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 특별치안활동 무색한 ‘대낮 한복판 성폭행’... “인력 투입 만으론 부족”

이학준 기자 2023. 8. 18.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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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역에 집중 배치된 경찰…주거밀집지역은 ‘구멍’
”과거 인력 중심의 치안정책에만 몰두…패러다임 바꿔야”

18일 오전 11시 30분쯤 찾은 서울 관악산 등산로는 전날 발생한 강간상해 사건에도 불구하고 주민들 발걸음이 이어졌다. 이곳에서 도보로 15분 떨어진 곳에는 한 초등학교가 자리해 있었다. 등산로 초입에는 아파트와 주택 단지가 들어서 있어 부모와 함께 나온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장난을 치며 놀고 있었고, 그늘진 곳에는 노인들이 모여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사람들 발길이 닿지 않는 외진 곳이라기보단 언제라도 경찰력 투입이 필요할 정도로 유동인구가 많은 지역이었다.

이런 주거밀집지역에서 대낮에 여성이 성폭행을 당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시민들은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이곳에서 만난 주민 임모(60)씨는 신림역 흉기난동 사건까지 언급하며 “가까운 지역에서 사건이 연달아 벌어지니 불안하다”며 “사람들이 많이 사는 곳에서 이런 사건이 벌어졌다는 게 소름끼친다”고 했다.

잇단 흉기난동 사건에 경찰이 특별치안활동을 벌이며 단속에 나섰지만, 또다시 강간상해 등 강력사건이 발생하자 경찰의 치안능력에 의문부호를 다는 시민들이 많아지고 있다. 경찰이 칼부림 사건이 발생한 백화점, 지하철 등 다중운집 지역 위주로 인력을 투입한 결과 오히려 주거밀집지역은 후순위로 밀린 격이 됐다. 전문가들은 경찰이 경력을 대거 투입해 순찰만 강화하는 ‘인력치안’ 중심의 과거 해결책만 답습한 결과라고 분석한다.

18일 오전 서울 관악구 등산로 그늘막에 산책을 나온 주민이 더위를 피해 휴식을 취하고 있다. 이곳은 전날 여성이 성폭행과 폭행을 당한 사건이 벌어진 야산으로 통하는 공원 입구다./전병수 기자

◇ 지하철·백화점에 집중된 경력…주거밀집지역은 공백이었다

경찰에 따르면, 서울경찰청은 특별치안활동으로 관내 500여곳에 하루 평균 2000여명의 경력을 투입했다. 경찰은 지하철·백화점을 비롯한 주요 상권·유흥가 등 다중운집 지역 위주로 경력을 집중 배치했다. 지하철·백화점에서 발생한 흉기난동 사건을 모방하는 범죄를 예방하겠다는 취지였다.

하지만 경력이 일부 지역에만 몰리다 보니 다른 곳에 구멍이 뚫렸다. 전날 관악구의 한 공원과 연결된 야산에서 최모(30)씨가 여성 A씨를 성폭행하고 둔기로 폭행한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최씨는 경찰 조사에서 피해자를 성폭행하기 위해 손가락에 끼우는 금속 재질 둔기인 ‘너클’을 착용한 채 폭행했다고 진술했다. 너클은 여러 온라인 사이트에서 호신 용품으로 판매되고 있다. 경찰도 현장에서 너클 2개를 발견해 수거했다. 피해자는 병원에 이송됐으나 위독한 상태인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최씨가 공원까지 걸어간 뒤 범행 대상을 물색하고, 범행이 발각되지 않기 위해 폐쇄회로(CC)TV 설치가 어려운 야산에서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보고 있다. 최씨는 경찰에 “CCTV가 없다는 걸 알고 범행장소로 정했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경찰은 범행 발생일인 전날 이 지역에 특별치안활동 경력을 배치하지 않았다. 범행 현장 인근에는 아파트 단지가 여럿 들어서 있고 초등학교·어린이집이 모여 있는 주거밀집지역이지만, 특별치안활동이 흉기난동을 예방하기 위한 목적인 만큼 다중운집 지역 위주로 경력을 배치했다는 게 경찰 설명이다.

경찰 관계자는 “제한된 경력으로 서울의 모든 지역을 다 커버할 수는 없는 게 사실이자 현실”이라며 “선택과 집중을 할 수밖에 없다. 이번 사건은 안타깝지만, 특별치안활동 범주에 속한다고 볼 수는 없다”고 했다.

◇ 이번엔 공원·둘레길에 경력 배치?…”패러다임 완전히 바꿔야”

윤희근 경찰청장이 범죄예방에 총력을 기울이겠다는 대국민 담화를 발표한 지 2주 만에 강력범죄가 또 발생하자 시민들은 모든 곳이 범행 사각지대라며 불안해하고 있다. 이에 한덕수 국무총리는 이날 윤 청장에게 “112신고 및 강력범죄가 자주 발생하는 지역과 공원·둘레길 등 시민들이 자주 이용하는 장소에 대한 순찰을 대폭 강화하는 범죄예방에 총력을 기울이라”고 지시했다.

지난 4일 오후 경기 성남시 분당구 오리역에서 경찰특공대가 순찰을 하고 있다. 경찰은 ‘서현역 묻지마 흉기난동’ 사건 후 온라인 공간에서 또 다른 ‘오리역 살인예고’ 글이 작성돼 성남시 분당지역에 인력 98명을 긴급배치 했다./뉴스1

하지만 전문가들은 회의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다. 이번 특별치안활동이 단순히 경력을 투입하는 인력 중심의 과거 방식을 그대로 따라한 것에 불과해 범죄를 효과적으로 예방하지 못했는데, 또 다시 장소만 바꿔 순찰 강화를 요구한다면 똑같은 결과가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경력을 투입하는 것만으론 범죄예방 효과를 극대화할 수 없는 데다 특정 지역에 경력이 집중되면 다른 지역의 경찰력이 약화되는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특히 흉기난동 사건이 벌어진 뒤 지하철·백화점에 경력을 집중 투입하다가, 강간상해 사건이 벌어지자 이번에는 공원·둘레길에 경력을 배치하는 것은 땜질식 해결책밖에 되지 않는다는 설명이다.

이윤호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경찰의 범죄 예방 기능은 굉장히 제한적”이라며 “특정 지역에 경찰력을 집중 투입하면, 나머지 장소는 상대적으로 순찰 인원이 줄어든다는 소리다. 다른데 빼다 다른데 막는 식으로는 완전한 해결책이 될 수 없다”고 했다.

인력을 늘려 순찰을 강화하는 게 범죄예방에 효과적이지 않다는 주장은 수십년 전부터 계속돼 왔다. 1972년 미국에서 진행된 ‘캔자스시 예방순찰 실험’이 대표적이다. 연구진은 캔자스시 남부순찰구역을 ▲순찰 횟수를 2배 늘린 곳 ▲순찰 횟수를 평상시처럼 유지한 곳 ▲순찰 횟수를 절반으로 줄인 곳으로 분류하고, 1년 동안 범죄율을 살펴봤으나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경찰관이 많고 순찰을 늘려도 범죄가 줄어들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오세훈 서울시장이 18일 오후 성폭행 사건이 일어난 서울 관악구 신림동 소재 야산 등산로를 찾아 근처 CCTV 위치를 확인하고 있다./뉴스1

한국 경찰도 일찍이 이러한 점을 받아들여 도로 곳곳에 설치된 CCTV를 들여다 보며 범죄 발생 여부를 확인하는 ‘화상순찰’을 실시하고 있지만, 서울 내 설치된 CCTV만 9만대가 넘을 정도여서 완벽한 방안은 아니라는 목소리가 나온다. 또 우범지역에 조명을 설치하고, 사람들 시선이 닿지 않는 사각지대를 없애는 등 범죄를 억지할 도시 환경을 만드는 ‘셉테드’(CPTED)도 지속 추진해 왔지만, 아직 효과를 볼 수 있을 단계는 아니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전문가들은 연이은 강력사건을 막지 못한 원인을 경찰의 치안능력 부족으로 돌리기보단,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꾼 새로운 치안정책을 내놔야 한다고 보고 있다. 이웅혁 건국대 경찰학과 교수는 “옛날 방식으로만 치안대책을 내놓고 있기 때문에 이런 사건이 우후죽순 터지는 것”이라며 “정부가 치안대책의 패러다임 자체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미국이 대통령 산하 범정부위원회를 꾸려 대안을 제시했던 것처럼 한국도 여러 기관의 협업을 통해 종합적인 대책을 내놔야 한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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