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강제징용 제3자 변제 “공탁 불수리는 국익에 반한다” 파장
“日변제나 제3자 변제나 동일한 금전 만족”
“헌법에 따라 日에 사과 강제할 수 없다” 주장
정부 “법리 변론…역사 인식과 관련 없는 문제”
[헤럴드경제=최은지 기자] 정부가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금 공탁을 불수리 결정한 법원에 이의신청을 하면서 “일본 기업의 사과는 강제할 수 없다”, “공탁 불수리는 국익에 현저히 반한다”고 기재한 것으로 알려져 파장이 일고 있다.
그동안 일본 측에 ‘성의 있는 호응조치’를 요구하면서 제3자 변제안을 거부한 피해자들을 설득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던 정부가 정작 재판부에는 ‘사과를 강제할 수 없다’고 언급한 것으로 드러난 것이다.
더구나 법원이 민법 제496조에 따라 피해자가 반대 의사를 명시적으로 표시했기 때문에 제3자 변제가 불가능하다고 판결한 데 대해 정부가 “국익에 현저히 반한다”고 말한 점은 법리 다툼이 아니라 사법부에 정치적 압박을 가하고 있다는 비판도 피할 수 없게 됐다. 법원은 정부의 이의신청서를 잇달아 기각하고 있다.
한겨레 신문은 17일 행정안전부 산하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재단)의 강제동원 피해자 이춘식 할아버지에 대한 공탁 불수리 결정 이의신청서를 확보해 보도했다.
44쪽 분량의 이의신청서에서 재단은 피해자들이 요구해 온 일본과 전범 기업의 사과에 대해 “우리 헌법이 보장하는 양심의 자유에 따라 어느 누구도 사과를 강제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재단은 “채권자(이 할아버지) 일방의 의사로 부당하게 채무자(가해기업)에 의한 변제만을 강요하는 부당한 결과가 발생할 수 있다”며 “채무자에게 사과를 받는 것이 선행돼야 한다든지, 판결금을 채무자로부터만 받아야 한다는 건 법 감정의 문제일 뿐”이라고 말했다.
재단은 “채무자 본인이 직접 변제하는 경우나 제3자(재단)가 변제하는 경우나, 채권자가 동일하게 금전 채권의 만족을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밝혔다. 피해자들에게 지급하는 배상금을 가해자인 일본 가해기업이 지급하나 재단이 지급하나 동일한 금액이기 때문에 지급 주체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재단은 “공탁공무원의 (공탁 불수리) 판단으로 우리 정부의 강제징용 문제 해법이 무용지물이 되는 결과가 되는 것은 국익에도 현저히 반한다”고 주장했다.
지난 3월 제3자 해법안을 발표하면서 정부는 피해자 및 유가족을 설득하는 데 우선하겠다고 밝혔다. 정부 해법안에 동의하는 피해자 및 유족 측에 배상금 지급을 시작했지만, 일본의 사과와 피해기업의 배상금 기여를 주장하는 피해자 및 유족 측은 정부의 배상금 수령을 거부했다.
해법안을 발표한 후 4개월 만인 지난 7월, 정부는 해법안을 거부한 이들의 배상금을 법원에 공탁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정부는 공탁 개시 결정의 이유를 배상금을 받은 피해자 측과 배상금을 거부해 지연이자가 쌓인 피해자 측과의 형평성 문제를 들었다.
그러나 정부의 공탁 신청을 받은 법원들이 줄줄이 불수리 결정을 내렸다. 이에 대해 정부는 불수리 결정이 공탁 공무원의 권한 범위를 벗어났다면서 이의신청했다. 이에 따라 재판부로 넘어간 공탁 사건에 대해서도 최근 법원이 기각 결정을 내리고 있다.
정부가 제3자 해법안을 거부하는 피해자측의 의사와 반해 공탁 개시를 결정하면서부터 정부와 피해자 간 법적 다툼은 예견된 상황이었다. 다만 정부가 이의신청을 제기하면서 마치 일본 피고기업의 입장을 대변하는 논리를 취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특히 제3자 해법안 발표 당시부터 적법성 논란이 일었는데, 이에 대해 법원은 일관되게 민법 제469조를 들고 있다. 민법 제469조는 제3자도 채무를 변제할 수 있지만, 채무의 성질 또는 당사자의 의사표시로 이를 허용하지 않을 때는 그렇지 않다고 규정하고 있다.
광주지법 민사44단독 강애란 판사는 17일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하 재단)이 낸 2건의 공탁 불수리 결정 이의신청을 기각 결정하면서 정부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강 판사는 “이 사건의 판결금은 미쓰비시중공업 주식회사의 피해자에 대한 불법행위를 원인으로 한 손해배상채권(위자료청구권)이다”이라며 “특히 위자료는 피해자가 개인적으로 받은 인격적 모욕 등 불법적이고 부당한 처사에 대하여 피해자를 심리적·감정적으로 만족시키는 기능도 있다”고 정의했다.
이어 “가해 기업이 불법행위 사실 자체를 부인하면서 피해자에 대한 손해배상채무를 인정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신청인(재단)이 가해 기업을 대신해 판결금을 제3자 변제한 후 가해 기업에 구상권 행사를 하지 않는다면, 가해 기업에 면죄부를 주게 되는 결과가 발생한다”며 “이렇게 되면 결국 채권자는 정신적 손해에 대한 채권의 만족을 얻기 어려울 것”이라고 지적했다.
정부가 법원의 기각 결정에 반발하며 항고 절차를 진행하고 있어, 사건은 항고심과 상고심까지 계속될 가능성이 높다.
외교부는 18일 이의신청서의 내용이 정부의 공식 입장인지 묻는 말에 “절차가 진행 중인 상황에서 구체적인 내용을 언급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밝혔다.
이어 “정부는 강제징용 해법 취지에 따라 피해자의 원활한 피해회복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으며, 향후 항고 등 법적 절차를 통해 법원의 올바른 판단을 계속 구해나갈 예정”이라며 “향후 절차 진행 과정에서 법리에 충실한 변론을 진행해 나갈 예정이고, 역사 인식 등과는 관련이 없는 문제”라고 말했다.
앞서 외교부는 지난달 4일 정부의 공탁 신청에 대한 첫 번째 불수리 결정이 나오자 “공탁 공무원의 권한 범위를 벗어났다”고 강한 유감을 표명하며 “변제 공탁 제도는 원래 변제를 거부하는 채권자에게 공탁하는 것으로서, 그 공탁이 변제로서 유효한지 여부는 향후 재판 과정에서 판단될 문제”라는 입장을 즉시 밝혔었다.
silverpaper@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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