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티 나게 그러나 조용하게…‘올드머니룩’이 뜬다
절제된 색상, 고급스러운 소재, 세련된 스타일. 최근 패션계 셀럽들이 추구하는 이미지를 활자로 옮기면 이 단어로 귀결된다. Z세대의 트렌드로 떠오른 ‘찐’ 부자들의 패션, ‘올드머니룩’이다.
아무나 가질 수 없는 옷장
‘올드머니’의 사전적 정의는 유산이나 상속으로 물려받은 재산이다. 여기서 파생된 ‘올드머니룩’은 세대를 거듭하며 부를 축적하고 명성을 쌓아온 상류층의 의상 또는 이를 통해 영감을 얻은 패션을 뜻한다.
로고를 전면에 내세운 일명 ‘에루샤’(에르메스·루이비통·샤넬)와 달리 올드머니룩은 부를 과시하지 않는다. 무채색에 가까운 모노톤으로 단조로움을 강조하고 기본에 충실한 디자인으로 고전적인 우아함을 추구한다. 소재와 모양 등 디테일에 힘을 싣는 대신 화려한 패턴이나 디자인을 지양한다. ‘로로피아나’ ‘브루넬로 쿠치넬리’ 등이 대표적으로 언급되는 브랜드다.
일각에서는 일명 ‘아이비룩’으로 불리는 명문 사립학교의 교복 패션이 올드머니룩의 대중화를 유도했다고 본다. 엄격했던 복장 규제에서 비롯된 자유로운 의상을 향한 갈망이 ‘브룩스 브러더스’ ‘폴로 랄프 로렌’ 등과 같은 올드머니룩의 시초가 된 브랜드를 탄생시켰다는 것이다. 승마, 요트 등 호화로운 레저생활에 필요한 고급 ‘스포츠 웨어’ 역시 올드머니룩의 한 장르로 분류된다.
흥미롭게도 국내 패션 시장에 스며든 올드머니룩은 ‘원조’의 것과는 미묘한 차이를 둔다. 절제와 고급스러움을 내세우는 올드머니룩의 가치를 ‘추앙’하지만, 미학적인 관점에서 접근하는 분위기가 더 지배적이다. 고가의 제품을 구매하는 것보다 그 뜻을 품은 신진 디자이너의 제품을 찾는 식이다.
패션 플랫폼 ‘W컨셉’에 따르면 지난 7월 한 달간 올드머니룩 관련 제품 매출이 전년 동기간 대비 25% 증가했다. 특히 올드머니룩 스타일링에 제격인 맥시 원피스와 롱·미디 스커트 매출 신장률이 각각 50%, 45%로 눈에 띄는 수치를 기록했다. 업체 측은 “특유의 깔끔하고 수수한 고급스러운 스타일을 부담스럽지 않은 가격에 표현할 수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김혜연 패션 인플루언서 역시 “올드머니룩의 핵심은 좋은 소재”라며 “ ‘부티’ 나는 스타일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다채롭게 활용할 수 있는 고급 원단을 고르는 안목을 키워야 한다”고 조언했다.
시대를 넘나드는 고전의 멋
올드머니룩의 정석을 보여준 대표적인 인물은 고 다이애나 영국 왕세자비다. 광택이 도는 실크 원피스부터 모노톤 슈트까지 그는 ‘시간·장소·상황(TPO)’을 맞춘 격식 있는 패션으로 왕실의 품위를 지켰다. 캐주얼한 의상을 입을 때도 교양, 규율 등을 점잖게 드러낼 수 있는 패턴과 색상을 활용, 자신만의 스타일을 추구했다.
주가만큼이나 높은 관심을 받는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의 패션 역시 올드머니룩의 좋은 예다. 은은하면서도 세련된 코디를 선호하는 그는 유행을 타지 않는 ‘타임리스’ 의상으로 지적이면서 도회적인 이미지를 강조한다. 기성 브랜드의 옷을 입을 때도 고상한 느낌을 주는 액세서리 등을 포인트로 차별점을 두는 편이다.
주어를 ‘젊은 세대’로 치환하면 유명 팝 가수 라이오넬 리치의 막내딸이자 모델 겸 디자이너인 소피아 리치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Z세대의 패션 아이콘’답게 자신의 소셜미디어를 통해 ‘OOTD(Outfit of The Day)’를 소개한다. 화이트, 베이지, 블랙 등 단순한 빛깔의 원피스와 팬츠로 포장됐지만 ‘꾸민 듯 꾸미지 않은 듯한’ 코디에 감춰진 고가의 스타일링은 ‘부’의 희소성을 노련하게 표현하는 도구다. 유니버설 뮤직 창업자의 아들 엘리엇 그레인지와 결혼하면서 더욱 강렬해진 ‘금수저급’ 배경도 그녀의 스타일을 돋보이게 한다.
가상현실에서도 올드머니룩의 향연은 이어진다. ‘펠리(@feli.airt)’는 29만7000의 팔로어를 보유한 인플루언서로, ‘올드머니룩’에 최적화된 버추얼 모델이다. 지중해 바다 위에서 뜨거운 햇살을 맞으며 요트 세일링을 즐기고, 자기 관리를 위해 틈틈이 승마를 즐기는 모습은 마치 실존하는 영국 명문가의 막내딸 같은 ‘포스’를 풍긴다. 바람에 휘날리는 풍성한 헤어스타일과 가볍게 더해진 메이크업, 여성스러움과 중성적인 매력을 오가는 오묘한 표정이 ‘킬링포인트’다.
보이지 않는 것으로 옮겨간 무게
올드머니룩의 파급력을 가장 빠르게 체감하는 곳은 ‘패션 리더’들의 피드다. 크롭 톱과 데님 팬츠 등을 즐겨 입던 켄들 제너와 과감한 노출을 서슴지 않았던 카일리 제너가 고전적 실루엣의 드레스와 슈트로 스타일링에 변화를 준 사건은 한동안 패션업계를 떠들썩하게 한 뉴스였다.
올드머니룩을 모방하기 위한 움직임도 활발하다. 현재 인스타그램에 올라온 올드머니 관련 해시태그는 약 100만건에 달한다. 틱톡과 유튜브 등 플랫폼을 확장하면 그 영향력은 폭발적으로 커진다. ‘보그’ ‘얼루어’ 등 국내외 패션 잡지도 꾸준히 ‘올드머니 패션’에 관한 기사에 지면을 할애하는 중이다.
업계가 실감하는 인기는 수치로 증명된다. 패션 플랫폼 ‘29CM’는 지난 7월 한 달간 검색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올드머니룩의 주요 소재인 ‘리넨’ ‘시어서커’ ‘실크’ ‘캐시미어’ ‘트위드’ 등으로 유입된 검색량이 전년 같은 기간보다 20% 증가했다고 밝혔다.
‘보이는 것’이 중요한 시대, ‘보이지 않는 부’를 추종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패션 디자이너 정여희씨는 “올드머니룩은 혜성처럼 등장한 패션 코드가 아니다. 꾸준히 존재했고 두껍게 마니아층을 형성해온 장르”라며 “잠재돼 있던 부에 대한 동경이 이를 여과 없이 드러내는 시대를 만나 유행으로 재정립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조병익 한국은행 금융전문가는 자신의 저서 <돈이란 무엇인가>에서 “부자는 자신을 풍요롭게 하는 것을 사고 가난한 사람은 기분을 풍요롭게 하는 것을 산다”고 기록했다. 1980년대 미국 특권층 대학생들을 조롱하기 위해 쓰인 책 <디 오피셜 프레피 핸드북>이 현대에 와서 ‘프레피 스타일’의 교과서로 통용되고 있다는 점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다.
미디어는 이런 흐름의 기폭제가 됐다. 미국 HBO에서 방영한 블랙코미디 드라마 <석세션>은 루퍼트 머독 가문의 경영권 다툼을 연상시키는 듯한 미디어 재벌가의 암투를 그린 작품이다. 이 드라마가 인기를 누리며 대중들은 부유층의 경험을 대리만족했고, 그들이 입고 나오는 옷, 액세서리를 검색하는 시간을 통해 잠시나마 그 세계의 일원이 된 듯 유쾌한 착각에 빠지며 유행의 틀을 만들었다.
배우 귀네스 팰트로의 ‘법정 패션’도 ‘올드머니룩’의 점화에 일조했다. 2016년 스키장에서의 충돌 사고로 현재까지 법정 공방을 치르고 있는 그는 법원에 출석할 때 선보이는 단정한 패션으로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영국 매체 가디언은 그녀가 착용한 의상을 두고 “ ‘억만장자들을 위한 유니클로’라는 별명을 얻은 로로피아나의 터틀넥”이라며 “팰트로는 이런 브랜드의 의상을 통해 자신이 부유해서 소송에 대해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을 필요가 없고, 동시에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고 풀이했다.
가질 수 없다면 차라리 ‘넘사벽’이어라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달라진 소비 패턴이 올드머니룩의 가치를 높였다는 의견도 있다. 패션업계 MD인 이주현씨는 “쉽게 구매하고 쉽게 버려지는 이른바 ‘패스트 패션’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Z세대의 가치 소비와 맞물리면서 지속 가능한 패션에 대한 고민이 커지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즉 한 벌을 사더라도 제대로 된 것, 오래 입을 수 있는 옷을 사려는 이들이 늘어나는 추세라는 것이다.
민해석 스타일리스트는 “팬데믹 동안 억눌렸던 패션 본능을 분출하듯 한동안 다채로운 스타일이 쏟아졌다. 그중에서도 ‘Y2K’와 같은 화려한 패턴, 거대한 로고 등이 압도적 인기를 누렸다”면서 “통상적으로 기존의 유행에 대항하며 떠오르는 트렌드는 정반대 성격을 지닌다. 올드머니룩이나 브랜드의 로고나 부유함을 드러내지 않고 고품질의 스타일을 고수하는 트렌드인 ‘콰이어트 럭셔리’가 그렇다. 유난스럽지 않아도 빛이 나고 떠들썩하지 않아도 확장의 폭이 크다. 부드러운 카리스마 같은 패션”이라고 설명했다.
장기간의 경기 불황 속에서 정보기술(IT)로 막대한 부를 이룬 신흥 부자, 주식 및 코인 등의 투자와 창업으로 벼락부자가 된 일명 ‘뉴머니’를 마주하게 된 젊은 세대가 과시적인 스타일을 내세운 이들의 소비 패턴에 대한 반감으로 ‘찐’ 부자들에 대한 선망의 마음을 갖게 됐고 그 과정에서 올드머니룩에 관심을 쏟는다는 분석도 흥미롭다.
서용구 숙명여대 경영학과 교수는 “유교 문화 등의 영향으로 돈을 밝히지 않는 것이 미덕처럼 여겨지지만, 우리 민족의 기저에는 물질주의에 대한 동경 또한 공존한다”며 “부의 양극화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노력해도 얻을 수 없는 것이 있다는 좌절감을 맛본 Z세대들에게 신흥 재벌의 존재는 달갑지 않을 것이다. 상대적으로 원조 상류층의 위력을 실감하면서 올드머니에 대한 동경이 더 커지는 것 같다”고 해석했다.
김지윤 기자 jun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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