 제4장, “주자 정통론의 심화” 참조)
조선 지식인의 마음속에는 실존적 인물(人物, character) 주희(朱熹, 1130~1200)가 아니라 절대화된 인격(人格, persona)으로서의 주자만이 군림했다. 주자를 존경하는 만큼 육구연(陸九淵, 1139~1192), 왕수인(王守仁, 1472~1529) 등 주희와 다른 주장을 펼친 인물들에 대해선 도가 넘는 혐오와 경계심을 드러냈다.
과연 주자학이 어떤 사상이었기에 조선 지식인들은 그토록 열광적으로 주자를 우러르고 받들었는가? 주자는 어떻게 조선 지식인들을 매료했는가? 이제부터 세계 철학사의 관점에서 “주자학”을 냉철하게 비교하고 분석하고 비판하려 한다. 지금도 주자학적 유풍과 성리학적 사고방식이 남아서 이성적 판단과 합리적 사유를 가로막고 있지는 않나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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