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세기 인류의 최종병기인 핵무기는 1942년 미국의 맨해튼 프로젝트에 의해 탄생했다. 그 막후에는 나치독일이 먼저 개발하지 못하도록 사활을 건 치열한 정보전이 있었다. 1930년대 말 독일 과학자들의 논문 2편이 정보전의 서막을 열었다. 1938년 12월 22일 독일 화학자 오토 한과 프리츠 스트라스만이 ‘자연과학’지에 우라늄 원자의 핵분열 과정에서 엄청난 에너지가 발생한다는 연구 결과를 실었다. 곧이어 1939년 1월 16일에는 이들과 같이 연구해 온 물리학자 리제 마이트너와 오토 프리슈가 우라늄의 핵분열에 관한 논문을 ‘네이처’지에 발표했다. 이 연구들은 과학적 쾌거로 평가되면서 학계를 흥분시켰다. 1939년 한 해 동안 핵분열 연구가 전 세계에서 100편 이상 발표될 정도로 학계의 폭발적 관심을 끌었다. 그러나 이 와중에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통찰력이 뛰어난 사람들은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우라늄의 원자 핵분열이 가공할만한 폭발력을 일으킨다는 사실이 규명된 만큼, 이 연구를 토대로 나치독일이 핵무기를 먼저 개발한다면 나치가 단숨에 세계를 지배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순수 과학연구가 세계사의 흐름을 바꿔 놓을 핵무기 개발이라는 판도라 상자를 연 것이다. 연합국은 이를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었다.
유대계 독 과학자들, 미 프로젝트 참여
당시 나치독일의 산업시설은 세계 최고수준이었고 원폭 개발에 필요한 기술과 능력도 최고였다. 나치는 1939년 9월 15일 비밀회의를 열어 우라늄 원폭 개발을 전담할 ‘우라늄 클럽’을 조직하기로 결정했다. 미국의 맨해튼프로젝트보다 3년이나 앞선 시점이었다. 나치의 핵무기 개발이 한발 앞서가자 연합국의 초조함은 깊어져갔다. 더욱이 이즈음 나치는 핵무기 개발의 중요한 일보를 내디뎠다. 1940년 5월 노르웨이를 점령함으로써 우라늄 핵분열 유도에 필수적인 중수(重水)를 대량으로 확보했기 때문이다. 중수는 핵분열 연쇄반응을 일으키는 과정에서 필요한 감속재로 사용된다. 그런데 당시 노르웨이의 베모르크 발전소가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중수를 대량 생산하고 있었다. 비료 생산용 암모니아를 만들기 위해 물을 전기분해하는 과정에서 부산물로 중수가 대량 생산된 것이다.
연합국은 자신들의 핵무기 개발 못지않게 나치의 원폭 개발을 저지하는 것이 시급했다. 윈스터 처칠 영국 총리는 취임 직후 곧바로 자신의 전쟁 전위조직인 비밀 특수작전단(SOE)을 통해 나치 독일이 베모르크에서 중수를 생산하지 못하게 하거나, 생산하더라도 절대 독일로 운반하지 못하도록 차단하라고 지시했다. SOE는 즉각 움직였다. 1942년 10월 19일 4명의 선발 정찰팀이 베모르크 발전소 고산지대에 먼저 침투했다(그로스작전). 한 달 후인 1942년 11월 19일에는 프레쉬맨 작전으로 명명된 본대 공격팀도 영국을 출발했다. 과학자·군인·정보요원으로 구성된 34명의 프레쉬맨팀은 폭격기 2대에 무동력 글라이더 비행기 2대를 매달아 침투하는 고난도의 침투방법을 선택했다, 노르웨이를 점령한 나치의 경계를 피하기 위해 소리없이 무음(無音)으로 침투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프레쉬맨팀은 전멸했다. 추운 날씨와 구름 때문에 낙하지점을 찾지 못해 선회하다 폭격기와 글라이더를 잇고 있던 100미터 길이의 밧줄이 끊어져 글라이더가 그대로 추락한 것이다. 대원들은 대부분 즉사했다. 생존한 대원들도 독일군에게 총살당했다. 그러나 참담한 실패에도 불구하고 SOE는 1943년 2월 17일 6명으로 구성된 거너사이드 작전팀을 또 다시 침투시켰다. 온갖 어려움 끝에 무사히 침투한 거너사이드팀은 4개월 전 도착한 그로스팀과 합류하여 본 작전에 돌입했다. 삼엄한 나치군의 경계를 피하기 위해 환풍구를 통해 베모르크발전소 내부에 침투한 뒤 중수 생산시설에 다량의 폭발물을 설치했다. 설치 후 재빠르게 빠져나오자마자 엄청난 폭발음과 요란한 사이렌 소리 그리고 나치군의 출동소리가 뒤 섞여 들려왔다. 1943년 2월 28일 새벽 1시 30분쯤이다. 작전팀은 그 소리가 너무 반가웠다. 베모르크 중수시설이 파괴되었음을 알리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였다. 나치가 파괴된 시설을 빠르게 복구해 8월부터 다시 중수생산을 시작했다. 이어 베모르크에서 생산된 중수 전량을 독일 본토로 가져간다는 정보가 입수됐다. SOE는 수송차단 작전(페리작전)에 돌입했다. 독일 본토로 수송하기 위해 노르웨이 틴쇼 호수의 여객선 히드로호를 이용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작전팀은 1944년 2월 20일 새벽 히드로호에 침투해 약 8㎏의 폭탄을 설치했다. 얼마 후 히드로호가 호수 중간쯤 지날 때 커다란 폭발음이 울렸다. 페리작전도 성공했음을 알리는 폭발음이었다. 나치독일은 실험용 원자로 건설 등 원폭 개발에 진척을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집요한 방해에 부딪혀 중수와 같은 핵심원료들을 확보하지 못해 후속 발전을 이어가지 못했다.
미국 CIA 전신인 전략사무국(OSS)도 맨해튼 프로젝트팀과 공동으로 나치의 핵개발 저지에 나섰다. 물리학자 새뮤얼 가우드스밋을 중심으로 극비리에 알소스팀(Alsos Unit)을 만들어 유럽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나치의 원폭개발 정보를 수집했다. 특히 유럽 과학자들이 나치의 핵무기 개발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적극 차단하는 정보활동도 전개했다. 또한 독일 본토와 나치 치하의 프랑스에 숨겨져 있던 약 1000t의 우라늄도 어렵게 찾아내어 모두 미국으로 보냈다.
무음 침투 프레쉬맨팀 34명 전멸 비극
이처럼 미국의 최초 핵무기 개발 성공 뒤에는 나치가 먼저 개발하지 못하도록 필사적인 저지 활동이 있었다. 물론 나치의 원폭개발이 여의치 못했던 것은 반드시 정보활동 때문만은 아니다. 당시 나치는 여러 전선에서 전쟁을 수행하고 있어서 원폭 개발에 집중할 수 없었다. 특히 뛰어난 유대계 독일 과학자들이 나치의 박해를 피해 대부분 미국의 맨해튼 프로젝트에 합류한 것도 주요 패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합국의 저지 정보활동이 나치 독일의 핵무기 개발을 지연시킨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만약 연합국의 저지활동이 없었거나 실패하여 나치의 원폭 개발이 진전되었더라면 2차 대전의 향방이 어떻게 변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호전적인 히틀러가 핵무기를 먼저 개발하여 런던이나 뉴욕에 투하했다면 지금의 국제질서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 되었을 것이다. 나치의 원폭 개발 저지를 위한 연합국의 정보전은 세계사의 흐름을 바꾼 세기적 정보활동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이다.
연합국의 저지 정보전은 핵폭탄에 대한 두려움이 큰 동기부여가 되었다. 히틀러가 먼저 핵무기를 손에 넣으면 끝장이라는 두려움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막겠다는 강한 의지로 발전했다. 핵무기 개발에 한발 뒤처진 불리한 상황도 나치의 원폭 개발을 반드시 저지해야 한다는 강한 의지로 이어졌다. 이처럼 불리하고 두려운 상황에서 성공한 것은 정보책무의 관점에서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위기상황에서 보여준 처칠의 정보리더십도 돋보인다. 나치의 원폭 개발 저지라는 중차대한 임무에 기존의 정보기관 대신 SOE와 같은 특수정보팀을 만들어 투입한 것은 일반상식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처칠은 전시처럼 위기상황에서는 구조화된 기존 조직보다 유연하고 움직임이 빠른 별동대가 더 유용할 것이라고 보았다. 1940년 6월 처칠이 미국의 2차 대전 참전을 이끌어 내기 위해 대미(對美) 정보활동을 전개하면서, 기존 정보기관 대신 민간인 수장의 영국안보조정처(BSC)라는 새로운 정보팀을 만들어 투입한 파격적 조치도 같은 맥락이다. 과학자들이 나치의 원폭 개발을 막기 위해 비밀 정보활동도 마다하지 않는 등 능동적으로 나선 것도 평가되어야 한다. 인류의 위기 앞에서 머뭇거리지 않고 적극 나선 용기는 진정한 지성이 무엇인지를 보여준 사례다.
최성규 고려대 법학연구원 전임연구원. 국가정보원에서 장기간 근무하며 국제안보 분야에 종사했다. 퇴직후 국내 최초로 비밀 정보활동의 법적 규범을 규명한 논문으로 고려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