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킬앤하이드' 한국 흥행 이끈 '지금 이 순간' 번역의 비밀[홍정민의 뮤지컬 톺아...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뮤지컬 '지킬앤하이드'
지킬의 희생 강조한 번역으로 한국 감성 저격
'모성 자극' 조승우 캐릭터 해석, 폭발적 반응
한국 뮤지컬 산업이 폭발적으로 성장한 데에는 라이선스 작품(해외 원작을 현지화한 작품)의 역할이 컸다. 하지만 해외에서 유명한 작품이라고 해서 한국에서도 무조건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 관객의 기대와 수요에 맞게 적절히 현지화해야 좋은 반응을 얻을 수 있다. 뮤지컬 번역 전문가인 홍정민 동국대 영어영문학부 교수가 국내에서 크게 흥행한 해외 라이선스 작품의 사례를 살펴보면서 이들 작품이 어떻게 현지화에 성공할 수 있었는지를 다양한 각도에서 소개한다. <편집자 주>
언론과 평단에서 여러 차례 지적된 바와 같이 이 작품이 이처럼 한국 시장에서 유독 크게 성공을 거둔 데에는 원작을 한국인들의 정서에 맞게 적극적으로 현지화한 것이 주효했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브로드웨이 원작에 비해 사건의 극적인 측면과 캐릭터의 인간적인 면모가 좀 더 강화되었는데, 특히 타이틀롤인 지킬의 변화가 극적이다. 진실을 추구하는 과학자로서의 이성적 모습은 약화되고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인류애라는 순수한 동기를 달성하기 위해 온갖 억압과 역경을 견뎌내는 것은 물론 희생까지 감수하는 인물로 그려졌다. 이러한 변화가 사건의 비극성과 인물에 대한 연민을 한층 증폭시키면서 한국인이 좋아하는 비애의 정서를 제대로 저격한 것이다.
캐릭터의 차이는 브로드웨이와 한국 공연의 가사를 비교해보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특히 대표 넘버인 ‘This is the moment’(한국어 제목 ‘지금 이 순간’)의 몇 줄만 훑어보더라도 변화는 극명하다. 이 넘버에서 지킬은 임상 실험 계획이 이사회의 반대로 무산되자 자신을 대상으로 실험을 감행하기로 결심하는데, 우선 그가 겪고 있는 억압과 역경이 원작보다 부각된다. 이 넘버의 초반부에 나오는 “Give me this moment. This precious change. I’ll gather up my past. And make some sense at last”라는 가사는 ‘지금 이 순간 소중한 변화를 통해 과거를 정리하고 결국 무언가를 이룩할 것이다’의 의미로 목표 달성에 대한 지킬의 결연한 의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반면, 한국어 가사는 “참아온 나날. 힘겹던 날. 다 사라져간다. 연기처럼 멀리”로 번역되어 원문에는 없던 억압과 역경, 그로부터의 해방에 대한 열망이 좀 더 두드러진다. 인물에 대한 연민과 안타까움을 강하게 불러일으키는 대목이다.
후반부에는 희생의 의지가 강화된다. “This is the moment. My final test. Destiny beckoned. I never reckoned second best. I won’t look down. I must not fall. This is the moment. The sweetest moment of them all.” 한국어로는 ‘이 순간은 내 마지막 시험의 순간이다. 운명이 손짓했고, 차선은 생각하지 않았다. 내려다보지 않을 것이다.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정도로 번역될 수 있는 이 가사에서는 지킬의 목표 달성 의지 자체가 부각되고 있다. 반면, 이 가사가 한국어 공연에서는 “지금 이 순간. 내 모든 걸. 내 육신마저, 내 영혼마저 다 걸고. 던지리라. 바치리라. 애타게 찾던 절실한 소원을 위해”로 번역되면서 목표 달성 자체보다는 이를 위해 자신의 목숨과 영혼까지 바치겠다는 희생의 의지가 두드러진다.
여기서 또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이러한 변화가 지킬의 대표 배우 조승우가 구축한 캐릭터와 찰떡같이 맞아떨어졌다는 사실이다. 초연부터 2018년까지 총 다섯 차례 주연을 맡았던 조승우는 열정적이면서도 미숙하고 순수한 청년으로 지킬을 표현한다. 번역된 가사가 보여주고자 하는 지킬의 모습이다. 이는 권위있고 당당한 신사나 외골수 과학자 등 동일한 캐릭터를 연기한 다른 배우의 해석과는 차별되는 지점으로 관객들 사이에 인물에 대한 연민과 안타까움을 좀 더 강하게 불러일으켰다. 뮤지컬 평론가 최승연이 지적한 바와 같이 실제로 조승우는 브로드웨이 공연과는 달리 모성 본능을 자극하는 지킬의 이미지를 새롭게 구축해 폭발적 반응을 이끌어냈고, 그가 연기하는 지킬은 ‘정전’으로 다른 배우들이 연기하는 지킬의 이미지를 압도하면서 한국에서 이 작품이 해석되는 맥락을 주도했다.
뮤지컬 번역은 연출가, 음악감독, 번역가, 배우 등 다양한 주체가 참여하는 집단적 작업이며 번역된 가사와 대사는 공연 준비기간 뿐 아니라 공연 중에도, 나아가 재연에서도 지속적으로 변하는 만큼 배우의 캐릭터 구축과 가사와 대사 번역 사이의 명확한 선후 관계나 영향 관계를 파악하기는 어렵고 그럴 이유도 없다. 또, 다른 배우의 해석과 매력이 작품의 완성도와 흥행에 미친 지대한 영향을 과소평가하려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원작의 내용이나 흥행 여부에 상관 없이 한국인의 취향을 정확히 파악해 현지화 방향을 설정하고, 그러한 현지화 방향과 번역되는 가사와 대사, 이를 실제로 구현하는 배우의 캐릭터 해석이나 이미지가 유기적이고 정교하게 맞물릴 경우 관객이 느끼는 감동과 흥행 성적 역시 원작과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 본 칼럼은 2017년 출판된 ‘뮤지컬 가사 번역에서 배우의 영향에 대한 고찰-지킬앤하이드(Jekyll & Hyde)를 중심으로’ 제하의 논문 일부를 발췌 및 수정한 것입니다. 영어 가사는 2005년 8월 30일 발매된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OST), 한국어 가사는 2006년 6월 21일 발매된 한국어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OST)을 참고했습니다.
이화여대 통역번역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현재 동국대 영어영문학부 영어통번역학과 조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 연구 분야는 뮤지컬 번역으로, ‘Taboos, Translation, and Intersemiotic Interaction in South Korea‘s Successful Musical Theaters’, ‘국내외 뮤지컬 번역 연구 현황 및 향후 연구 방향’, ‘패밀리 뮤지컬 번역과 아동 관객: ‘마틸다’를 중심으로’, ‘뮤지컬 번역에서 상호텍스트성에 대한 멀티모달적 고찰: ‘썸씽로튼’을 중심으로’ 등 라이선스 뮤지컬 번역 현상을 다각도로 분석한 논문을 A&HCI급 국제 학술지, KCI 등재지 등 국내외 저명 학술지에 활발하게 출판하고 있다.
장병호 (solanin@e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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