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연의 책과 지성] "우리는 무적함대의 깃털을 하나씩 뽑았다" 승리는 기술이 결정한다고 주장한 역사학자
"그들의 힘은 대단했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의 깃털을 하나씩 뽑았다."
16세기 말 스페인 무적함대를 무찌른 영국 지휘관 하워드 경이 남긴 말이다. 이 해전에서 승리하면서 유럽의 변방에 불과했던 영국은 세계사에서 주도 국가로 올라선다. 만약 스페인이 영국 상륙에 성공했다면 세계사는 완전히 다르게 쓰였을 것이다.
개전 초기 영국은 스페인에 비해 모든 면에서 열세였다. 무적함대는 배 124척에 병력 2만7000명을 태우고 원정길에 나선 반면, 영국 해군은 배 64척에 병력 8000명이 전부였다. 부자 나라였던 스페인은 군함도 크고 웅장했으며 엄청난 화력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영국은 어떻게 스페인 무적함대를 무찌를 수 있었을까. 전쟁의 승패를 가른 건 전술이나 사기가 아닌 기술이었다.
월등한 화력으로 함포를 퍼부어 적의 혼을 빼놓은 다음 갈고리로 배를 연결해 적함에 병력을 투입하는 방식이 스페인의 전술이었다. 그러나 이번엔 통하지 않았다. 영국 배들은 스페인의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아니, 들어갈 필요가 없었다. 영국이 개발한 함포의 사정거리가 더 길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영국 함포에는 바퀴가 달려서 방향을 쉽게 바꿀 수 있었다. 여기서 게임이 끝났다. 아무리 큰 배도, 많은 병력도 기술의 진보 앞에서는 이빨 빠진 맹수였을 뿐이다. 미국 외교위원회 국가안보 분야 선임연구원을 지낸 맥스 부트는 자신의 책 'Made in War'에서 결국 전쟁의 승패는 기술이 갈랐다고 단언한다.
2차 세계대전 초 일본에 치명적인 일격을 당한 미군이 급반전에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도 기술적 차이였다. 미국은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 선단 상당수를 잃은 데다 유럽에서도 전쟁을 해야 하는 사면초가의 상황이었다. 하지만 미국에는 기술이 있었다. 전황을 반전시킨 일등공신은 B29 폭격기였다. 보잉에서 개발한 이 폭격기는 기존 폭격기에 비해 3배 이상 폭탄을 적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대단한 건 2600㎞에 달하는 전술 반경이었다. 이것은 곧 미국이 사이판이나 티니언만 확보하면 도쿄를 공습할 수 있다는 걸 의미했다. 결국 B29는 일본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 본토에 원폭을 투하한 비행기 역시 B29였다. 부트는 전쟁사를 기술 진보로 설명한다. 찬란한 문명을 보유했던 아시아와 중동 국가들이 유럽에 패권을 내준 결정적인 원인은 화약이나 소총, 대포 제작 같은 기술에서 밀렸기 때문이었고, 걸프전이나 이라크전에서 미국이 이길 수 있었던 것도 스마트폭탄, 크루즈 미사일, 위성항법장치, 스텔스 기술 때문이었다는 설명이다.
15세기까지만 해도 유럽인들은 '몽골'이라는 말만 들어도 벌벌 떨었다. 그들의 전술과 용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유럽의 기술 앞에서 몽골의 전술과 용기는 옛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빅 히스토리로 보면 그렇다.
[허연 문화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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