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수의 인터스텔라] “어느날 툭툭 기적이 내게로 왔다” 양희은

김지수 작가 2023. 8. 19.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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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살려면 ‘그럴 수 있어’
사는 건 힘 빼는 연습… 억울할 땐 걸어라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는 도무지의 노래
버려진 노래 대중이 발견해서 돌려준 ‘한계령’
가수 운명… 자전거 타다 화단 들이받은 격
라디오는 거대한 어깨동무… 이름 불러주고 편들어줘
▲신작 에세이 ‘그럴 수 있어’를 낸 가수 양희은. 살다보니 모든 사람에게 호감을 사려고 애쓰는 게 얼마나 무의미한 일인지 깨닫게 되었다는 형같은 국민 언니./사진=채승우

70년대 통기타 줄 위로 솟구치던 양희은의 노래는 그 음색의 청아함으로 씩씩함과 쓸쓸함의 급커브를 돌았다. 한때 저항의 노래로 거리를 휩쓸었으나, 기실 그의 목소리는 목련이 지는 봄밤이나, 계곡물의 온도가 변하는 가을 아침, 혼자서 듣기에 가장 좋았다.

깨어짐과 헤어짐을 감당하며 흐르듯 노래하던 내 젊은 날의 가수가 저렇게 묵직하게, 투명하게 거침없이 나이드는 모습을 보니 그 기백에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그러라 그래’에 이어 출간한 양희은의 신작 에세이 ‘그럴 수 있어’는 출간 몇 주만에 베스트셀러 상위에 안착되었다. ‘그럴 수 있어’! 10cm 볼펜으로 단번에 써내려간 양희은의 개운한 구어체가 겨울 동치미 국물처럼 시원하게 가슴을 적신다.

햇빛이 정수리에 내려꽂히던 무더운 어느날, 시간의 단차를 두고 양희은을 두 번 만났다. 코엑스 스타필드 별마당 무대에서 관객을 앞에 둔 공개 인터뷰로 한번, 일주일 후 상암 MBC 근처 카페에서 다정하게 마주 보고 또 한번. 두 번 다 캔디 컬러 셔츠와 안경이 맞춘 듯 화사했고 청바지가 잘 어울렸다.

서울 사람이라 또박또박 타자치듯 정확히 말할 뿐, 실상 남 앞에 못나서는 수동적인 사람이라고, 그는 인터뷰 무대에서 하염없이 떨리는 마음을 드러냈다. 글 쓰는 건 너무 어렵고 나이 들면 머리도 물기 없는 사막같아 미완성의 노랫말들만 잔뜩 쌓여있다고.

나는 이 관록의 어른이 뿜어내는 정처없는 정직에 깊이 매료되었다. 에스키모를 좋아하고 파브르 곤충기를 읽는 70대 여성, 스스로를 성인 ADHD라고 진단하는 이 형 같은 국민 언니를 만나보자.

-’그러라 그래’에 이어 ‘그럴 수 있어’ 연작시 같은 책이 나왔어요. 참으로 양희은답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다 후배들에게 툭툭 던진 말들이 모아졌어요. 사람들 말에 가타부타 속 끓이는 후배를 만나면 신경쓰지 마. 그 사람들 그냥 ‘그러라 그래’하고 툭 쳐줘요. 자기가 한 행동에 노심초사하는 후배들한테는 네 입장에서 ‘그럴 수 있어’ 두둔도 했고요. 한쪽이 한쪽을 밟아버리면 그건 좀 가슴 아픈 일이니까, 상대 입장에서 보면 그쪽도 살려고 그러는 거니 ‘그럴 수 있어’... 그랬죠.”

▲양희은 베스트 3곡을 꼽아보라고 했더니 단번에 ’백구’ ‘저 바람은 어디서’ ‘나 떠난 후에라도’를 꼽았다. “히트곡과 가수가 좋아하는 곡은 일치하지 않아요”라며./사진=채승우

양희은의 책을 읽다 보면 명사 동사 형용사 접속사처럼 목적이 분명한 똑똑한 말들보다 ‘도무지’ ‘문득’ 같은 변두리 부사들이 사소하고 헛헛한 이야기를 끌어올리는 것 같았다.

-언젠가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의 가사는 ‘도무지’가 길어올린 이야기라고 읽은 적이 있어요. 뉴욕에서 기타리스트 이병우와 노래를 만들 때, ‘사랑’이라고 쓰고 나니 도무지 무슨 말을 써야할 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랬어요. 도무지 모르겠다, 도무지 모르겠다… 그랬더니 도무지가 뒷말을 끌고 왔어요. ‘도무지 알 수 없는 한가지, 사람을 사랑한다는 그 일 참 쓸쓸한 일인 것 같아’... 그때는 참 산다는 게 쓸쓸했어요. ‘문득’이라는 말도 참 놀라운 말이에요.”

뭘 써야할 지 모를 땐 ‘도무지, 문득’이 도우려 달려올 거라고 했다.

-문득 궁금합니다. 가수가 된 건 운명인가요?

“저는 가수가 되고 싶지 않았어요. 그냥 인생이 이 길로 끌고 왔어요. 나무 그루터기로 가려다 화단 경계석을 들이받은 자전거처럼. 언젠가 강화도에서 자전거 타다 몇 미터 아래 밭두렁으로 굴어떨어질 때도 그 생각을 했어요. 인생이 참 이상한 곳으로 날 끌고 가는구나. 저는 오십 줄에 자전거를 처음 배웠어요. 자전거 교실에서 수료증까지 받았는데, 그때 제일 먼저 넘어지는 걸 배워요. 가만 보면 인생은 넘어진 자전거를 일으켜서 끌고가는 일 같아요.”

-일찌감치 꿈을 이룬 분으로 알았습니다.

“(미소지으며)저는 초등학교 1학년 때 통지표에 적혀있던 문구를 정확히 기억해요. ‘주의산만. 인내력 부족.’ 인내력은 살면서 나아졌지만 주의산만은 여전해요. 어른 ADHD죠. 그냥 무계획적으로 살아요. 가수도 그랬어요. 저한텐 노래가 생계였어요. 노래를 사랑은 했지만, 직업이 되면서 사랑을 느끼기는 힘들었어요.”

-그래도 성취감은 있으시죠?

“이거 아닌데, 이거 아닌데…하다 ‘이거다!’하는 짧은 순간을 보고 가는 거죠.”

주의 산만하던 어린이가 삼청공원으로 가회동 언덕으로 동네 남자애들 끌고 다니며 대장 노릇하다 십 대가 됐고,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해 사방팔방 노래로 빚 갚으며 가장 노릇하다 보니 이십 대가 됐다.

그렇게 세끼 밥 차리고 강아지 돌보며 방송국과 목욕탕, 수영장과 정발산을 오가다 보니 칠십 줄에 들어섰다. 암도 걸려봤고, 우울증도 앓아봤다. 그동안 사람 보는 촉은 좀 생겼으나 노래 보는 촉은 여전히 모르겠다고 했다.

▲청바지에 통기타를 들고 다니던 젊은 날의 양희은.

-노래의 운명은 부르는 가수도 예측할 수 없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것 같아요. 내 노래 중에 ‘한계령’은 음반 회사 사장이 아주 싫어했어요. “너는 대학 다닐 때는 (’아침이슬’ ‘상록수’ 같은 노래로) 나를 남산에 끌려가게 만들더니 대학 졸업하고는 왜 또 장사 안될 노래만 골라서 부르니?” 면박을 줬죠. 그런데 그 노래를 사람들이 찾아내서 퍼뜨려 줬어요.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도 드라마에 배경 음악으로 나오면서 알려졌어요. 유명 연속극, 단막극, 심지어 ‘전원일기’에서 복길이도 그 노래를 울면서 따라 불렀어요. 제가 이병우와 뉴욕에서 만들어서 왔을 땐 모든 음반사에서 ‘노래는 좋은데 되겠어?’ 거절했던 앨범이거든요. 그렇게 쓸쓸하게 흘러가다 결국 대중에게 발견되는 순간이 있어요. 그걸 예측할 수는 없어요.”

대중이 좋아할 만한 스타일을 편곡해 틱톡으로 단숨에 띄우는 세상에서, 여전히 ‘노래의 운명은 예측할 수 없다’는 양희은의 말은 신비롭게 들렸다.

-저는 ‘한계령’을 들으며 그 바람길을 나침반 삼아 젊은날 지리산을 헤매고 다녔습니다. 그 시절 양희은의 노래가 없었다면 어떻게 그 스산한 시간을 견뎠을까 싶어요. 노래를 부를 때마다 가사를 얼마나 생각하시는지요?

“노래를 부를 때도 사연을 읽을 때도 깊이 잠수해 들어가요. 이야기 안으로 쑥 들어가지요. 특히 말하듯 노래하고 노래하듯 말하기 위해서는 치아 구조까지 연구하게 돼요. 발음이 깔끔하게 딱 떨어져야 정확히 전달이 되니까요.

저는 노래와 방송을 거의 동시에 시작했어요. 70년대에 한 섬마을 소년이 겨울 방학이 오면 트랜지스터로 제 목소리를 들으며 외로움을 견뎠다는 사연을 보내왔어요. 제 방송을 들으면 공동묘지 곁을 지나도 무섭지 않다고요. 저는 그 말이 너무나 무서웠어요.”

-무엇이 그렇게 무서우셨어요?

“누군가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 나는요, 당시에 아무도 없었어요. 내 편이 아무도 없었어요. YMCA 청소년 공간인 청개구리에 드나들다 발탁돼서 19살에 방송국 왔는데 아무도 날 보고 웃어주지 않았어요. 그래서 이걸 어떻게 해야 오래 할 수 있을까, 골똘히 생각해 보니 많은 사람이 듣고 아껴주면 살아남겠더라고.

그렇게 쥐뿔도 모르는 애가 지금까지 온 거예요. 라디오는… 사기를 못쳐요. 눈 가리고 아웅을 못해요. 금방 들통이 나요.”

양희은의 군더더기 없는 입말은 그의 창법처럼 천진하게 휘몰아치며 정곡을 찔렀다.

-무대공포증도 여전하십니까?

“여전해요. 그런데 달리 생각해보면 익숙한 게 좋은 건 아니에요. 남편은 옆에서 보고 40~50년이 지나도 처음인 것처럼 그렇게 긴장되고 떨리면 ‘때려치워라.’ 그래요. 때려치워야 하나, 고민했는데 두려움이 있다는 건 좋은 거예요. 저는 감기 기운 있을 때 더 노래를 잘해요. 목소리가 아주 맑을 때보다 컨디션이 좀 으슬으슬할 때 더 잘 나와요. 다른 사람은 모르지만, 난 놀듯이 하는 것 보다, 떨리는 게 더 나은 것 같아요.”

생각해 보니 윤여정 선생도 카메라 앞에서 매번 긴장한다고 했다. 긴장한다는 것은 항상 ‘신인의 자리’에 선다는 것. 다 아는 꼰대의 자리가 아니라 겸손한 신인의 자리로 돌아가 젊은이들과 함께 떨며 섞이는 것. 필사적으로 권위의 자리를 마다하는 것, 그것이 내가 만난 만년 현역들의 공통점이었다.

▲양희은은 2014년부터 ‘뜻밖의 만남’ 프로젝트로 성시경, 이상순, 악뮤, 김반장, 윤종신, 이적 등의 아티스트들과 협업하고 있다.

-함께 작업한 후배 아티스트 중 특별히 기억에 남는 사람이 있습니까?

“다 좋았어요. 김반장이라는 친구와는 ‘요즘 어때’라는 곡을 함께 했는데, 요즘 어떻게 지내나 마음이 쓰여요. ‘엄마가 딸에게’는 악뮤와 부른 버전이 TV에 나오면서 더 널리 알려졌어요. 젊은 아티스트와 섞일 수 있다는 건 영광이고 기쁨이에요.

사람의 귀는 묵은 소리를 좋아하고 사람의 눈은 새 것을 좋아한다지만, 저는 후배들한테 “날 좀 가르쳐줘라”고 해요. 그들 덕에 제가 가진 옛날 ‘쪼’를 떨칠 수 있었어요. 그들의 나누는 마음이 정말 귀해요.”

-선배 가수들 중엔 누구를 좋아했나요?

“스탠더드 팝을 기가 막히게 부른 윤복희 씨. ‘청실홍실’ ‘바닷가에서’ 불렀던 안다성 씨.”

-습윤한 채 찰랑찰랑 뻗어가는 목소리는 마음에 드세요?

“더 허스키하면 좋겠어요. 젊은 날보다는 중저음이 늘어난 게 마음에 들긴 합니다.”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가 담긴 ‘아침 이슬’ 데뷔 20주년 기념 앨범 ‘1991, 양희은’.

-코로나로 한창이던 시절에 한계령에 올라 ‘한계령’을 부를 땐 어땠습니까?

“과거에 한계령을 부를 땐 한계령이 뭔지도 모르고 불렀어요. 대관령, 진부령은 알아도 한계령은 몰랐어요. 노래를 내놨는데 ‘이건 PR할 필요도 없는 망한 노래’라고 레코드 사장이 단언해서 노래 없는 세상으로 도망가고 싶어서 결혼해서 미국으로 갔어요. 그래서 나는 한계령이 나를 시집보냈다고 해요(웃음).

지인들이 ‘한계령 좋더라’ 할 때마다, 나는 그게 여행지 얘긴 줄 알았어요. 그게 내 노래라는 건 나중에 알았어요. 나를 떠난 노래를 대중이 발견해서 나에게로 되돌려주는구나. 그 노래를, 엄혹한 코로나 시절에, 바람을 맞으며 골룸 머리가 돼서 불렀어요. 당시엔 아무런 생각도 안 났어요. 그저 무관객으로 한계령 앞에서 노래를 부르니 그 기운에 가슴이 뻥 뚫렸지요.”

‘저 산은 내게 잊으라 잊어버리라 하고 내 가슴을 쓸어내리네, 아 그러나 한 줄기 바람처럼 살다가고파. 이 산 저 산 눈물 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처럼, 저 산은 내게 내려가라 내려가라 하네. 지친 내 어깨를 떠미네… ‘-양희은의 ‘한계령’

-스스로가 자랑스럽다는 벅찬 느낌을 받을 때는 언제인가요?

“나는요, 자아도취 하지 않아요. 노래도 눈감고 부르지 않아요. 나 자신에게 후한 점수를 주지도 않습니다. 내 인생이 그렇게 자랑스럽지도 않아요. 재미있어서 살지도 않았어요. 휘리릭 시간이 흘러서 때가 되면 떠나겠지요. 거창한 계획도 없고 어떤 큰일이 닥쳐도 별로 놀라지 않아요. 누가 나를 놀래키면, 그냥 씩 웃어요.”

강심장은 아닌데, 사람 어려워할 줄은 모른다고 했다. 낮다고 얕잡아 본 적도 높은 사람 앞이라고 주눅 들어 본 적도 없노라고. 누군가에게 잘 보이고 싶을 때, 누군가가 나의 생살여탈권을 쥐고 있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위축된다.

타인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없어, 덤덤한 일흔 살 양희은을 앞에 두고 있자니, 왜 그가 부르는 노래 ‘상록수’가 늘 푸르고 서늘한지 알 것만 같았다.

‘저 들에 푸르른 솔잎을 보라, 돌보는 사람도 하나 없는데, 비바람 불고 눈보라 쳐도…’

-독립군 인생이로군요!

“독립군이지요. 소속사도 없고 선 계약금 받아 갚아야 할 돈도 없고. 난 고등학교 때도 그런 마음이었어요. 1평짜리 담배 가게를 해도 내 맘대로 하고 싶다고. 그런 인생은 비교할 수 없잖아요. 흘러가고 싶은 대로 흘러가고 싶어요.”

-노래도 글도 배꼽 밑에서 시작된다는 건 무슨 말일까요?

“우뚝한 그런 마음이라고 할까요. 사람은 ‘배알, 배짱’이라는 게 있어야 해요. 둥둥 떠 있는 욕심 말고, 뭔가 빡 진심으로 끌어당기는 힘 같은 거, 그런 건 배꼽 밑에 나와요.”

▲노래를 하지 않았던 시절에 가슴 속에 노래가 더 많았다는 양희은./사진=채승우

-각별히 사랑했던 이는 누구였지요?

“각별히 사랑한 건 동생들이었어요. 그 애들이 내 에너지원이었어요. 내가 희생해서 가세를 굴려 동생들이 공부하고 학교만 다니면 좋겠다… 그렇게 가슴이 저리고 졸였어요. 70년대 초에 아르바이트로 노래한다는 건 편안한 직장이 아니었어요. 술꾼들이 무대로 오니까… 동생들이 ‘내 편’이고, 같은 울타리에 사는 식구라는 힘으로 견뎌냈어요.”

-인생의 은인은 만나셨나요?

“제 젊은 날은 끔찍한 빚더미의 시간들이었어요. 아버지 돌아가시고 엄마가 빚보증을 잘못 선 데다 운영하던 양장점이 불에 타버리는 바람에, 20대 내내 단벌 청바지에 차비도 없이 걸어 다녔어요. 이자가 눈덩이처럼 불었는데 쥐어짜도 돈 나올 구멍이 없었어요. 파산선고라는 것도 할 줄을 몰랐으니까. 그때는 하늘에 삿대질을 했어요. 아버지 몫을 내가 하고 있는데, 아이들을 이렇게 개고생시키면 어떡하느냐고.

신이 있다면 무슨 일이라도 일어나야 하는 거 아니냐고요. 그렇게 빚의 구렁텅이에서 헤매고 있으니, 내 얼굴이 얼마나 우울했겠어요. 그런데 그때 클럽에 노래 들으러 오던 분 중에 1950년대 한국에 오신 외국 선교사분들이 사연을 묻고 선뜻 도와주셨어요. 그 뒤로 킹레코드사와 계약해서 빚을 다 갚았습니다.”

인생 고비마다 생각지도 못한 도움이 툭툭 나타나더라고 배짱 두둑한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기적은 그렇게 툭툭 오는 건가요?

“네. 툭툭 오죠, 기적은. 막다른 곳에서 툭툭 쳐주듯이.”

-보고 싶은 사람은 누굽니까?

“아버지. 엄마는 자기중심적인 사람이에요. 뭐든지 당연하고 당당하고 좋은 건 당신이 먼저 하세요(웃음).”

-누가 선생 인생에서 엄마가 되어 주었나요?

“선배 언니들이죠. 언니들이 나를 붙여주고, 이래라저래라 잔소리하지 않고, 그냥 툭툭 쳐줬어요. 시스터후드라고 하지요? 나이 들면서 그런 게 더 좋아요.”

▲떠도는 바람 같기도 하고 겨울 아침 들이키는 동치미 국물 같기도 한 양희은의 개운한 에세이 ‘그럴 수 있어’.

-30대 난소암 투병 전후 인생관이 달라졌나요?

“저는 언제 밥 한번 먹자는 말을, 정말 싫어해요. 그럴 땐 ‘언제? 어디서? 우리가 돈이 없지, 시간이 없니?’ 이러면서 막 추궁해요(웃음). 어려울 게 뭐 있어요. 마음이 있으면 그 자리에서 툭툭 하면 돼죠.

암에 걸려 기운 없이 누워 지내면 다 보여요. 겉으로는 “어떠니?” 해도 속으로는 ‘지금 내가 네가 아닌 게 정말 다행이다’하는 눈빛이 다 읽혔어요. 진심으로 위해주는 사이는 쉽지 않아요. 슬플 때 같이 슬퍼하는 것만큼 기쁠 때 같이 기뻐하는 것도 쉽지 않아요.

그래서 오지랖 넓었던 관계가 많이 정리가 됐어요. 인생 사는 데 사람 많이 필요 없어요.”

-언제 행복하세요?

“일상을 충실히 살아내면… 행복은 멀리 있지 않더라고요. 요즘엔 집근처 단골 목욕탕에서 목욕할 때, 불투명 창으로 빛이 스며들면 그게 얼마나 행복하고 개운한지 몰라요. 변함없이 살아내는 하루하루가 다 노래가 되더라고요. 예쁜 종지 하나가 깨졌다, 된장찌개가 보글보글 맛있게 끓었다… 그런 게 다 하루하루의 노래였어요.”

배꼽 밑에 꾹꾹 쟁여둔 일상 밑천이 결국 노래로 돌아온다고 했다. 노래를 안 할 때 노래를 잘 살고 있는 거라고.

-저는 젊은 날 아껴 듣던 양희은의 촉촉한 목소리가 ‘여성시대’ 라디오에서 집밥처럼 슴슴하게 흘러나올 때 살짝 낭패감이 들기도 했어요(웃음). 노래를 부르는 것과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것, 양희은에겐 어떤 쪽이 더 끌립니까?

“저는 1971년 가을부터 라디오를 했어요. ‘아침이슬’ 노래도 1971년 9월 1일에 나왔어요. 거의 동시에 나온 거예요. 이름을 부르는 거, 그거 제가 살던 어린 시절엔 아주 자연스러운 거였어요. 기독교 문화가 들어간 이북 사람들이 특히 더 그랬어요. 제 아버지도 평안도 분인데 친척분들 이웃분들 모이면 꼭 이름 석 자를 따박따박 불러줬어요.

‘너 이름이 뭐니?’는 유행어는 이성미에서 시작이 됐어요. 방송국 소파에서 먹고 자며 아침 방송 리포터 한다는 애가 있다는데, 왠지 짠했어요. 어느 날 야구모자 쓰고 지나가는 그 쪼끄만 애를 불렀어요.

‘너 이름이 뭐니? 우리 집에 와. 밥 차려 줄게.’ 이성미가 나중에 그래요. 자기한테 처음 밥상 차려준 사람이 나라고.”

▲1993년 가을. 미국에서 7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양희은을 받아준 것도 라디오였다. 24년 째 거대한 어깨동무를 만들어온 MBC 라디오 ‘여성시대’의 양희은.

이름을 부르면 함부로 할 수 없다. 호명은 관계의 시작이다. 양희은은 만 24년 4개월 진행한 ‘여성시대’를 그렇게 이름 불린 자들의 거대한 어깨동무라고 했다.

“처음엔 돈 때문에 병 때문에 폭력 때문에 무너져 내리는 아픈 사람들의 이름을 불러주고 이야기를 전하는 게 그들의 삶에 무슨 효용이 있을까, 그 무용함에 우울했어요. 그런데 아니었어요. 누군가는 컴퓨터를 배워 글을 쓰고 누군가는 읽고 누군가 듣는 동안 ‘아, 나 같은 사람이 또 있었구나!’ 그 마음으로 힘을 얻어 하나둘 어두운 동굴을 박차고 나왔어요.”

-아름다운 웨이브네요.

“맞아요. 세상 크기만 한 어깨동무가 생기는 거예요. 그런다고 돈벼락이 떨어지거나 병이 낫는다거나, 남편이 착해진다거나, 경천동지할 일이 일어나진 않아요. 그냥 어깨동무의 동심원이 계속 커지는 거예요.”

-사람을 살리는 건 대체 뭘까요?

“걱정도 나누고 좋은 것도 나누고 먹을 것도 나누고. 내 속사정을 털어놓으면 듣는 사람도 자기 객관화가 돼요. 그래서 하지 못하던 결단도 내리죠. 자기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은 매우 용감한 사람입니다.”

-그래도 억울하고 슬플 땐 어떻게 합니까?

“인디언, 에스키모인들은 화가 나면 화가 풀릴 때까지 산허리를, 얼음 평원을 걷고 또 걷는데요. 한참을 걷고 나서 분이 가라앉으면 그때 멈춰서서 걸어온 길을 되돌아온다고 해요. 그렇게 돌아오는 길은 떠날 때의 길하고는 달라요. 억울할 때 슬플 때 복잡할 때 햇빛 받고 걸으세요. 걷다 보면 정리되고 걷다보면 나아집니다.”

그 자신, 가장 큰 걱정은 백 살 가까운 노모와 열일곱 살 넘은 노견이라고 했다. 잘 못 걷고 잘 못 듣고 잘 못 보는 그들을 돌보며 ‘저것이 나의 길이다’ ‘저것이 나의 앞날이다’를 되새기는 삶. 그럼에도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 도시락 싸고, 방송국에 나와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고, 시장 보고 된장찌개를 끓여내는 양희은의 쳇바퀴 삶이 그의 배꼽 아래 쌓여 세상을 보살피는 은은한 노래로 나오는 걸 우리는 목격한다.

▲온갖 사람 드나드는 방송국에서 반평생을 보내면서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을 보는 촉이 발달했다. 말만 앞세우는 게 싫어, 책을 읽어도 ‘파브르 곤충기’나 ‘식물도감’을 읽는다는 양희은./사진=채승우

-50년 넘게 노래해 보니 힘주기와 힘 빼기 중에 무엇이 더 어렵던가요?

“시작을 잘하면 끝까지 잘 풀려요. 노래는 첫 소절, 시작이 반이에요. 처음에 힘 조절 못 하면 끝까지 헤매지요. ‘상록수’라는 노래는 높은음으로 지르는 노래라 힘 빼고 시작하기가 정말 힘들어요. 힘을 내듯 또 살짝 빼면서… 결국 노래도 삶도 평생 힘 빼는 연습이 아닌가 싶어요. 그래서 제일 좋은 노래는 콧노래예요. 아무도 듣지 않고 나 혼자 부르는 노래… 그게 제일 살아있는 노래 같습니다.”

다시 태어나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쉬다 가는 마을 어귀의 느티나무로 태어나고 싶다고 했다. 바람에 힘 빼고 나부끼는 잎새처럼, 바람에도 뱃심으로 지탱하는 나무처럼, 그렇게 주의산만한 채로 명랑하게 뚱딴지같이 늙어가겠다는 양희은. 나무가 되어가는 그를 보며, 그의 노래로, 가을을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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