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로 미래로] 한 맺힌 전시 국군포로·납북자…“생사라도”
[앵커]
6.25 전쟁 중에 포로로 잡힌 우리 국군과 민간인 신분인데도 강제로 납북된 우리 국민들이 모두 합해서 16만 명으로 추산됩니다.
남겨진 가족들은 납북된 혈육의 생사조차 확인하지 못한 채, 오랜 세월을 보내야 했는데요.
지난달 28일, 통일부가 발표한 조직개편안을 보면, 장관 직속으로 납북자와 국군포로, 억류자 문제를 담당하는 기구를 신설하겠다는 계획이 담겨 있습니다.
남북관계가 극도로 경색된 현재 시점에서 통일부가 납북자와 국군포로 문제 해결을 역점 과제로 추진하겠다는 뜻으로 해석되는데요.
매우 어려우면서도 역설적인 상황이 된 것 같습니다.
정전 체제 70 년.
모진 세월을 견디고 남한으로 탈출한 한 국군포로와 아직도 가족의 송환을 염원하고 있는 한 납북자 가족을 최효은 리포터가 만났습니다.
[리포트]
전쟁 당시, 북으로 끌려간 국군포로는 6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됩니다.
지난 2000년에 천신만고 끝에 두만강을 넘어 북한을 탈출한 유영복 할아버지도 그중 한 명입니다.
입대한지 47년 만에 치른 전역식은 지금도 생생하다고 합니다.
[유영복/탈북 국군포로/93세 : "군번 93049 육군 하사 유영복 전역식을 명받았습니다. 이렇게 보고를 했지."]
정전협정 이후 송환된 국군포로는 8천 3백여 명에 그쳤고 이후론 80여 명이 목숨을 건 탈북을 통해, 남한에 돌아왔다고 합니다.
백발의 노인이 돼서야 전역신고를 했다는 유영복 노인은 6.25 전쟁 당시에 북한에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국군포로로 47년이라는 혹독한 세월을 견딘 뒤 2000년 7월에 북한에서 극적으로 탈불했는데요.
그 모진 세월을 견딜 수 있었던 힘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1952년 22살에 입대해, 육군 5사단에 배치된 유영복 할아버지는 1953년 6월, 격전지였던 강원도 금화 전투에서 중공군에 의해 포로가 되었습니다.
정전협정 이후, 포로 교환의 기대는 번번이 좌절되었고, 이후로 오랜 시간 광산 노동에 동원됐다고 합니다.
[유영복/탈북 국군포로/93세 :"검덕광산이란 데 제일 큰 광산인데 첨에 가서는 아주 힘든 노동을 시켰어요. 막노동인데 정광을 포장해서 운반하는 70kg씩 가마에 포장해서 싣고 나르는 그런 중노동을 시키더라고..."]
그의 거칠어진 손끝은 고된 세월의 흔적을 말없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북한은 1956년에서야 국군포로들에게도 우리의 주민등록증 같은 공민증을 발급합니다.
하지만 북한은 이들 국군포로들을 별도로 관리했고, 극심한 차별과 감시가 이어졌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북한은 공식적으로 국군포로의 존재를 부인하고 있습니다.
[유영복/탈북 국군포로/93세 : "우리보고 포로라고 안 해. (그러면요?) 자기네들이 해방시켜 준 해방전사래. 해방전사."]
오직 남한으로의 송환만을 기다렸던 유용복 씨는 70세 나이에 탈북을 감행했고, 꿈에 그리던 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유영복/탈북 국군포로/93세 : "아버지하고 같이 찍은 거예요. 아버지 모시고 설악산 갔던 거고."]
그는 또 자신처럼 국군 포로라는 자존감을 지키며 힘들게 살아있을 전우들을 이제는 국가가 기억할 때라고 말합니다.
[유영복/6.25전쟁 참전용사 : "데려오지 못해도 훗날 세월이 변화돼 서 교류가 되면 북한에서 비참하게 죽은 사람들 유해라도 모셔 오는 게 대한민국의 의무가 아니겠는가."]
전쟁 당시 우리 곁을 떠나야만 했던 사람들은 국군포로만은 아니었습니다.
수많은 민간인이 강제 납북됐고 이상일 씨도 2살 때 아버지와 헤어졌습니다.
[이상일/납북자 이봉우 씨 아들 : "(아버지 존함이 어떻게 되실까요?) 이자 세봉자 비우자 이봉우입니다. 저희 부친입니다. 제가 알기론 신촌 1년차 되셨을 때 농촌진흥청 잔디밭에서 촬영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지만 그의 이름만 떠올려도 여전히 마음에 사무치는 존재입니다.
[이상일/납북자 이봉우 씨 아들 : "지금도 아버지 소리만 하면 먹먹해지고 평생 아버지 소리 한번 불러보고 싶은 것이 제 소망입니다."]
6.25전쟁 당시 납북된 민간인의 규모는 10만 명으로 추산됩니다. 이상일 씨의 아버지도 그 중 한 명인데요. 촉망받는 곤충학자였던 아버지가 납북된 이후 가족의 삶은 송두리째 흔들렸다고 합니다.
오는 21일이 되면 아버지가 납북된 지 정확히 73년이 되는 날입니다.
["어서오세요. (안녕하세요.) 저희 고모님이세요."]
잊을만한 세월이 지났지만 고모 소우 씨는 오빠의 모습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소우/납북자 이봉우 씨 여동생 : "(오빠는) 주변 사람들이 굉장히 좋아하고 기대가 많이 되는 그런 청년이었다고 생각이 들어요."]
서울대 농대를 졸업하고, 수원의 농촌진흥청에서 근무하던 이봉우 씨는 매우 열성적인 곤충학자였다고 소우 씨는 회고하는데요.
납북된 날에도 연구 자료 관리를 위해 사택을 방문했다고 합니다.
[이소우/납북자 이봉우 씨 여동생 : "표본 해 놓은 곤충 모아둔 거기가 궁금하니까 오빠가 책임자니까 그걸 한번 둘러보려고 오빠하고 나하고만 우리 사택으로 온 거에요. 둘이서 겸상을 해서 밥을 먹고 있는데 두 분이 오셔서 (오빠에게) 이 선생 갑시다 그러더라고요."]
이봉우 씨는 그날 이후 행방불명됐고 가족들은 포승줄에 묶여 북으로 끌려갔다는 소문만 들었습니다.
당시 북한은 체제 확립에 필요한 지식인들을 대거 납북했다고 합니다.
[이상일/납북자 이봉우 씨 아들 : "춘원 이광수 씨라든가 정인보 선생 같은 분도 당시에 납치가 되셨죠. (아버지는) 특히 병충해 관련 벼멸구라든가 그런 곤충을 연구하시고 했기 때문에 (납북되지 않았을까...)"]
21살 나이에 혼자 남겨진 어머니는 수절하면서 아들을 길렀고 상일 씨는 납북자 가족이라는 억울한 낙인까지 찍히면서 힘든 시절을 보냈다고 합니다.
[이상일/납북자 이봉우 씨 아들 : "(과거에) 정보 요원들이 와서 혹시라도 어떤 '북쪽하고의 접촉을 하지 않을까' (감시하는) 그것이 바로 연좌제입니다. 납치되신 후에 (저는) 사관학교라든가 국가에서 관련한 그런 직장이나 연구기관에 취업하기가 굉장히 어려웠습니다. 거의 안 됐죠."]
그러던 중 지난 2006년 아버지의 생존 소식을 듣게 됐고 극적으로 상봉 기회가 마련됐지만 이도 결국 무산됐습니다.
[이상일/납북자 이봉우 씨 아들 : "금강산에서 상봉하기로 됐는데 (상봉) 한 3~4일 전에 북측으로부터 상봉 거절 공문이 왔어요."]
여전히 상봉 거절 이유를 정확히 알 수 없어 더 마음이 쓰인다고 합니다.
남북 관계가 좋아질 때는 좋다는 이유로 납북자 송환 문제는 우선순위에서 밀렸고 지금처럼 경색이 됐을 때는 아예 논의조차 못 하는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통일부의 조직 개편 소식에 이상일 씨는 새로운 희망을 다시 걸어봅니다.
[이상일/납북자 이봉우 씨 아들 : "위로의 얘기 한마디 들은 적이 없어요. 후세대들의 바람은 언제 돌아가셨으면 돌아가셨다는 생사 확인 또 두 번째로 원한다면 유해 송환이라도 자식된 입장에서 그걸 바라는 거죠."]
정전협정 이후 돌아오지 못한 국군포로와 납북자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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