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서 왔습니다” 150만명… 폴란드 풍경이 바뀐다

바르샤바/최아리 특파원 2023. 8. 19.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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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샤바 곳곳 우크라 가게·깃발… 은행 ATM에도 우크라語 도입

지난 16일(현지 시각) 폴란드 바르샤바 벨베데르스카 거리에 있는 우크라이나 식당 ‘크림’ 입구엔 깃발 세 개가 걸려 있었다. 우크라이나 국기, 폴란드 국기, 그리고 러시아가 점령한 크림반도의 소수민족 타타르족 깃발이다. ‘크림’은 우크라이나인이 올해 1월 문을 열었다. 이 식당에서 200여m 거리에 폴란드 주재 러시아 대사관이 있다.

지난 16일(현지 시각) 폴란드 바르샤바에 올해 문을 연 우크라이나 식당 크림(krym)에서 만난 직원 에뎀(26)씨. 가게 내부는 우크라이나를 상징하는 물건들로 꾸몄다. 지난해 폴란드로 이주했다는 에뎀씨는 “이 장소는 저항을 상징하는 가게”라고 설명했다. /최아리 기자

식당 사장은 크림반도에 살다 2014년 러시아 점령으로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로 거처를 옮겼는데, 키이우마저 러시아의 공격권에 들어오자 폴란드로 이주했다. 종업원 에뎀(26)은 “저항의 의미를 담아 만든 가게”라며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크림반도 전통 요리를 좋아한다. 우크라이나 손님이 70%는 되는 것 같다”고 했다.

그래픽=양인성

우크라이나와 535㎞의 국경을 맞댄 폴란드는 지난해 2월 러시아 침공 이래 우크라이나 난민 980만여 명을 받아들였다. 이 중 다수는 폴란드를 경유해 다른 국가로 갔거나 두 나라를 오가며 생활하고 있지만, 폴란드에 터 잡은 난민도 약 156만명(3월 기준)으로 유럽 국가 중 압도적으로 많다. 폴란드 남서부 도시 브로츠와프는 전쟁 전 인구가 64만명이었는데, 25만명에 달하는 우크라이나 난민을 수용했을 정도다. 우크라이나 난민들이 이웃 폴란드에 자리 잡으면서 최근 2년 새 거리 풍경이 달라졌다.

바르샤바의 카페 거리 노비 시비아트를 찾아가니 도로 양쪽으로 늘어선 가게 곳곳에 폴란드 국가와 우크라이나 국기가 함께 걸려 있었다. 피야나 비니시아’(카페 겸 펍), ‘차르노모르카’(해산물), ‘르비우 크루아상’(빵) 등은 우크라이나에서 시작된 프랜차이즈 브랜드다.

바르샤바 노비 시비아트 거리에 있는 우크라이나 프랜차이즈 빵집 ‘르비우 크로아상’ 앞에는 우크라이나와 폴란드 국기가 동시에 걸려 있다./최아리 기자

이 중 일부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전에 이미 폴란드에 자리 잡았는데, 전쟁 후에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우크라이나인들이 더 많이 찾는다고 한다. 피야나 비니시아 직원은 “폴란드로 온 우크라이나 난민들은 종업원으로 일하기도 하지만, 우리의 손님이 될 수도 있다”며 “우크라이나식 술을 마시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종종 찾는다”고 했다. ‘르비우 크루아상’의 경우 우크라이나 르비우에서 2015년 처음 문을 열고, 우크라이나 내 130여 매장을 운영하다가 최근 바르샤바에만 2호점을 냈다. 가게 한쪽 벽면에 우크라이나 사람들을 위한 메모 공간도 마련했다. 이곳에서 친구들과 얘기를 나누던 우크라이나인은 “2년 전 키이우에서 먹던 빵 맛을 폴란드에서 그대로 느낄 수 있어 행복하다”고 했다.

바르샤바에 있는 우크라이나 술집 피야나 비니시아 내부 모습. 우크라이나 국기가 그려진 벨이 설치됐다./최아리 기자

우크라이나의 이웃이면서 강대국의 압제라는 유사한 역사적 배경을 가진 폴란드는 러시아 침공 이래 우크라이나를 적극적으로 도왔다. 자국에 정착한 난민들에게 여러 혜택을 줬다. 특히 작년 4월에는 우크라이나 국민이 폴란드인과 동일한 조건으로 사업을 운영할 수 있도록 법까지 개정했다. 이 덕분에 폴란드 거주 우크라이나인들의 창업이 쉬워졌고, 우크라이나 기업들도 폴란드를 해외 진출 관문으로 삼는 경우가 늘었다. 2022년 1월 폴란드에서 창업한 우크라이나 회사는 188곳이었는데, 올해 4월에는 2488곳이 돼 13배 이상으로 늘었다. 폴란드 경제연구소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전쟁 후부터 지난 6월까지 폴란드에 설립된 우크라이나 개인 기업은 2만9400곳에 달하고, 그 숫자는 빠른 속도로 늘고 있다. 건설업(23%), 정보통신업(18%)이 가장 많았고, 서비스업도 14%를 차지했다.

이런 우크라이나인들의 창업과 사업 확장이 폴란드 경제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다는 평가도 있다. 우크라이나인 올라 사베첸코는 바르샤바에 공동 미용 작업실 ‘B.UA’를 열었다. 여러 우크라이나 스타일의 미용실, 마사지 가게 등이 한곳에 모여 공동 작업 공간을 쓸 수 있도록 만든 곳이다. 우크라이나에서 가장 큰 운송 업체 노바 포스트도 폴란드에만 지점을 21개 뒀다. 작년 처음으로 해외 진출을 하며 폴란드를 첫 국가로 선정한 뒤 매장을 빠르게 늘렸다. 우크라이나 난민들의 짐을 운송해주는 일을 하며 사업을 확장했다고 한다.

우크라이나 난민들을 배려하기 위한 폴란드의 분위기도 눈에 띄었다. 교통 티켓 판매기나 은행 현금자동지급기(ATM)에서는 기존의 폴란드어, 영어, 독일어와 함께 우크라이나어 기능이 추가됐다. 일부 은행은 우크라이나인에게 수수료를 면제해 줬다. 일부 마트에서는 우크라이나 고객의 감정을 배려해 ‘러시아식 만두’ 같은 표기를 ‘우크라이나식 만두’로 바꾸기도 했다.

다만 전쟁이 길어지면서 폴란드인들의 환대가 지금처럼 계속되기 어려울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올해 2월 여론조사 업체 오픈필드가 폴란드인 1677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67%가 우크라이나인을 돕는 것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2022년 전쟁 직후 지원 찬성률이 88%까지 올랐다가, 70%대를 유지했던 작년 여론조사 결과에 비하면 계속해서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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