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영옥의 말과 글] [317] 뜻밖에 남 탓이 도움이 될 때
소설가 엘리자베스 길버트에 의하면,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는 인간의 창의성이 신성한 혼, ‘지니어스(Genius)’에서 비롯된다고 믿었다. 천재성이 인간에게 나오는 게 아니라, 우렁각시나 지니처럼 어딘가 숨어 있다가 우리를 돕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당시 예술가들은 작품이 형편없을 때, 자기 비하 대신 지니어스가 돕지 않아서 망했다고 푸념할 수 있었다. 반대로 작품이 뛰어나 큰 성공을 거둬도 지니어스 덕에 위대한 작품을 만들었다고 겸손할 수 있었다.
이것은 탁월한 심리 전략이다. 성공과 실패 모두를 자기 탓으로만 돌리지 않고 심리적 거리를 만들기 때문이다. 그런 덕분에 당시 예술가들은 자신의 빈약한 재능을 원망하며 술과 도박에 빠지는 대신, 긴 세월 작품 활동에 매진할 수 있었다. 비빌 언덕, 하소연할 지니어스가 있었기 때문이다.
삶에는 내가 어쩔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한다. 아무리 준비해도 시험에 떨어질 수 있고, 죽어라 노력해도 대회를 망칠 수 있다. 이때 자기 탓만 하면 자존감은 무너지고 술과 약에 의지한 채 불면의 밤이 이어진다. 이때야말로, 나를 비추는 ‘거울’이 아닌 세상을 비추는 ‘창문’을 봐야 한다. 농사를 망친 농부가 비를 내려주지 않는 하늘을 원망하듯, 닫힌 창을 열고 내 밖에 존재하는 것에 기댈 수 있어야 한다.
지독한 고난에 처했을 때, 종교는 우리에게 지혜를 준다. ‘신의 뜻대로 하소서!’라는 말을 나약한 패배주의나 회피주의로 치부하면 우리가 얻는 심리적 편익은 없다. 그 말은 우리에게 닥친 상황과 한계를 수용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벌어진 일의 한계를 수용하면 우리는 “어째서 이런 일이 생긴 거지?”라는 한탄 대신 “어차피 벌어진 일이라면 지금 내가 뭘 해야 하지?”라는 다른 방식의 질문을 할 수 있게 된다. 이때 내가 ‘의식적’으로 쓰는 방법은 간단하다. ‘위기’를 ‘기회’로, ‘행복’을 ‘다행’으로 바꿔 부르는 것이다. 지금 오른손이 아니라 왼손을 다친 게 얼마나 다행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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