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한국과 일본, 그 질기고 불평등한 역사

기자 2023. 8. 18. 2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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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너무 길고 혹독하다. 에어컨을 틀었다 껐다 하며 실내에서 견디는 것도 한계가 있으니 차라리 자동차를 타고 어딘가 가보자는 마음이 생긴다. 평소에는 거의 다니지 않는 고속도로를 타고 대구와 군산에 다녀오게 된 이유이다.

한윤정 전환연구자

대구는 ‘대프리카’라는 별명처럼 정말 더웠다. 어렸을 때 외가가 있었지만 철든 다음 대구에 가보기는 처음이다. 뉴스에 많이 나오는 서문시장부터 방문했다. 서울의 대형 재래시장은 고층건물로 재개발된 데 비해 서문시장은 옹기종기 모인 점포들이 끝없이 펼쳐진 모습이 이채로웠다. 근대 이전부터 경상도의 물산이 모이던 곳이라 규모가 상당했고, 박근혜 대통령이 다녀간 떡볶이집, 윤석열 대통령이 다녀간 칼국수집은 문전성시였다.

도심의 계산성당, 대구매일신문, 역사박물관으로 이어지는 근대 기행에서 국채보상운동에 대해 새삼 알게 되었다. 1907년 2월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은 신문·출판업에 종사하던 지역유지 서상돈, 김광제가 제안했으며 곧 서울과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당시 일본에서 들여온 국채가 1300만원(1906년 대한제국 예산이 790만원)인데 이 돈을 빌미로 일본의 압박과 간섭이 계속되니 전 국민이 담뱃값을 아껴 돈을 모으자는 것이었고, 이 제안에 기쁘게 찬동한 고종까지 담배를 끊었다 한다. 그러나 모금과정의 ‘횡령’에 대한 일본헌병대의 수사 등 방해 공작으로 운동은 1년 만에 무산됐고, 모인 돈은 겨우 18만8000여원이었다. 무력하고 안타까운 역사의 한 장면이다.

군산 역시 예전에 가본 적 있고 기름진 호남평야의 쌀을 수탈해 일본으로 실어가는 항구로 건설됐다는 상식 정도는 있었지만, 역사박물관에 들러 자세한 내용을 살펴보기는 처음이었다. 수탈정책의 중심에는 일본 금융자본이 있었다. 나가사키18은행은 자국 내 금융 간 경쟁이 심해지면서 상공업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영업이익이 떨어지자 조선에 진출했고, 조계지의 일본인들은 은행에서 자금을 저리로 융자한 뒤 가난한 농민들에게 땅을 담보로 고리대금업을 함으로써 토지를 수탈했다. 소작농들은 지주에게 수확한 쌀의 75%까지 내놓았다고 한다.

대구, 군산뿐일까. 인천, 부산, 목포 그리고 일본인들이 좋아하던 고래를 잡아 내가던 포항까지 지금은 복고풍 관광지로 변한 근대도시의 문화유적에는 빠짐없이 일제 식민지의 기억이 새겨져 있다. 사실 이런 주제는 해마다 광복절이면 나오는 고정 레퍼토리일 수도 있지만, 그만큼 해결되지 않는 문제이다. ‘적법’한 절차에 의해 이뤄진 외교·통치 행위라는 일본 편향 주장과 그 의도 및 실질적인 내용을 문제 삼아서 인정과 사과, 보상을 요구하는 한국 편향 주장이 국내 정치를 갈라놓는다. 일본 식민지배가 한국의 경제개발을 가능하게 했다거나(이영훈 외, <반일종족주의>), 종군위안부는 자유로운 직업 선택이었다는(박유하, <제국의 위안부>) 논리가 여전히 주장되고 반박되는 배경이다. 어떤 이들의 눈에는 과거에 사로잡혀 지금까지 성내고 떼쓰는 동족이 한심할 것이다.

그러나 한·일 간의 불평등하고 부정의한 역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실질적으로 점유했고 수많은 문서상 증거가 있는 독도에 대해 일본은 ‘다케시마’라 부르며 자신의 영토라고 주장한다. 공교육 교과서와 방위청 백서에 그렇게 들어가 있다. 독도가 일본 영토로 편입되면 우리가 잃는 해양영토는 한반도 면적의 60%에 이른다. 후쿠시마 방류수 문제 역시 핵심 정보를 공개하지 않은 채 어업인의 생계와 국민 건강권, 생태계 문제에도 불구하고 일방적으로 밀어붙이고 있다. 한국을 이웃 국가로 존중한다면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더구나 이런 일들은 ‘미래의 동반자’란 명분으로 대한민국 윤석열 정부의 방임과 협력 아래 이뤄지고 있다. 그 동반이란 “같은 민족과 대결하려고 일본과 협력하는 사악한 길”(와다 하루키)이다.

직접 일본의 수탈과 억압을 받은 세대는 거의 가고 없지만, 오랜 역사에 걸쳐 쌓인 국민감정은 여전히 존재한다. 물론 일본에 대한 감정과 행위는 양가적이어서 엔저 현상으로 비용이 내려가면 너도나도 일본 관광에 나선다. 반드시 일본이 좋아서라기보다 쉽게 갈 수 있는 가까운 이웃이기에 어쩔 수 없다. 서로 조심하면서 교류하고 협력할 수밖에 없다. 지금처럼 협력하기 위해 과거는 묻어놓고 잘못은 덮어주는 ‘통 큰’ 한·일관계라면 결코 길게 가지 못할 것이다. 이런 지극히 상식적인 사실을 되새기게 만든, 참담한 광복절이 지나갔다.

한윤정 전환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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