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월의쉼표] 내가 잃어버린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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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 때 나는 학교 앞에서 하숙을 했다.
절판되어서 다시 살 수도 없는 그 책이 사라진 책장을 멍하니 내려다보다가 나는 비로소 현실을 직시했다.
그러나 어디에 숨긴들 내 방이요, 불청객의 손바닥 위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하숙집 주인이 문도 못 잠그는 방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보다, 그 방에서 내가 반년을 살았다는 것보다도 더 어이없는 일이지만 그때의 나는 진심을 담아 편지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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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없어진 물건은 야구모자였다. 그다음으로는 음반이 없어졌다. 포장을 뜯지 않은 초콜릿 크래커가 없어졌다. 처음에는 착각이라고 생각했다. 이십 년 동안 연필 한 자루 없어진 적 없는 집 아닌가. 게다가 선량한 얼굴을 한 옆방 하숙생 중 누구를 의심한단 말인가. 상경한 지 얼마 안 되어서 내가 아직 서울 생활에 적응하느라 정신이 없는 것이라고 믿으려 했다. 그러니까 내가 아끼던 오래된 소설책이 없어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절판되어서 다시 살 수도 없는 그 책이 사라진 책장을 멍하니 내려다보다가 나는 비로소 현실을 직시했다. 내 방에 실제로 누군가 드나들고 있고 절도까지 하고 있음을. 주인아주머니에게 말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출타 중이었고 나는 곧 학교에 가야 했다. 초조해하는 와중에 문득 책상 위 일기장이 눈에 띄었다. 문제의 불청객이 나 없는 방에서 혼자 무슨 짓인들 못 할까 생각하자 원한다면 일기도 읽을 수 있겠구나 싶었다. 나는 일기장을 숨길 곳을 찾으려 했다. 그러나 어디에 숨긴들 내 방이요, 불청객의 손바닥 위였다.
결국 나는 일기장을 펼쳤다. 편지를 썼다. 이제껏 당신이 내 방을 멋대로 드나들며 무엇을 가져갔는지 다 알고 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지나간 일을 묻지는 않겠다. 다만 부탁하건대 책은 돌려달라. 다시 구할 수 없는 책이다. 원한다면 빌려줄 수는 있다 운운. 지금 생각해 보면 하숙집 주인이 문도 못 잠그는 방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보다, 그 방에서 내가 반년을 살았다는 것보다도 더 어이없는 일이지만 그때의 나는 진심을 담아 편지를 썼다.
그리고 이튿날 책이 돌아왔다. 뜻밖에도 대신 사라진 것이 있으니 일기장의 마지막 페이지였다. 아마도 불청객은 편지의 수신인으로서 그것을 가져갈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내 이야기를 들은 주인아주머니는 부랴부랴 내 방문에 잠금장치를 달아주었다. 더 이상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았다.
김미월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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