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응호·서왈보·안창남, 조선 개화·부강의 꿈을 싣고 날다
━
[근대 문화의 기록장 ‘종로 모던’] 식민지 청년 꿈을 깨운 비행기
근대 초기 사람들에게 가장 큰 충격과 매혹을 선사한 첨단 문물은 무엇이었을까? 그건 아마 비행기였을 터이다. 거친 엔진음을 내며 철제 프로펠러를 무섭도록 팽팽 돌려 창공을 가르는 비행기는 과연 ‘모던’이 무엇인지를 단박에 이해하게 하는 대상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최초의 비행사는 누구였을까? 우리나라 사람 열에 아홉은 안창남을 최초의 조선인 비행사로 알고 있다. 1922년 12월 10일 안창남은 ‘금강호’를 타고 조선인 최초로 경성 하늘을 비행했다. “떴다 보아라 안창남의 비행기, 내려다 보아라 엄복동의 자전거”가 당시 유행가의 노랫말로 쓰일 정도였다. 당시에도 대중에게 최초의 비행사는 안창남으로 많이 알려졌던 모양이다.
그런데 안창남보다 더 일찍 비행사가 됐던 조선인이 있었다. 이응호와 서왈보다. 제 1차 세계대전 말미였던 1918년 미국 공군에 조종사로 임관한 이응호와 1919년 중국 남원비행학교를 졸업하고 비행사가 된 서왈보의 기록이 남아 있다. 1921년 일본에서 파일럿 시험을 통과해 자격을 얻은 안창남보다 2~3년 더 빠른 기록이다. 이후 이응호는 미국에서, 서왈보는 중국에서 계속 비행 이력을 쌓았다. 이들은 그렇게 비행기에 조선의 개화와 부강, 그리고 독립의 꿈을 실었다.
경성 공개비행 시연 보고 미래 결정
1887년 평양 태생의 서왈보는 대성학교를 나왔다. 안창호가 설립한 이 학교는 조선의 독립을 위해 헌신할 일꾼을 길러내는 터전이었다. 그는 대성학교 졸업 후 1910년 안창호와 시베리아로 건너가 독립 운동가를 양성하는 학교를 설립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서왈보는 신문을 통해 경성에서 공개비행 시연이 있을 것이란 소식을 접한다. 이전에도 신문이나 잡지에서 서양의 비행기가 종종 소개되긴 했지만, 우리나라에서 대중에게 공개된 최초의 비행(‘조선반도에서 최초의 공개비행 개최키로’, 『경성일보』, 1913년 8월 26일)은 1913년에 이뤄졌다. ‘공개비행대회’가 열리기로 한 용산으로 향한 서왈보는 그곳에서 난생 처음 비행기를 보고 자신의 미래를 결정짓는다.
그는 1919년 중국에서 육군항공학교를 수료한 뒤 조종사 자격으로 의열단에 가입했고, 1924년에는 중국 정부군 풍옥상(馮玉祥) 사령관 휘하의 항공대 대대장을 역임했으며, 베이징 항공학교의 교수로도 활동했다. 이어 1926년 5월 허베이(河北) 상공에서 새로 수입한 이탈리아 제조 비행기 10대를 일일이 시승하면서 점검하다가 기체 이상으로 추락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1977년 대한민국 정부는 그에게 건국포장,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이후 천신만고 끝에 아카바네(赤羽) 비행제작소에 들어가 비행기 조립과 정비 기술을 익혔으며, 오구리(小栗) 비행학교에 진학해 6개월간 ‘비행기술수업’을 이수했다. 1920년 11월에 비행학교를 졸업한 뒤, 이듬해인 1921년 5월에 치러진 일본 최초의 비행자격 시험에 당당히 합격해 정식으로 비행사가 됐다. 17명 응시에 2명 합격이었고, 안창남은 수석을 차지했다. 이후 1922년에는 도쿄~오사카 간 우편대회 비행에 참가해 최우수상을 타기도 했다. 조선인에 대한 온갖 차별을 이겨내고 거둔 값진 성취였다.
이로써 우리 동포들 사이에서 안창남은 이미 스타가 돼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일본에서 자신이 소유한 비행기를 가지고 직접 고국을 방문한다니 대중의 흥분과 열기는 대단할 수밖에 없었다. 안창남은 1922년 12월 5일 ‘금강호’라 이름붙인 1인승 영국제 뉴포트(Nieuport) 단발 복엽기를 해체해 배를 이용해 일본에서 조선으로 들여온다. 이어 금강호를 손수 다시 조립해 공개비행을 준비했다.
삼천리 방방곡곡에 안창남 열풍이 일었다. 특히 경성의 종로는 안창남으로 인해 거리가 들썩일 정도였다. 종로에 사옥을 둔 공개비행 주최사인 동아일보가 연일 안창남 관련 소식을 대서특필했다. ‘안창남비행후원회’가 종로 중앙청년회관에서 조직됐다. 동아일보 종로 사옥과 종로 경운동에 있던 천도교 수운회관에서는 안창남 환영 및 후원행사가 열렸다. 종로 곳곳에서 열린 강연회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거리를 오가던 수많은 인력거꾼을 비롯해 전차 운전수와 택시 운전사들 모두의 최종적인 꿈은 비행사가 되는 것이었고, 안창남은 그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일본인 비행사들을 실력으로 압도한 안창남을 통해 조선인들은 식민지인의 울분을 해소하고 조국 독립의 희망을 엿보았다.
조선인 가장 많은 종로의 하늘 날아
안창남이 탄 금강호 날개에는 조선반도 전체 지도와 금강산을 새겨 넣었다. 조선인으로서의 자긍심을 드러낸 표식이었다. 안창남은 종로 상공을 순회하며 “경성의 하늘! 경성의 하늘! 내가 어떻게 몹시 그리워했는지 모를 경성의 하늘!”(‘공중에서 본 경성과 인천’, 『개벽』, 1923년 1월호)이라고 격한 감정을 드러냈다. 물론 그 순간 종로 거리를 오가던 수많은 조선인들은 안창남의 금강호가 종로의 하늘을 활공하는 모습을 경탄하며 올려다 보았다.
종로가 안창남의 고국방문 기념비행의 반환점으로 선택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비행기는 당시 경성에서 유일하게 활주로를 갖추고 있던 여의도 일본육군비행장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었지만, 가장 많은 조선인들이 모여 살고 있는 종로의 하늘을 반드시 경유해야만 했다. 왜냐하면 안창남의 비행은 조선인들에게 독립에 대한 기대와 자유와 해방을 향한 희망을 선사하는 가장 중요한 ‘민족주의 의례’이자 역대 최고의 관심과 흥행을 기록한 ‘모던 퍼포먼스’였기 때문이다. 종로의 하늘이야말로 일제에게 절대로 내줄 수 없는 조선인들의 마지막 자존심이었으며, 새롭게 쏘아 올릴 해방 조선의 근거지였던 셈이다.
시범비행을 통해 조선인들에게 환대와 애정을 받은 안창남은 이후 독립운동에 투신해 후배 비행사들을 양성하는 데 매진한다. 안창남은 비행사로서 자신의 노력과 경험이 조선 독립의 자원으로 이용되길 끊임없이 바랐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1930년 비행훈련 도중 엔진 결함으로 인해 추락사한다. 조선 최초의 비행사다운 죽음이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독립운동 공로를 인정해 200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한다.
종로구청·종로문화재단·중앙SUNDAY 공동기획
강부원 근대문화연구자, 작가
Copyright © 중앙SUNDAY.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