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스토리] 수녀 꿈꾸던 소녀, 최초 교육감 되다
['제주스토리'는 제주의 여러 '1호'들을 찾아서 알려드리는 연재입니다. 단순히 '최초', '최고', '최대'라는 타이틀에만 매몰되지 않고, 그에 얽힌 역사와 맥락을 짚을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또한 그 속에 담긴 제주의 가치에 대해서도 전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누구라도 남의 압박을 받고 있는 것은 싫은 것으로 누구나 자유를 바라고 있으므로 조선도 자유의 나라가 되고 싶어서 독립을 원하는 것이다."
최정숙 베아트릭스(1902~1977). 제주 최초이자, 국내 최초의 여성 교육감으로 일제시기 3·1 만세운동을 벌여 옥고를 치렀고 나중엔 의료인에 길을 걷기도 했던 제주 출신의 선각자가 했던 발언입니다.
며칠 전 제78주년 광복절에는 그의 생가터가 처음으로 공개돼 표지석 제막식이 열리기도 했습니다. 제막식엔 그의 제자이자 후배라고 할 수 있는 신성여고 출신 인사들이 참여해 그의 업적을 기리기도 했습니다.
수녀를 꿈꿨던 한 소녀가 최초 교육감이자 의사의 길을 걷게 된 사연을 알아봤습니다.
■ 아버지와 다른 길, 수녀 꿈꾸던 소녀 "독립 만세" 외치며 거리로
최정숙 선생은 1902년 제주시 삼도동(당시 제주읍 삼도리)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아버지 최원순과 어머니 박효원 사이의 6남2녀 가운데 맏딸로 태어났는데, '최 검사의 딸'로 불리며 귀여움을 받았다고 합니다.
머리가 비상해 여덟 살이 되던 해에 프랑스 신부 구마르첼리노가 세운 신성여학교에 입학해 1915년 3월 제1회 졸업생으로 학교를 마치게 됐습니다.
최 선생은 12살 때 학교 교사로 있던 수녀에게 큰 영향을 받아 수녀가 되겠다는 꿈은 안고 천주교 세례를 받기도 했습니다.
신성여학교를 졸업한 이후 유학길에 오르고 싶었지만 집안의 반대에 부딪혀 한동안 뜻을 이루지 못 했습니다.
당시 평안도에서 군수를 지냈던 아버지에게 편지를 통해 유학을 가고싶다는 의사를 밝혔지만 돌아오는 건 호통뿐이었다고 합니다.
최 선생은 이에 굴하지 않고 수백 통의 편지와 단식 투쟁을 벌여 결국 유학길에 오르게 됩니다. 그렇게 그는 1915년 경성사립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에 3학기로 편입하게 됩니다.
제주 출신이라는 이유로 편입 초반 구경거리가 되기도 했다던 그는 곧 학우들과 친해지게 됐고, 학문적으로도 두각을 드러내게 됩니다. 첫 번째 시험에서 2등을 차지했고, 2학년에 올라간 이후부턴 졸업까지 줄곧 우등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이후 다시 일본 동경 유학의 기회가 왔으나 집안의 반대 등으로 이를 포기하고 경성관립여자고등보통학교 사범과에 입학하게 됩니다.
최 선생은 1919년 1월 고종이 승하하자 이를 추모하기 위해 대한문에 다녀왔는데, 이를 안 일본인 교사가 그의 이런 행동을 질책했다고 합니다.
이에 그는 오히려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사범과 학생 79명을 규합해 '79소녀결사대'를 결성해 1919년 3·1만세운동에 참여하게 됩니다.
최 선생은 학교 기숙사 담을 넘어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고, 결국 일제 헌병의 손에 붙잡혀 유치장에 갇히게 됩니다.
이후 가혹한 취조와 고문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8개월가량의 옥고를 치르게 됩니다.
이는 최 선생의 아버지와는 사뭇 삶의 궤적이 다른 부분입니다.
그의 아버지 최원순은 일제강점기 고위 관료로 여러 보직을 거쳤습니다. 초대 제주지법 법원장을 지내기도 한 그는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만든 친일인명사전에도 등재된 인물입니다.
■ 제주 돌아온 최정숙, 교육자·의료인의 길로
수녀가 되길 희망했던 최 선생은 옥고를 치른 전력으로 꿈을 접어야 했습니다.
대신 여수원(女修園)이라는 배움터를 열어 밤낮으로 여성들을 대상으로 교육을 펼쳤습니다.
이후 이 여수원을 키워 사립 명신학교를 설립했는데, 낮에는 초등학교 과정을, 밤에는 성인 등을 대상으로 무보수로 배움을 전했습니다.
이 와중에 학교에서 조선어 노래를 가르쳤다는 이유로 또 한 번 옥고를 치르게 됩니다.
민족운동으로 옥고를 치르면서 당한 고문은 그녀의 건강을 갉아먹었습니다. 고문 후유증으로 고통을 받던 최 선생은 의술을 배워 구호사업을 하겠다는 결심까지 하게 됩니다.
마침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가 설립됐다는 소식을 접한 최 선생은 늦깎이인 37세의 나이로 학교에 입학해 의술을 배우게 됩니다.
그러나 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할 즈음해서 또 하나의 시련이 찾아오게 됩니다.
각고의 노력으로 의사 면허를 땄는데 중학교 학년제가 4년제로 개편되면서 학력 미달로 의사 면허를 받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다만, 면허는 받지 못했지만 의사 고시엔 합격한 상황이어서 병원 근무는 가능했습니다.
이즈음 이화여고에서 1년간 수료하면 졸업장을 주겠다는 제의가 있었고 최정숙 선생은 41살의 나이로 이화여고 학생으로 공부를 하며 동시에 교사와 위생감, 성모병원 내과의사 등 1인 4역을 소화했습니다. 이후 1년 만에 고등학교 졸업장, 대학 졸업장, 의사면허증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후 성모병원에서 근무를 하다가 고향의 상황이 좋지 않다는 소식을 접하고 1944년 귀향해 제주읍 삼도리에 의원을 열어 의료활동을 이어갔습니다.
제주에서 의료활동을 하면서도 일제의 핍박은 계속됐습니다. 최 선생에게 군의관이란 감투를 씌워 육군병원에서 근무하도록 강제징용을 꾀한 것입니다. 이때 최 선생에게 진료를 받기 위한 조선인 군속들의 발길이 이어졌다고 합니다.
그렇게 힘든 상황 속에서 광복은 벼락과 같이 찾아왔습니다.
■ 제주 최초 교육감, 국내 최초 여성교육감
해방 이후 최정숙 선생은 제주에서 교육을 통한 여성계몽 운동에 매진했습니다.
1949년엔 신성여자중학교 설립 인가를 받게 됩니다. 이후 가까스로 학교 문을 열게 되는데, 이는 최 선생이 다녔다가 졸업 직후인 1916년에 폐교된 신성여학교를 재건한다는 의미도 가졌습니다.
6·25한국전쟁 당시엔 한동안 휴교가 이뤄졌습니다. 최 선생은 이때에도 의료인으로서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의술을 펼쳤습니다.
이후 1953년엔 신성여자고등학교까지 개교해 1962년 정년 퇴임까지 교장직을 맡게 됩니다.
1955년 4월엔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교육, 사회, 의료사업 등 3개 분야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가톨릭 신자에게 수여되는 최고영예인 로마교황훈장을 받기도 합니다.
퇴임 이후 한동안 다시 의료 활동을 펼치던 최 선생은 1964년 1월 제주도 초대 교육감으로 선출됐습니다.
당시 국내에서 여성이 교육감이 된 사례는 최 교육감이 유일했습니다. 제주에선 최 교육감 이후 여성 교육감이 배출된 사례가 없습니다.
최 선생은 1968년 2월까지 교육감 재임 기간 동안 초등학교 교실 270실과 중등학교 교실 66실을 확충하는 등 제주교육의 기반은 다졌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특히, 인사 청탁에 있어선 철두철미한 모습을 보여 '고집쟁이'로 불리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는 과거 신문자료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교육감 취임 이후 국회의원, 장관, 지사 등의 메모를 들고 나를 찾은 사람이 많았지만 나는 교육계에서 이와 같은 정치적인 배경을 쓰는 사람은 한 사람도 기용하지 않았다. 교육계가 자기의 실력을 외면하고 백이나 쓸 줄 안다면 이들에게 학생들이 무엇을 배우겠느냐는 생각에서 뜻을 굽힐 수 없었다."(『제남신문(濟南新聞)』 1973년 10월 8일자)
■ 후배, 제자들이 찾은 최 선생의 발자취
최 선생이 제주에서 생활했던 곳에 대한 조사는 비교적 최근에 시작됐습니다.
발단은 최정숙 선생의 성신여학교 동창이자 독립운동의 동지이기도 했던 강평국 선생의 생가터를 찾는 활동이었습니다.
지난 2021년 강평국 선생의 생가터를 찾는 사업이 벌어졌고 곧이어 최 선생의 생가터를 찾고 기념하는 일에 대한 목소리가 나오게 된 것입니다.
신성학원총동문회최정숙기념사업단이 조사를 벌인 결과, 최 선생의 제주도내 발자취는 총 4곳으로 압축할 수 있었습니다.
광복절인 지난 15일 표지석 제막식이 열린 제주시 관덕로 14-1 인근(당시 삼도리 948번지)이 최 선생이 태어나 유년기를 보낸 집이 있던 자리라고 합니다. 현재는 건물은 없어지고 터만 남아 있습니다.
3·1절 만세운동을 벌이다 옥고를 치르면서 일제가 기록한 수형인명부 등이 단서가 됐습니다.
1930~1940년대엔 최 선생의 가족들이 함께 모여 살았다는 집도 바로 근처에 있습니다. 지금까지 건물이 남아 있는데, 현재는 음식점이 운영되고 있습니다.
말년엔 같은 동네에 있는 건물에서 여생을 보냈는데, 이 건물은 제주교구청에서 최 선생을 위해 내어준 것이라고 합니다. 바로 인근엔 수녀들이 기거하는 건물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외에도 현재 제주시 이도동에 있는 집이 있는데, 이 건물에선 최 선생이 의사 생활을 하며 약품을 보관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고 합니다.
■ 독립유공자 인증, '이렇게 어려워서야'
제주보훈청이 추정하는 제주지역 독립운동가는 약 500여 명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런데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은 독립운동가는 절반이 되지 않는 201명에 불과한 상황입니다.
비전문가인 독립운동가의 유족들이 직접 자료를 찾고 독립유공자 선정의 당위성 등 개발해야 하는 등의 실질적인 어려움이 있습니다.
제주4·3과 그 이후 예비검속 등으로 제주도내 많은 민가가 불에 타면서 상당 수의 자료가 소실된 것도 하나의 이유로 꼽힙니다.
대표적으로 고(故) 임도현 비행사(1909~1952)의 사례를 들 수 있습니다.
그는 일본 다치카와 비행학교에서 조종기술을 배우다가 일본군 비행기를 몰고 중국으로 탈출 이후 독립운동에 가담했습니다. 윤봉길 의사의 거사에도 가담했다가 이후 일본 경찰에 체포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독립운동으로 만세운동에까지 참여한 최정숙 여사도 대통령표창만 받았습니다. 대통령표창은 독립유공자의 최고 영예인 건국훈장보다 한 등급 낮은 서훈입니다.
그의 독립운동 동지였던 고수선, 강평국 선생이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은 것과는 대비되는 일입니다. 제주 최초 여성 의사였던 고수선 선생은 지난 1990년, 제주 최초의 여성 교사였던 강평국 선생은 202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습니다.
최정숙 여사가 건국훈장을 받지 못한 이유에 대해서는 훈격 평가 당시 기록 자료가 모자랐기 때문으로 보인다고 신성학원총동문회최정숙기념사업단 측을 설명했습니다.
오순덕 신성학원총동문회최정숙기념사업단장은 최정숙 선생 생가터 표지석 제막식이 열렸던 지난 15일 "최정숙 선생도 이번 기회(생가터 표지석 제막식)에 함께 활동했던 고수선, 강평국 선생처럼 건국훈장을 받을 수 있도록 도민들과 함께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JIBS 제주방송 신동원 (dongwon@jibs.co.kr)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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