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월의쉼표] 내가 잃어버린 것

2023. 8. 18. 2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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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 때 나는 학교 앞에서 하숙을 했다.

절판되어서 다시 살 수도 없는 그 책이 사라진 책장을 멍하니 내려다보다가 나는 비로소 현실을 직시했다.

그러나 어디에 숨긴들 내 방이요, 불청객의 손바닥 위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하숙집 주인이 문도 못 잠그는 방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보다, 그 방에서 내가 반년을 살았다는 것보다도 더 어이없는 일이지만 그때의 나는 진심을 담아 편지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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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 때 나는 학교 앞에서 하숙을 했다. 당시 내 방문에는 잠금장치가 없었다. 주인아주머니 말씀으로는 원래 부엌이었던 것을 방으로 개조해서 그렇다는데, 그렇다 해도 자물쇠를 달아주면 간단히 해결될 문제건만, 그는 그럴 마음이 없었다. 당신이 이십 년째 하숙을 치고 있지만 여태 연필 한 자루 없어진 적이 없다며 그는 하숙집의 유일한 여학생이었던 나의 방범에 대한 지극히 기본적이고도 상식적인 걱정을 기우로 일축해버렸다.

처음 없어진 물건은 야구모자였다. 그다음으로는 음반이 없어졌다. 포장을 뜯지 않은 초콜릿 크래커가 없어졌다. 처음에는 착각이라고 생각했다. 이십 년 동안 연필 한 자루 없어진 적 없는 집 아닌가. 게다가 선량한 얼굴을 한 옆방 하숙생 중 누구를 의심한단 말인가. 상경한 지 얼마 안 되어서 내가 아직 서울 생활에 적응하느라 정신이 없는 것이라고 믿으려 했다. 그러니까 내가 아끼던 오래된 소설책이 없어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절판되어서 다시 살 수도 없는 그 책이 사라진 책장을 멍하니 내려다보다가 나는 비로소 현실을 직시했다. 내 방에 실제로 누군가 드나들고 있고 절도까지 하고 있음을. 주인아주머니에게 말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출타 중이었고 나는 곧 학교에 가야 했다. 초조해하는 와중에 문득 책상 위 일기장이 눈에 띄었다. 문제의 불청객이 나 없는 방에서 혼자 무슨 짓인들 못 할까 생각하자 원한다면 일기도 읽을 수 있겠구나 싶었다. 나는 일기장을 숨길 곳을 찾으려 했다. 그러나 어디에 숨긴들 내 방이요, 불청객의 손바닥 위였다.

결국 나는 일기장을 펼쳤다. 편지를 썼다. 이제껏 당신이 내 방을 멋대로 드나들며 무엇을 가져갔는지 다 알고 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지나간 일을 묻지는 않겠다. 다만 부탁하건대 책은 돌려달라. 다시 구할 수 없는 책이다. 원한다면 빌려줄 수는 있다 운운. 지금 생각해 보면 하숙집 주인이 문도 못 잠그는 방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보다, 그 방에서 내가 반년을 살았다는 것보다도 더 어이없는 일이지만 그때의 나는 진심을 담아 편지를 썼다.

그리고 이튿날 책이 돌아왔다. 뜻밖에도 대신 사라진 것이 있으니 일기장의 마지막 페이지였다. 아마도 불청객은 편지의 수신인으로서 그것을 가져갈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내 이야기를 들은 주인아주머니는 부랴부랴 내 방문에 잠금장치를 달아주었다. 더 이상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았다.

김미월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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