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 학대하던 형부, 날 감옥에 보냈어요”...무너진 관계를 보듬는 시선 [Books]

김유태 기자(ink@mk.co.kr) 2023. 8. 18.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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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최은영 지음, 문학동네 펴냄
소설집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를 출간한 최은영 소설가. [사진=문학동네·정멜멜 작가]
최은영 소설은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읽어야 한다. 인물들이 맺는 관계의 풍경을 따라가다보면 어느 순간 독자 자기도 모르게 공기가 달라져 있기 때문이다. 그 공기에는 온몸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사람을 향한 깊은 애정이 담겨 있다.

최은영의 신작 소설집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는 현재 주요 서점 종합 베스트셀러 3위에 올라 있다. 최은영은 그만큼 독자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작가다. 전작 소설집 ‘내게 무해한 사람’에 이어 5년 만에 출간된 이 책에는 7편 단편과 양경언 평론가의 해설이 실려 있다.

책에 실린 단편 ‘몫’은 엇갈리는 생에 대한 한편의 사실적 우화처럼 읽힌다. 소설은 해진의 시선을 따라간다. 해진은 대학 시절 교지에 적힌 정윤의 글을 읽고 교지 편집부에 들어갔다.

교지 편집부 기자들은 대학 축제에서 일어난 여성 집단 폭행, 가족 간 폭행죄가 성립되지 않는 불합리한 법률 등에 대한 기사를 싣는다. 해진은 그곳에서 정윤과 희영이 자주 의견이 부딪히는 모습을 본다.

정윤의 글은 논리적이었지만 타인에의 공감이 부족했고, 희영의 글은 공감이 깊었지만 논리적인 비약이 없지 않았다. 대학원에 갔던 정윤은 훗날 결혼 후 미국으로 떠나고, 희영은 기지촌 여성을 위한 활동가의 길을 걷는다. 하나의 사건 앞에서 사람의 선택도 이와 같다. 이탈해버리거나, 더 깊이 관여하거나.

그 중간지점에 해진이 남겨져 있다. 그는 쓴다. ‘글쓰는 일을 직업으로 삼고 나서 당신은 정말로 글을 써야 하는 사람들은 모두 떠나고 쓸 줄 모르는 당신(해진)만 남아 글을 쓰고 있다고 생각하곤 했다.’(60쪽)

표제작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는 은행원이었지만 27세에 대학에 편입한 희원의 강의실 안으로 따라 들어가며 열린다.

A4용지 한 장 분량의 영문에세이를 제출하는 수업이었다. 희원을 가르치는 강사 ‘그녀’는 한국어 억양이 강한 영어로 수업했다. 희원과 그녀가 자란 동네는 골목이 많던 시절의 용산. 둘은 서로를 몰랐지만 용산의 책방에 대한 공통의 기억을 가졌다.

희원은 그녀가 오래 전에 쓴, 이제는 절판된 에세이를 읽으면서 그녀를 알아간다. 그리고 그녀를 이해하게 된다. 시간이 흐르고 희원 역시 강사가 되어 자신이 오래 전의 그녀의 삶과 생활을 반복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공부에 대한 열망 곁에서 그녀는 희원의 스승이었다. 선명하진 않지만, 삶을 응원해주고 있음이 분명한 작은 불빛의 확신만으로도 삶은 더 이어질 수 있다고 책은 말한다.

‘나는, 더 가보고 싶었던 것 뿐이었다. 나와 닮은 누군가가 등불을 들고 내 앞에서 걸어주고, 내가 발을 디딜 곳이 허공이 아니라는 사실만으로도 알려주기를 바랐는지 모른다.’(44쪽)

다른 단편 ‘답신’은 수감생활 중인 이모가 자신의 존재도 모르는 조카에게 보내는 편지글이다. 이모인 ‘나’는 4세 때 엄마가 떠나면서 언니와 함께 자랐다. 무관심과 학대에서 자란 언니는 21세 때 서른 살도 훌쩍 넘어보이는, 검은색 세단을 타고 온 ‘선생님’과 결혼을 한다. 언니는 이미 임신을 한 상태다.

상견례 자리에서도 노골적으로 언니를 무시하던 형부는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을 꼬드겨 성적으로 유린하는 범죄자였고 언니 역시 그 중 하나였다. ‘나’는 형부에게 손찌검을 당한 뒤 이렇게 말한다. “언니도 이렇게 때렸니.” 존재도 모르는 조카에게 보내는 편지에는 약자의 자리를 보듬는 작가의 눈물이 묻어 있다.

권여선 작가는 “최은영의 작품을 읽고 나면 늘 이것을 바라왔다는 걸 깨닫는다. 비슷한 것 같지만 읽을 때마다 생판 다른, 최은영은 그런 작가다”라고 책을 추천했다.

최은영 소설집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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