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상상력은 선택할 수 없다
한때 이런 직업을 가져볼까 생각한 적이 있다. ‘기억 발견사’라고 부를 수 있는 업무로 어린 시절 읽었던 책의 제목을 찾아주는 일을 하는 것이다. 가끔 내게 “이 이야기가 어떤 동화인지 알아요?”라고 잊어버린 추억의 책 제목을 물어보는 분들이 있다. “어떤 아이가 천둥치는 날 가게에서 케이크를 훔치는데” 하며 기억 속 한 장면을 풀어놓는 식이다. “그 케이크 초록색이죠?”라고 대꾸하면 “맞아요! 제가 그 책 정말 좋아했어요”라며 얼굴이 환해진다. 내가 제목까지 맞히면 상대방은 그리움 가득한 눈빛이 된다.
어린 시절의 ‘책’이란 어떤 의미일까. 성장은 기억을 덮어쓰는 과정이라서 아무리 즐거웠더라도 자라고 나면 희미한 잔상만 남는다. 그림책 작가 기타무라 사토시는 영국 유학 중 아이 돌보는 일을 하면서 습작들을 돌보는 어린이에게 읽어주었다. 아이는 날마다 수십 번 읽어달라고 할 정도로 그의 작품들을 좋아했다. 세월이 흘러 아이의 부모로부터 연락이 왔다. 대학 졸업식에 그를 초대하고 싶다는 것이다. 기쁜 마음으로 달려간 기타무라 사토시의 눈앞에는 장성한 청년이 서 있었다. “나를 기억해주다니 고마워요”라고 말하자 그는 머쓱하게 웃으면서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사실 저는 선생님이 기억나지 않아요. 부모님이 말씀해주셨기 때문에 늘 고마움은 갖고 있습니다.” 그때 읽어준 책도 다 잊었냐는 말에 청년은 정말 미안한 표정으로 그렇다고 했다. 기타무라 사토시는 2010년 서울국제작가축제에서 이 일화를 들려주면서 “어린이문학은 잊히고 마는 숙명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들려준 이야기들이 그 사람 자체가 되었기 때문에 저는 그것이 조금도 실망스럽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당시 나는 그 일화를 들으면서 기억에서는 엷어지지만 마침내 존재 자체가 되는 것, 이것이 어린이책임을 깨달았다. 어린이와 책의 연결고리는 제목을 잊은 뒤에도 그리워할 만큼 견고한 면이 있다. 그러나 어린이는 늘 어른의 추억을 뛰어넘어 성장한다. 만약 그 청년이 “선생님의 책이 준 가르침대로 살겠습니다”라고 답했더라면 그건 더 멋진 일이었을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청년은 이제 더 먼 곳으로 갈 사람이다.
스톡홀름의 티오트레톤은 10세부터 13세까지의 어린이를 위한 도서관으로 어른 보호자가 동행할 수 없다는 출입규칙을 갖고 있다. 이 나이가 되면 “어른이 항상 옳거나 좋은 결정만을 내리는 건 아님”을 이해하고 있으며 자신이 읽을 책은 스스로 찾아야 한다는 것도 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독서는 독립의 과정 중 하나다. 보호자들은 예의바르게 행동하는 유명한 인물이 나오는 이야기를 읽히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어린이는 힘없는 이가 모험으로 자기 자신을 되찾는 이야기를 더 좋아하고 세계의 변동에도 민감하다. 이제부터 살아나갈 사람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 충남의 도서관 19곳 가운데 14곳에서 특정한 어린이책의 열람 또는 검색을 제한해 큰 물의를 빚었다. 성인지 감수성이 높은 도서를 서가에서 배제하려는 일부 단체의 조직적 민원 때문에 도서관 일상 업무가 마비될 정도였다. 이들이 금서 지정을 요구하는 책의 목록을 보면 대부분 오늘의 어린이들이 아끼고 사랑하는 양서로 채워져 있다.
옥스퍼드대학의 캐서린 룬델은 <나이를 먹었고 지혜롭다고 하더라도, 어른이 동화를 읽어야 하는 이유>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어린이책의 초창기에 있었던 ‘교육’이라는 이름의 유령이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만, 어린이책이 우리에게 가르쳐주고자 하는 것 자체가 이전과 달라졌습니다. 그리고 세상이 텅 비어 있고 진실이 사라진 것처럼 보일 때 동화는 희망을 보여줍니다. 어른 여러분, 동화책을 읽으세요.”
일부 어른들이 금서로 지정하고 싶어 하는 그 책들을 모든 어른들이 읽으면 좋겠다. 그러면 “상상력은 함부로 제한하거나 선택할 수 없다”는 것을 자연스레 이해하게 될 것이다.
김지은 서울예대 문예학부 교수 아동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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