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사운드와 ‘찰떡’…반갑다, 돌아온 장기하

한겨레 2023. 8. 19.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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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익의 노래로 보는 세상][이재익의 노래로 보는 세상] 장기하와 영화 ‘밀수’ 음악
한국방송, 뉴 제공

21세기 이후 우리 대중가요의 몸통은 케이(K)팝이다. 대중적 인기, 비즈니스의 규모, 영향력 등 많은 기준에서 케이팝을 능가하는 가요 장르는 없다. 그리고 티브이(TV) 예능프로그램과 결합하면서 득세한 트로트와 힙합 장르가 케이팝 다음으로 큰 비중을 차지한다. 나는 케이팝도 트로트도 힙합도 다 좋아하지만, 오래전부터 이어져 오던 록과 포크의 물줄기가 말라버린 것 같아서 영 서운하다. 서운함이 너무 커져 속상해질 때마다 장기하를 듣는다. 그리고 안도한다.

장기하 이야기를 할 때마다 잔나비의 리더 최정훈이 떠오른다. 나는 두 사람이 상호보완적인 관계라고 생각한다. 1982년과 1992년생으로 딱 10살 차이가 나는 장기하와 최정훈은 태어났을 때 유행했던 8090 가요는 물론이고 부모 세대 옛날 가요까지 계승한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둘 다 록을 기반으로 음악을 만들지만 장기하가 엉뚱하고 기발하다면 잔나비의 음악은 다분히 서정적이라는 차이점도 있다. 영화로 치면 블랙코미디와 로맨스의 차이랄까.

잠깐 소식이 뜸하다 싶었던 장기하는 요즘 극장가를 달구고 있는 영화 ‘밀수’의 음악감독으로 돌아왔다. 1970년대라는 시대적 배경도, 액션과 코믹이 버무려진 소동극이라는 장르도 장기하와 너무 잘 어울렸다. 삼척 앞바다에서 촬영된 이 영화에는 산울림, 이은하, 신중현, 최헌, 김추자 등 당대 인기곡들이 파도처럼 출렁인다. 영화를 본 관객들은 장기하가 이 노래를 다 선택했다고 착각하기도 하는데 그렇지 않다. 노래는 먼저 골라져 있었고, 장기하는 흔히 ‘스코어’라고 부르는 영화 음악을 작곡했다. 영화 내용과 기성곡 사이를 쫀쫀하게 메워내는 솜씨가 역시 장기하라고 감탄할 만하다.

장기하와 최정훈은 상호보완적인 관계다. 한국방송 제공

케이팝과 트로트, 힙합이 지금처럼 거대해지기 전에, 장기하는 훨씬 더 대중적인 아티스트였다. 그의 밴드 ‘장기하와 얼굴들’은 정규 앨범을 5장이나 발표했고 공연도 많이 하고 상도 많이 받았다. 중요한 곡들을 살펴보자. 포크록을 새로운 감성으로 되살려낸 1집에서는 ‘싸구려 커피’, ‘달이 차오른다, 가자’를 꼽을 수 있겠다. 하드록 밴드의 존재감을 과시하면서 명반 대열에 오른 2집은 연주에 집중하면서 앨범 전체를 쭉 듣는 게 좋은데 ‘그렇고 그런 사이’가 특히 인기를 얻었다. 개인적으로 제일 좋아하는 3집에서는 ‘사람의 마음’이 많은 사랑을 받았다. 4집은 앨범 타이틀과 같은 긴 제목의 노래 ‘내 사랑에 노련한 사람이 어딨나요’와 가요 역사상 가장 짧은 제목의 노래 ‘ㅋ’가 사랑받았다. 5집에서는 장기하의 유머러스한 노랫말이 절정에 이른 노래가 히트했다. ‘그건 니 생각이고’. 정규 앨범 사이사이에 발표했던 영화 삽입곡 ‘풍문으로 들었소’와 ‘새해 복’ 같은 싱글도 장기하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다.

데뷔 후 10년 동안 장기하는 정말 바쁘게 활동했다. 밴드 활동 외에 라디오 진행도 하고 티브이 출연도 많았다. 그런 그가 밴드 활동을 마무리한다고 했을 때 나는 적잖이 충격받았지만, 해산의 변을 듣고 인정과 감사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밴드로서 만들 수 있는 최고의 앨범을 만들었고, 이 이상의 음반을 만드는 건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밴드 활동을 마무리한 장기하는 작년에 솔로 앨범을 발표했다. 5곡이 들어 있는 미니 앨범인데 인생을 달관한 사람인 양 덜어낼 수 있는 것들은 모두 덜어낸 음악을 선보였다. 심지어 록 음악의 등뼈와도 같은 베이스 파트를 아예 없애버렸다. 베이스뿐만 아니라 악기 연주가 거의 없다. 수다나 장광설 같기도 했던 특유의 노랫말도 극도로 아꼈다. 밴드 ‘장기하와 얼굴들’의 음악이 록과 포크였다면 솔로 장기하의 음악은 장르 개념조차 무의미해졌다. 실험과 도발 그 절정에 4번째 트랙 ‘가만있으면 되는데 자꾸만 뭘 그렇게 할라 그래’가 있다. 가사를 보자.

‘가만있으면 되는데 자꾸만 뭘 그렇게 할라 그래.’

가사 일부가 아니라 이게 전부다. 기묘하게 이어지는 비트 위에 이 문장만 계속 반복된다. 마치 곡 작업을 할 때 자신에게 건 주문 같기도 하다. 가만있으면 되는데, 왜 자꾸만 기타를 얹으려고 하고 가사를 더 붙이려고 하고, 자꾸만 뭘 그렇게 할라 그러냐고. 그렇게 자신을 다독인 끝에 이렇게 희한한 노래가 나왔다. 누구보다 왕성하게 활동하던 장기하가 득도한 사람처럼 무위의 상태를 지향하는 모습에 겁이 덜컥 났다. 이러다가 아예 음악을 접는 건 아닐까? 설마….

조마조마하던 차에 영화 ‘밀수’에서 다시 장기하를 만났고, 너무 반가워서 오늘 칼럼의 주인공으로 모셨다. 그가 깨달았으면 좋겠다. 더이상 할 게 없다고? 그건 니 생각이고! 가만히 있기에는 그대의 재능이 너무 아깝다. 자기 음악에 노련한 가수가 어딨나? 팬들과 당신은 이미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되어버렸다. 당신이 싸구려 커피처럼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대중가요를 발표했다는 소식을 풍문으로 듣고 싶다. ㅋ.

에스비에스 라디오 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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