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동물에게 얼마나 잔인한가…무섭도록 선명하게 다가온다[이종산의 장르를 읽다]
사랑에 빠진 레이철
팻 머피 지음·유소영 옮김
허블 | 544쪽 | 1만8000원
요즘 듣고 있는 희곡 수업에서 동물권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있었다. 그 시간의 과제는 ‘동물의 입장에서 독백 쓰기’였다. 나는 과제를 해보려고 시도하긴 했지만, 결국은 억지로 조금 끄적이다가 말았다. 식물하고만 친하게 지내던 인간이 진흙 덩어리처럼 생긴 외계 생물과 사랑에 빠지는 연애 소설도 썼던 내가 왜 동물의 입장이 되어 글을 쓰는 과제 앞에서는 그렇게 막막해졌던 걸까?
실은 위화감이 날 굳어지게 했다. 인간은 동물의 머릿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해 거의 무지하다. 동물은 인간처럼 말하지도 않는다. 동물을 의인화해서 어떤 말을 하도록 시킨다는 것이 나는 영 내키지 않았다. 의인화야말로 가장 인간중심적으로 동물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식이 아닐까?
그런 고민 중에 <사랑에 빠진 레이철>을 읽었다. 이 소설은 내가 품었던 협소한 생각을 SF의 방식으로 깨트리고, 인간 창작자로서의 한계를 어떻게 넘을 수 있는지도 가르쳐주었다. ‘레이철’은 소녀의 이름이면서 침팬지의 이름이기도 하다. 그녀의 아버지인 애런 박사는 뇌 기능을 연구하는 대학교수였는데, 학교에서 연구를 인정해주지 않자 가족과 함께 사막으로 떠난다. 그곳에 있는 동안 불운한 교통사고가 나는 바람에 아내와 딸이 목숨을 잃었다. 애런 박사는 평소 연구를 위해 딸 레이철의 두뇌가 생성한 전기장 패턴을 기록해놓았는데, 이를 이용해 어린 침팬지의 뇌에 딸의 의식 패턴을 덮어씌우는 데에 성공한다. 그리고 그 침팬지에게 딸의 이름을 붙이고 여러 가지 공부와 수화를 가르친다. 몇 달 후 레이철은 인간처럼 생각하고, 자신의 생각을 수화로 표현할 수도 있게 된다.
레이철 안에는 인간 소녀였을 때의 기억과 어린 침팬지였을 때의 기억이 공존한다. 인간과 침팬지라는 두 개의 자아를 가진 레이철은 종종 혼란을 느낀다. 그러던 중 레이철을 돌보던 애런 박사가 심장마비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면서 그녀는 혼자 남게 된다. 애런 박사가 자신의 연구를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아서 사람들은 레이철이 인간적인 의식을 가졌다는 것을 모른 채 그녀를 동물센터로 데려간다.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센터에 붙잡혀 간 레이철에게는 두 가지 방향의 미래만이 있다. 번식장으로 가거나, 동물실험실로 가거나. 둘 중 하나다. 소설 속의 사람들은 모르지만, 독자는 침팬지 레이철의 안에 인간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작가가 설정해놓은 이러한 장치로 인해 독자는 레이철의 입장에 이입한 상태로 인간이 동물에게 행하는 일들이 얼마나 잔인한지 무섭도록 정확하게 깨닫게 된다. 인간은 동물에게 잔인할 뿐만 아니라 무척이나 무례하다. 센터의 사람들은 침팬지 레이철의 몸을 함부로 만지고, 가두고, 번식을 하도록 유도하고, 번식하는 과정을 지켜보고, 번식에 쓸모가 없으면 실험체로 쓴다.
인간은 동물을 함부로 대한다. 독자가 레이철에게 이입하는 순간 그 사실이 너무나도 선명해진다. 사람은 사람에 대한 폭력에는 민감하게 반응하지만, 동물에 대한 폭력에는 그보다 훨씬 둔감하다. 동물은 인간과 다르다고 믿기 때문이거나,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동물을 자원으로 쓰는 사회에서 자라 그러한 문화에 너무 익숙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다. 나부터가 그렇다. 동물권에 대한 이야기가 현대의 중요한 화두가 되고, 고기와 달걀, 우유가 어떤 과정을 거쳐 나에게 오는 것인지 정확하게 알게 되었는데도 나는 계속 그것들을, 그들을 먹는다.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고기를 줄일지언정 완전히 끊지 못한다는 것은 우리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딜레마일 것이다. 적어도 내 주변은 그런 것으로 보인다.
동물과 동물에게서 인간이 가져오는 것들이 여전히 인간의 주요 식품군이라는 것은 부정할 여지가 없다.
동물권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고, 동물권에 대한 수업을 듣고, <사랑에 빠진 레이철>과 같은 소설을 읽으면 동물 해방 운동은 미룰 수 없는 일, 바로 지금부터 시작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이 명징해진다. 하지만 바로 그런 생각을 한 날 저녁에 마트에서 고기를 사서 먹기도 한다. 그렇다고 지금 세계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는 동물 해방 운동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동물권에 대한 이야기가 대두된 후로 마트에는 동물복지 딱지가 붙은 고기와 달걀, 우유가 생겼다. 나는 이것이 점진적으로 대체육이나 식물성 식품으로 변화해갈 것이라고 믿는다.
동물 해방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고 있다. 최소한 공장형 축산업의 잔인성을 알게 된 사람들은 확실히 많아졌다. 세상은 한 번에 바뀌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변화한다. 인간은 변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동물에게 너무나 잔인해진 이 시대의 시스템에 어떤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현상은 우리가 이미 변화의 과정 속에 있다는 증거다.
이종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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