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포도주 한 잔만 마셨으면" 수도사의 와인 예찬 '백미'
와글와글, 와인과 글
라인가우 와인의 중심지이며 레스토랑과 선물 가게가 줄지어 있는 좁은 골목 드로셀가세(Drosselgasse)의 어느 작은 와인 바에 들어가 간단한 요기를 하고 있을 때였다. 카페 주인이 와인 한 잔을 무료로 건네면서 ‘깐뻬이’(乾杯)를 외쳤다. 나를 중국인으로 생각한 것이다. 전후 사정을 알게 된 그는 미안하다고 하더니 통성명과 함께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클라우스 아우어라는 이름의 카페 주인은 와인을 좋아하는 사람답게 솔직하고 쾌활했다. 와인 마니아 괴테의 발자취를 따라 여행하고 있다는 얘기에 반가운 표정을 짓더니 와인 한 병을 가져왔다. “괴테를 알고, 와인을 안다는 것은 곧 인생을 안다는 뜻입니다. 비싼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만남을 기념하고자 이 와인을 선물로 드리고 싶습니다!”
독일 라인 강변엔 40㎞ 넓은 포도밭
“우린 책을 위해서 살죠. 무질서와 부패로 가득한 이 세상에선 편안한 임무랍니다.” 소설 속에서 움베르토 에코가 수도사 벤노의 입을 통해 농축된 지식을 탐식하는 자의 기쁨을 말하고 있는 장면이다. 수도원장이 미소를 지으며 도서관은 ‘정신적 미로임과 동시에 지상의 미로’라는 말을 하고 있었는데, 이는 지적 탐구 세계의 비유였다.
중세 시대 수도원의 포도원 경작과 포도주에 관한 지식 없이는 쓸 수 없는 작품이었다. 작게는 와인과 글을 결합한 ‘와글와글’ 시리즈의 아이디어를 얻었을 뿐만 아니라, 크게는 유럽 인문학의 깊은 맛에 빠져 스스로 ‘글로생활자’의 길을 감행할 수 있도록 용기를 준 작품이 바로 소설 『장미의 이름』이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또 다른 10년을 준비하기 위해 지난 여름 나는 유럽으로 향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스페인 바스크 지방으로 떠나기에 앞서 에베르바흐 수도원을 다시 방문하기로 했다. 소설 원작에서 사건이 발생한 장소는 이탈리아 북부 베네딕트 수도원이지만 영화가 촬영되었던 곳은 독일의 수도원이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자동차를 타고 서쪽으로 약 한 시간 정도 달리면 고성들이 보이는 한편으로 라인강 우측의 경사진 곳을 따라 포도밭 풍경을 발견하게 된다.
와인, 시간의 무게 이겨야 진가 발휘
10년 만에 에베르바흐 수도원에 다시 도착했다. 1135년 창건된 수도원답게 금방이라도 프란시스코회 수사 윌리엄(배우 숀 코너리)이 제자 아조와 함께 튀어나올 것 같은 중세풍의 분위기다. 수도원 옆 슈타인베르크 포도밭과 옛 포도주 양조장 장비들, 1126년의 와인 경작 및 거래 문서,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와인 거래 장부 등이 남아있다.
소설에 상세하게 묘사된 것처럼 포도원 경작으로 자립경제를 유지해야 했던 중세의 수도원 시스템을 어렴풋이나마 이해하게 된다. 잦은 전쟁과 전염병으로 포도밭이 황폐하게 되어도 성찬식에 필요한 와인을 자급자족 조달해야 했기에 결과적으로 중세의 와인 산업에 수도원이 기여한 공은 매우 컸다. 포도밭 입구 고랑 맨 앞줄에 붉은 장미꽃이 지키고 있는 게 보였다. 포도밭에 왜 장미인가? 장미는 포도나무와 비슷한 습성을 가지고 있어, 포도나무가 영양부족이나 병충해로 이상이 생기기 전에 장미가 먼저 유사한 증세를 보이기에 병충해를 알려주는 전령 역할을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소설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라틴어 문장을 떠올리게 만드는 바로 그 장미였다. “장미의 이름으로 태초의 장미가 존재하나 우리는 빈껍데기 이름만 취한다.”
중세 시대 ‘보편 논쟁’의 한축을 이루던 유명론(唯名論)과의 연관성을 말하기도 하지만 작가의 진짜 의도는 아무도 모른다. 작품의 묘미이기도 하다.
수도원의 명물인 야외식당에 자리 잡고 빵과 한 잔의 와인을 주문했다. 와인은 발효와 숙성의 산물이다. 포도즙이 포도주가 되기 위해서는 발효되고 숙성되는 시간이 필요하다. 시간의 무게를 이겨내야 진가를 발휘한다는 뜻이다. 인문학, 친구와 더불어 와인을 좋아하는 이유다. 하지만 질문은 남는다. “How old is too old?”(얼마나 숙성되어야 충분히 숙성된 것일까?) 와인의 질문은 곧 인생의 질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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