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와 사색] 기억을 버리는 법

2023. 8. 19. 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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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버리는 법
김혜수

버리자니 좀 그런 것들을
상자 속에 넣어 높은 곳에 올려놓는다
가끔 시선이 상자에 닿는다
쳐다보고만 있자니 좀 그런 것들을
더 큰 상자에 넣어 창고 속에 밀어버린다
창고 속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모서리가 삭아내리는 것들
자주 소멸을 꿈꾸며
닳아 내부조차 지워져버린 것들
가끔 생각이 창고에 닿는다
고요한 어둠 속에서 점차
생각조차 희박해지고
창고를 넣을 더 큰 상자가 없을 때
그때 상자 속의 것들은 버려진다

나도, 자주, 그렇게 잊혀갔으리라
『이상한 야유회』 (창비 2010)

제 방의 책장 상단에는 몇 개의 상자가 있습니다. 이사를 오며 올려두고 아직 열어본 적이 없습니다. 이 상자 속에는 과거 소중하게 여기던 물건이 담겨 있습니다. 물론 지금은 소용과 쓸모를 다한 것이고요. 아울러 이 상자 속에는 아픈 기억이 담긴 물건도 들어 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어느 정도 견딜 만해진 것들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현재의 고민도 이런 방식으로 지워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답을 구해 단번에 해결하는 편이 가장 좋지만 이게 어렵다면 한쪽 구석으로 치워두고 나의 고민이 바래고 삭을 수 있는 시간을 주는 것입니다. 고이는 것은 고이는 대로 흐르는 것은 또 흐르는 대로.

박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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