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되는 한국으로 가자" 외국계 갤러리 국내 진출 러시
유명·최신작 값싸고 편리하게 볼 수 있게 돼
국내 갤러리 도전… 미술 생태계 훼손 우려도
서울 종로구 아트선재센터에서는 지난 3월 28일~6월 25일 아시아 최초로 스위스 설치미술가 하이디 부허(1926~1993) 회고전이 열렸다. 부허는 벽에 부레풀을 섞은 거즈를 바르고 액상 라텍스를 덮어 말린 뒤 벗겨내는 '스키닝'(skinning) 기법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의 대표작 ‘빈스방거 박사의 치료실’(1988)은 폐허가 된 스위스 크로이츠링켄의 콘스탄스 호수 인근 벨뷰 요양원의 치료실 벽면을 스키닝한 작품. 원인을 설명할 수 없는 여성의 병을 ‘히스테리’로 치부해 치료 않고 환자를 정신병원에 사실상 감금했던, 인권침해가 만연했던 과거와의 단절을 의미하는 작품이다. 가격은 150만 스위스프랑(약 22억3,400만 원) 안팎으로 2017년 베니스 비엔날레, 2021년 독일 뮌헨 현대미술관 ‘하우스 데어 쿤스트’ 등 유럽의 유수 전시회에서 관객을 만났다.
새로운 전위예술을 뜻하는 ‘네오 아방가르드’의 대표작가로 최근 부쩍 주목을 받고 있는 부허의 회고전이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우리나라에서 열린 것은 미국계 대형 갤러리로 전시회를 협찬한 리만머핀 덕분이다. 부허는 이 갤러리의 전속작가였다. 리만머핀은 지난 2017년 서울 종로구 안국동에 지점을 낸 것을 시작으로 일찌감치 국내시장에 진출했다.
사상 첫 일본 갤러리 서울점 '화이트 스톤' 9월 용산구에 개관 예정
외국계 갤러리·미술관의 국내 진출이 활발해지고 있다. 이들의 진출이 이어지며 한국이 기존 아시아 미술시장의 허브였던 홍콩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한국 시장에 별 관심이 없던 일본 갤러리가 사상 처음으로 한국시장 진출을 시도하는 것은 상징적이다. 아시아 주요 현대미술 갤러리 가운데 하나인 화이트 스톤 갤러리는 용산구에 지하 1층, 지상 4층 700㎡ 규모의 전시장 세 곳과 조각 작품을 설치할 수 있는 옥상 공간을 갖추고 9월 2일 서울점을 개관한다. 화이트 스톤 갤러리는 개관전을 통해 일본에서 가장 주목받는 현대미술 작가인 고마츠 미와의 개인전을 국내에서 처음으로 열어 신작을 선보일 예정이다.
영국 유명 갤러리인 화이트 큐브도 9월 5일 서울 강남구 호림아트센터 1층에 서울 지점을 개관하고 유럽의 최신 현대미술 작품 등을 선보인다. 개관전에서는 트레이시 에민, 마르그리트 위모 등의 작품이 전시된다. 현대미술의 보고인 프랑스 파리 퐁피두센터도 2025년 여의도 63빌딩에 퐁피두센터 서울을 개관할 예정이다. 미술계에 따르면 퐁피두센터 서울은 상설전시관과 기획전시관으로 나눠, 상설전시관에서 새로운 테마의 퐁피두센터 미술품을 연속 전시할 예정이다. 기획전시관에서는 국내외 다양한 작가들의 미술품을 전시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같은 외국계 갤러리 국내진출 러시는 아시아 미술시장의 허브였던 홍콩의 쇠퇴와 맞물려 있다. 중국 당국의 홍콩 민주화운동 탄압 등 정세 불안과 표현의 자유 위축 분위기 등이 작용한 것으로 미술계는 보고 있다. 중국 정부의 ‘제로 코비드’ 정책으로 3년간의 국경 폐쇄와 외국계 기업의 홍콩 엑소더스(탈출) 현상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미술품 면세도시인 홍콩은 1997년 중국 반환 이후 미술품 과세 가능성도 높아지고 있다.
싱가포르, 일본도 있는데... 한국엔 왜?
하지만 홍콩의 쇠퇴만으로 한국에 대한 관심이 설명되지는 않는다. 홍콩에서 철수한 일부 외국계 갤러리들이 싱가포르로 자리를 옮긴 사례가 있지만 시장규모가 작아 확장성에 한계가 있다. 무엇보다 회화·조각·판화 등 순수 미술작품은 수입 시 면세 대상이라는 국내의 제도적 혜택이 외국 갤러리를 끌어들이는 것으로 미술계는 보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 등에 따르면 2020년 3,279억 원 규모였던 한국 미술시장은 지난해 1조377억 원 규모로 추산될 정도로 성장세가 가파르다.
일본 정부도 미술품 수입 절차를 간소화하고 세금감면 계획을 밝힌 바 있지만 일본은 미술품 수집가들이 외국 미술품보다는 자국 작가들의 작품을 선호하는 등 보수적 구매성향이 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반면 한국은 아트 페어에 출품되는 미술품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컨템포러리아트(동시대 예술) 수집가가 많은 나라다. 세계적인 아트 페어인 ‘프리즈’가 지난해부터 ‘프리즈 서울’로 국내에 상륙하면서 이런 현상은 가속화할 것으로 보인다. 국내에 거점이 있으면 매년 열리는 ‘프리즈 서울’을 활용해 전속 작가의 작품 판매가 용이하다.
"접하기 힘든 외국 작가 만나기 쉬워져" 미술 애호인들 반색
외국계 갤러리들의 잇속이 무엇이든 국내 미술 애호가 입장에서는 접하기 어려웠던 해외 유명 작가의 현대미술 작품이나 최신작을 손쉽게 접할 수 있다는 면에서 반색하고 있다. 국내 미술 애호가들이 유럽에서나 볼 수 있는 하이디 부허의 작품을 접할 수 있게 된 사례가 이를 잘 보여준다. 미술전 도슨트로 활동 중인 미술애호가 박민정(30)씨는 “미술품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미술품을 보려고 외국에 가기도 하고, 해외여행 일정에 미술관·박물관을 끼워 넣는 경우도 많은데 그런 작품들이 해외 갤러리의 국내진출을 통해 한국에 들어온다면 너무나 좋을 것"이라며 "이를 계기로 국내 미술관도 좀 더 다양하고 흥미로운 전시를 기획하는 계기로 삼는다면 서로 좋은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말했다. 작가들도 이들이 들여오는 작품에서 도전과 영감을 얻을 수 있다. K컬처의 영향력이 커질수록 외국계 갤러리의 국내 진출도 가속화할 가능성이 높다. 한국 콘텐츠의 주목도가 올라가면서 한국 미술가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한국 특유의 이미지가 주목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주목적은 외국 미술품 들여와 수익, "경쟁우위 확보해야"
다만 이들의 주목적은 외국 미술품을 국내로 들여와 수익을 내는 것이다. 세계 미술시장에서 선호하는 미디어아트, 설치미술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을 예상만큼 국내에는 들여오지 않을 것이라는 시각도 존재한다. 미술품 판매가 주목적인 외국계 갤러리들의 경우 대부분 잘 팔릴 만한 회화 작품만 많이 들여올 가능성이 있다. 국내 미술 생태계의 회화 편중과 미술시장의 상업화가 가속화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황달성 한국화랑협회장은 “단기적으로 한국 미술시장을 외국 자본에 일부 빼앗기고 작가들의 어려움도 가중될 수 있는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한국은 홍콩, 싱가포르보다 미술 애호가의 층이 두껍고, 갤러리와 작가들도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적응력이 있고 창의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잘 극복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청환 기자 ch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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