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와인] ‘파괴적 혁신 대신 비파괴적 창조’ 가야 이다 비앙코

유진우 기자 2023. 8. 19.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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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클레이턴 크리스텐센 하버드 경영대학원 교수는 ‘혁신 기업의 딜레마’라는 논문에서 ‘파괴적 혁신(disruptive innovation)’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기업이 경쟁자보다 더 좋은 제품을 소비자에게 제공하는 데 몰두하다 보면, 어느 순간 소비자들이 필요로 하는 기술 수준과 적정 가격을 넘어선 혁신 제품이 나온다’는 이론이다. 이 시기를 전후해 보잘것없이 시작했던 스타트업들은 이 이론을 추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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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창업자

페이스북과 우버, 넷플릭스, 세일즈포스 같은 신생 기업들이 파괴적 혁신을 무기로 업계를 재편했다. 이들 기업은 더 싸고 단순하면서 새로운 제품을 들고나와 시장을 잠식했다. 과거 시장을 점유했던 택시 운수업이나 비디오 대여점들이 파괴적 혁신 앞에 무너졌다.

와인 업계에도 2000년대 중반 이후 파괴적 혁신 바람이 불었다. 와인은 포도가 자란 땅의 기운이나 개성을 살려 만들어야 한다는 기존 개념은 희미해졌다. 대신 가격을 낮추기 위해 황산암모늄 같은 발효 촉진제를 넣거나, 인위적으로 향을 강화하기 위해 참나무 가루를 넣는 풍조가 대중 와인을 중심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렇게 만든 와인들은 2000년대 후반 전 세계를 덮친 경제 위기와 맞물려 적잖은 인기를 끌었다.

와인 전문가 팀 크레인은 2014년 기고한 영국 더 타임스 칼럼에서 “이제 소비자들은 병당 10달러(약 1만3000원)만 지불하면 꽤 마시기 좋은 와인을 쉽게 만날 수 있다”면서 “대신 그 대가로 방부제나 특정 기술을 일률적으로 사용해 만든 지루한 와인들이 시장을 점령했다”고 꼬집었다.

단기적 결과와 수익률에 얽매인 호황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2007년 2억5151만 리터였던 세계 와인 소비량은 2021년 2억3471만 리터로 뒷걸음질 쳤다. 오래도록 와인을 마셔왔던 주요 와인 생산국들의 반응은 더 차가웠다. 프랑스 방송사 RTL에 따르면 18~35세 연령 층에서 레드와인 소비량은 지난 10년 새 32% 감소했다.

20년 전 파괴적 혁신을 설파했던 경영학자들은 이제 ‘비파괴적 창조(nondisruptive creation)’ 이론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비파괴적 창조는 기존 산업 구조를 무너뜨리지 않고 새로운 시장·제품·서비스 등을 창출하는 방식이다.

와인 업계에 비유하면 비파괴적 창조는 ‘저렴한 가격’이라는 거부할 수 없는 가치를 위해 방부제나 인공색소 등으로 산업 전반에 걸친 신뢰도를 떨어뜨리지 않는다. 대신 사회적 조정 비용을 치르지 않고 소비자 시선을 끌 수 있는 새로운 프로젝트를 적극적으로 시도한다.

그래픽=손민균

이탈리아 와인 명가(名家) 가야(Gaya)를 이끄는 안젤로 가야는 현존하는 이탈리아 최고 와인 생산자로 꼽힌다. 그는 83세 나이로 여전히 포도 농사뿐 아니라 와이너리 경영을 일선에서 지휘한다.

1859년 문을 연 가야 와이너리 근거지는 이탈리아 북부 피에몬테 지방 바르바레스코라는 마을이다. 이 지역에서는 옆 마을 바롤로와 함께 현재 이탈리아에서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 와인이 나온다.

과거 이탈리아산(産) 와인은 국제 시장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이탈리아 이민자들이 향수를 달래기 위해 마시는 값싼 와인’이라는 멸시를 받았다. 가야 가문은 이전에 푸대접받던 바르바레스코 지역 알짜배기 밭들을 사들여 일찍부터 비파괴적 창조에 나섰다. 젖산 발효 같은 신식 양조 기법과 프랑스산 참나무통을 이 지역에서 제일 먼저 도입해 가격 낮추기 경쟁에 마침표를 찍었다.

1978년 안젤로 가야는 이탈리아에서 전통을 이유로 재배를 터부시하던 카베르네 소비뇽이라는 세계적인 포도 품종을 이 지역에 처음으로 심었다. 800년째 이탈리아 토종(土種) 포도 네비올로(Nebbiolo) 단일 품종으로만 와인을 만들던 기존 양조법을 통째로 뒤엎는 결정이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다르마기(Darmagi)’라는 와인은 이후 이탈리아 전역에서 전통 품종 대신 국제적인 포도 품종을 심는 계기가 됐다.

“안젤로 가야 덕분에 이탈리아 와인 혁명이 시작했다.”

세계적인 와인 평론가 로버트 파커, ‘세계 최고의 와인 유산’

이후 가야는 본거지였던 이탈리아 북부를 넘어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 평원 지대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와 중부 볼게리 해안 지대로 발을 넓혔다. 그는 “가야 와인이 피에몬테에서 출발했지만, 다른 지역에서도 좋은 와인을 만들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며 “일종의 벤처사업이었다”고 말했다. 이 역시 비파괴적 창조의 일환이었다.

1996년 볼게리 지역에 진출할 당시 안젤로 가야는 가장 좋은 밭을 사기 위해 땅 주인을 열아홉 번 찾아가 설득했다. 그는 이때 사들인 포도밭 이름을 카마르칸다(Ca’Marcanda)로 지었다. 카마르칸다는 현지어로 ‘끝없는 협상의 집’이란 뜻이다.

2017년에는 이탈리아 본토를 넘어 남부 시칠리아섬에서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안젤로 가야의 아들이자, 5대째 가업을 이어가는 지오반니 가야는 “아버지가 1999년 눈 덮인 에트나 화산을 비행기를 타고 지나가면서 ‘이곳에서 와인을 만들 것임을 직감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며 “하얀 눈으로 덮인 화산 정상부와 검은 화산재가 조화를 이룬 모습이 마치 가야 와인 겉면처럼 보였다고 했다”고 밝혔다.

운명은 18년 뒤에 현실이 됐다. 가야 이다 비앙코는 가야가 시칠리아에서 선보이는 비파괴적 창조의 산물이다. 이다는 시칠리아 지역에서 에트나 화산을 부르는 방언이다. 가야는 다른 와이너리가 줄줄이 자리 잡은 에트나 화산 북동쪽 대신 남서쪽 경사면 700미터 지대에 자리를 잡았다. 안젤로 가야의 딸 가이아 가야에 따르면 남쪽 경사면은 북쪽보다 더 따뜻하기 때문에 포도가 산도를 잃지 않으면서 더 빠르게 성장한다.

세계적인 와인 평론가들은 창립 이후 160년 넘게 새로운 시도를 거듭해 온 가야의 열정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이 와인을 꼽았다. 세계적 와인 석학 마스터 오브 와인(MW·Master of Wine) 수잔 헐미는 이 와인이 “이탈리아에서 가장 흥미진진하고 개성 넘치는 포도 품종으로 가야라는 주요 생산자가 모든 양조 기술과 요령을 집약해 만들어 낸 차별화된 와인”이라고 평가했다. 국내 수입사는 신동와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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