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드라마에 빠진 중국인...일본제품 쓸어가더니 9억원에 팔렸어요 [추동훈의 흥부전]

추동훈 기자(chu.donghun@mk.co.kr) 2023. 8. 19. 0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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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부전-19][브랜드로 남은 창업자들-14] 토리이 신지로

한국에선 ‘아침드라마=막장드라마’란 인식이 존재합니다. 복잡한 출생의 비밀과 상상을 뛰어넘는 전개는 흥미를 넘어 경악을 금치 못하게 하고 김치싸대기, 오렌지주스 주르륵 사건 등 여러 장면들은 K-아침드라마를 대표하는 레전드 신입니다.

일본 드라마 맛상 포스터
그런데 가깝고도 먼 이웃나라 일본에서는 아침 드라마 한편으로 주류엽계를 뒤흔드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2014년 일본 위스키의 아버지라 불리는 ‘다케츠루 마사타카’의 일대기를 다룬 NHK 드라마 ‘맛상’이 그 주인공인데요. 이 드라마의 인기 덕분에 일본뿐 아니라 중국, 한국 등지에서 일본산 위스키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폭발했고 자연스럽게 일본 위스키는 없어서 못파는 제품이 됐습니다.

사실 일본은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미국, 캐나다와 더불어 세계 5대 위스키 생산국 중 한 곳으로 전세계적으로도 ‘재패니즈 위스키’로 불리울 정도로 세계적인 위스키 강국입니다. 헌데 아는 사람만 알고 마시는 사람만 즐기던 이 일본산 위스키가 아침 드라마의 흥행으로 대중적으로 인기를 모으며 가정주부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했고 해당 위스키업체들도 재빨리 대응에 나서 수량 조절에 나서며 자연스레 가격 상승으로 이어졌습니다.

산토리 위스키 야마자키 55년산
특히 최근 한국에서도 MZ세대를 중심으로 하이볼과 위스키 붐이 불고 있는데요. 일본 산토리가 지난 2020년 1월 100병 한정으로 출시한 야마자키 55년산은 홍콩의 한 경매장에서 무려 79만달러, 한화 9억원에 낙찰되며 화제를 모으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왜 갑자기 흥부전(‘흥’미로운 ‘부’-랜드 ‘전’(傳))에 위스키 이야기냐구요? 오늘의 주인공 역시 브랜드에 이름을 남긴 창업자, ‘토리이 신지로’이기 때문입니다. 앞서 언급한 두명의 일본인 중 익숙한 브랜드가 있으신가요? 잘 모르시는 분이 많으실텐데, 오늘의 브랜드는 다름아닌 산토리입니다. 보통 맥주 브랜드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일본 최초의 위스키가 바로 산토리에서 시작했다는 사실 알고 계신가요?

산토리 맥주 광고
술을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앞에 두명의 일본인은 몰라도 산토리는 잘 아실텐데요. 바로 산토리에 창업자의 이름이 숨겨져 있습니다. 산토리는 태양(Sun)의 일본식 발음인 ‘산’과 토리이 신지로의 ‘토리이’를 붙여서 만들어진 브랜드입니다. 그렇다면 토리이 신지로는 어떤 사람이고 일본의 위스키는 어떻게 시작한 것일까요.
산토리 창업자 토리이 신지로
서양문물을 어느 나라보다 빠르게 받아들였던 일본. 서양의 술 역시 일본에 가장 먼저 소개됐는데요. 역사서에 따르면 1852년 오키나와의 류큐 왕국을 방문한 동인도 함대의 매튜 페리 제독이 만찬에 참석하며 처음으로 미국산 위스키와 스카치 위스키를 가져왔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그리고 재패니즈 위스키의 진짜 시작은 바로 토리이 신지로부터 시작됩니다.

1879년 오사카에서 태어난 토리이는 지방에서 상점을 운영하고 환전상으로 일한 아버지를 따라 약품, 주류 등 각종 수입 물품을 유통하고 판매하는 가게를 운영했습니다. 그는 7년여간의 견습생활을 끝내고 20대 초반의 나이에 직접 토리이 상점을 열었습니다. 특히 ’오사카의 코‘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후각이 뛰어났던 그는 맛과 향으로 점철된 술, 특히 와인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아카다마 포트와인
우연히 외국산 와인을 처음 접한 토리이는 그 풍부한 맛에 매료돼 스페인 와인을 수입해 판매하며 큰 돈을 벌었습니다. 사업의 성공덕에 그는 직접 일본산 와인을 만들겠다는 꿈을 꾸기 시작했고 그렇게 1907년 아카다마(赤玉)란 포트와인을 생산해 판매하기 시작합니다. 붉은 구슬이란 뜻을 가진 아카다마의 병을 살펴보면 빨간 구슬이 그려져 있는데 이 모양이 태양과 비슷하다고 해 산토리의 ‘산(Sun)’으로 빌렸습니다. 아카다마는 오사카 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인기를 모았고 한국에도 수입되기도 했습니다. 또한 지금까지도 판매가 이뤄지며 지금의 산토리를 일구게 된 히트작이 됩니다.

그리고 토리이는 다음 꿈을 향해 다가갔습니다. 바로 와인과 더불어 큰 관심을 갖고 있던 위스키의 국산화에 나선 것입니다. 일본에서 직접 위스키를 생산하기 위해 좋은 물을 구할 수 있고 위스키를 만드는데 적절한 기온과 습도를 갖춘 곳을 찾아 헤매던 그는 오사카와 쿄토 사이에 위치한 야마자키 지역에 증류소를 짓기로 결정합니다.

헌데 문제는 수백년의 역사와 전통, 노하우가 필요한 위스키 생산을 위한 전문성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와인보다도 훨씬 복잡하고 오랜 시간이 필요한 위스키 공정을 위해 수소문에 나선 그는 그렇게 귀인을 만납니다. 바로 아침드라마 맛상의 주인공, 다케츠루 마사타카입니다.

다케츠루 마사타카
다케츠루는 토리이 못지 않게 드라마같은 삶을 산 인물입니다. 1894년 히로시마의 양조장 집 아들로 태어난 다케츠루는 자연스럽게 가업을 이어가기 위해 오사카 공고 양조과를 졸업해 셋쓰주조에 취직합니다. 어릴적부터 양조기술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던 그의 능력을 알아본 회사는 1918년 일찌감치 그를 위스키의 본산인 스코틀랜드로 유학을 보냅니다. 2년간의 유학생활 동안 그는 스코틀랜드의 글래스고 대학교에서 수학하며 수많은 지식을 습득하고 머릿속에 담아옵니다.

그는 유학생활 내내 만년필을 지니고 다니며 증류소 내부를 스케치하고 메모하는 습관이 있었는데 꼼꼼하고 빈틈없는 그의 성격은 향후 일본의 위스키 산업 발전에 큰 공을 세우게 됩니다. 이러한 그의 습관은 리처드 버틀러 전 영국 부총리가 1960년대 일본을 방문해 “한 일본 청년이 만년필 한 자루로 우리의 (위스키) 기술을 훔쳐갔다”고 이야기하며 대중적으로 알려지기도 했습니다.

토리이는 다케쓰루의 역량을 한눈에 알아보고 연봉을 기존의 10배를 주고 공장장으로 영입해옵니다. 30살에 불과한 다케츠루에게 자신의 운명을 건 것이죠. 운도 따랐습니다. 유학길을 마치고 돌아온 다케츠루의 회사는 경영난으로 도산했고, 결국 임시방편으로 화학교사로 일하고 있던 그에게 토리이의 제안은 거부할 수 없는 기회였습니다.

사업가 토리이와 전문가 다케츠루는 첫 만남부터 서로를 알아봤습니다. 다만 시작부터 손뼉이 딱 마주치진 못했습니다. 다케츠루는 최적의 위스키 생산에 알맞는 홋카이도에 증류소를 지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토리이는 물류비용 등의 최적화를 위해 자신이 점찍어둔 야마자키로 가야 한다고 부딪혔죠. 결국 사장인 토리이의 주장을 못이긴 다케츠루는 야마자키로 양보하며 본격적인 일본의 위스키 산업이 태동하기 시작합니다. 1923년 그렇게 야마자키 증류소가 탄생합니다.

야마자키 증류소 전경
그로부터 6년의 시간이 지난 1929년 첫 위스키가 세상에 나옵니다. 산토리라는 브랜드 역시 1929년에 처음 등장합니다. 첫 위스키의 이름은 산토리 시로후다(白札). 화이트라벨로 불리는 제품입니다. 1년뒤 1930년엔 아카후다(赤札), 즉 레드라벨이 출시됩니다. 너무 기대가 큰 탓이었을까요. 시장은 혹평을 쏟아냈습니다. 문제는 일본인의 입맛에는 너무 독했던 것입니다. 스코틀랜드 위스키의 독특한 향이 외면을 받으며 첫 제품들은 토리이와 다케츠루의 사이를 더욱 멀어지게 하는 사건이 됐습니다. 결국 다케츠루는 입사 당시 약속한 10년간의 근무 기간을 거의 채우기 직전 회사를 떠나 독립을 선언했는데 이러한 운명은 둘의 시작부터 어쩌면 예견된 일이었던 듯합니다. 그렇게 그는 기존에 주장했던 최적의 증류소 건설 장소인 홋카이도에 요이치 증류소를 지었고 닛카 위스키를 만들었습니다.
요이치 증류소
위기의 산토리에 반전을 마련해준 것은 바로 각진 병이란 뜻을 가진 ’가쿠빈‘의 출시였습니다. 1937년 출시된 블랜디드 위스키인 가쿠빈은 일본인들의 입맛에 맞게 개량됐고 부드럽고 달콤한 목넘김으로 일본인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처음 실패를 반면교사 삼아 15년의 시간을 투자한 끝에 나온 성공작입니다. 하지만 성공의 달콤함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가쿠빈 광고
한창 주가를 올리던 산토리에 전쟁의 먹구름이 깊게 드리웁니다. 많은 직원들은 전쟁을 피해 공장을 떠났고 증류소 역시 전쟁의 여파 속에서 사실상 영업을 못했습니다. 그런데 또다시 반전이 등장합니다. 증류소에 근무하던 직원들이 공습을 피해 숙성된 위스키들을 들고 도망가 뒷산에 묻어버린 겁니다. 이때 오래 숙성된 위스키들이 전후 새로운 효자노릇을 합니다. 다시 맨땅에서 시작할 필요 없이 확보해둔 숙성 위스키 원액을 무기삼아 다시 재기에 나선 산토리는 전후 경제 발전과 함께 큰 인기를 이어갑니다.

또한 전후 산토리 위스키를 맛본 미군에게 입소문이 나며 금방 미국과 유럽, 전 세계에서 산토리의 인기가 높아져 갔습니다. 산토리는 1963년 맥주 출시를 나서며 위스키 브랜드였던 산토리를 회사명으로 바꿔버렸고 이후 청량음료 , 하이볼 등 각종 제품들을 출시하며 지금의 모습을 갖췄습니다.

산토리 하이볼
이처럼 재패니즈 위스키를 만들고 지금까지 키운 토리이 신지로는 1962년 2월 숨을 거둡니다. 올해는 야마자키 증류소가 지어진 지 꼭 100년된 해입니다. 일본 내에서도 증류소 100주년을 기념해 다양한 리미티드 에디션을 출시하고 홍보에 나서고 있습니다. 또한 야마자키 증류소 역시 올해 리모델링에 들어가며 현재는 투어 프로그램이 중단돼 있다고 합니다.

영원히 서양의 술이자 문물로 남을뻔 했던 위스키. 일본은 100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공을 들이고 노력해 국산화에 성공하고, 재패니즈 위스키라는 고유의 영역을 일구어냈습니다. 하루에도 유행이 몇번씩 바뀌는 요즘 시대, 결국 진짜 명품은 결국 속도만으로 이뤄지지 못하는 것이 분명한 것 같습니다. 대한민국의 K-브랜드 역시 지나가는 유행가처럼 지나가지 않고 100년 넘게 기억되고 간직될 수 있는 브랜드로 남을 수 있기를 기원해 봅니다.

‘흥’미로운 ‘부’-랜드 ‘전’(傳). 흥부전은 전 세계 유명 기업들과 브랜드의 흥망성쇠와 뒷야이기를 다뤄보는코너입니다. 기자페이지를 구독하시면 더욱 알차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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