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 속 정치의 부재, 그래서 대안은 어디 있나[위근우의 리플레이]

기자 2023. 8. 18.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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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무너진 세상, 우뚝 남은 전체주의…반대편엔 겨우 ‘선한 믿음’ 뿐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원인불명의 지진과 이상 기후 속에 홀로 무너지지 않은 아파트라는 흥미로운 설정 안에서 재난을 대하는 이들의 군상극을 재현한다.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 초반, 극의 분위기가 반전되는 서사적 이벤트 직전 아주 짧은 풍자극이 벌어진다. 원인 불명의 지진으로 근처 모든 건물이 무너지고, 오직 홀로 건재한 황궁 아파트의 주민들은 자신들에게 의탁 중인 이웃 드림팰리스 주민들을 포함한 외부인을 내쫓기로 결정한다. 엄동설한에 밖에 나가게 된 외부인들이 따지거나 선처를 바라는 중에 웬 남자가 거드름을 피우며 나선다. 지역구 국회의원임을 밝힌 그는 모두가 힘을 합쳐야 한다는 원론적이지만 하나 마나 한 말을 하며 은근슬쩍 지배력을 행사하려 하지만 황궁 아파트 주민대표인 김영탁(이병헌)에게 저지당하고, 발끈한 의원 보좌관은 영탁과 멱살잡이를 한다. 결국 황궁 아파트 주민과 외부인들은 물리적으로 충돌하고 전자가 승리하며 외부인들은 쫓겨 나간다. 재난 상황에서 불거질 수 있는 가장 첨예한 대립 구도를 초반부터 폭발시키는 와중에 국회의원 캐릭터의 존재감은 너무나 미미하지만 그 역할은 명확하다. 주권 국가에서의 정치적 권력을 상징하던 인물이 공적 토대가 무너진 상황에서 폭력을 점유한 세력의 대표자에게 좌절당하고 주도권을 넘겨줬다는 것. 타의에 의해 주민 대표가 됐던 영탁은 이 사건 이후 아파트 안에서 막강한 권력을 획득한다. 지진이 물리적 재난이라면, 국회의원으로부터 영탁으로 권력이 넘어가고 황궁 아파트의 자치가 시작되는 건 국가 부재 상태에 대한 선언이다. 그럼에도 정치인에 대한 재현 방식엔 의문이 남는다. 세상이 망하고도 거만한 정치인과 그 와중에도 의전을 챙기는 보좌관이라는 스테레오타입은 풍자 코미디로서도 구태의연하다. 우려 어린 시선으로 정치의 부재를 재현하지만, 또한 정치인의 얼굴을 한 머저리를 통해 어떤 정치적 시도를 어림없는 헛짓거리로 그려낸다. 이 짧지만 인상적인 접근은 이후 작품 안에서 끊임없이 이율배반을 일으킨다. 범박하게 요약해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정치의 부재로 벌어지는 잔혹극을 통해 비판적 전망을 제시하려 하지만, 정치가 부재할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그려내느라 정치적인 전망 자체가 부재한 작품이 되어버렸다.
 
잘 만든 포스트 아포칼립스 영화는 가상의 재난 상황을 그 자체의 상상력으로 납득시키는 동시에 동시대에 대한 은유로서 풍부한 해석의 맥락을 제공한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그런 면에서 분명 흥미로운 작품이다. 원인불명의 지진과 이상 기후 속에 홀로 무너지지 않은 아파트라는 흥미로운 설정 안에서 재난을 대하는 이들의 군상극을 핍진하게 재현하는 와중에 부동산과 계급, 난민 문제, 능력주의, 전체주의의 기원 등 다양한 은유를 그 안에 상당히 효과적으로 중첩시킨다. 평소 자신들을 괄시하던 드림팰리스 주민들에 대해 질투심을 느끼던 황궁 아파트 사람들이 세상이 망한 와중에 우리 아파트가 최고라는 자부심을 드러내는 모습에선 아파트 브랜드를 통한 계급 나누기를, 우리의 거주지에 들어온 타자를 어떻게 대해야 하느냐는 질문에선 난민 문제를, 공동체에 기여한 만큼만 배급하는 비례성의 원칙에선 능력주의로 환원된 공정 개념을 떠올리기란 어렵지 않다. 무엇보다 외부인을 쫓아내는 활약으로 아파트에서 엄청난 권력을 행사하게 된 영탁이 조금씩 아파트 내의 다른 목소리를 침묵시키고 김민성(박서준)처럼 비교적 선량한 소시민마저 집단적 광기에 잠식되는 모습은 전체주의의 불길한 풍경을 재현한다. 좀 더 정확히 말해 이 시대가 이미 누적하고 있는 여러 악덕과 모순이 어떤 계기를 만날 때 전체주의의 망령이 부활할 수 있는지 탐구한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변곡점이 앞서 말한 정치의 부재다.

국회의원 권력 상실·아파트 자치
인간 본능 그린 재난물의 진일보
전체주의 디스토피아 보여주지만
선역, 대안 없이 ‘인간성’ 호소만
기존 질서에 기댄 악역 축출 결말
일상적 무력감, 재난물 효용 다해
‘인간답게 사는 법’ 각본 필요한 때
재난 이후 주민들에게 비로소 최고라는 자부심을 안겨준 황궁 아파트.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풍부한 해석의 맥락으로나 매 순간 세공하듯 연출한 유려한 만듦새로나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오징어 게임>과 이후 등장한 <지옥> <지금 우리 학교는> 등의 넷플릭스 디스토피아 시리즈보다 높은 완성도를 보여주지만, 무엇보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이들 작품과 구분해주는 건 인간의 생존본능을 즉물적으로 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황궁 아파트 사람들도 자원의 부족 앞에서 외부인을 내쫓고 폭력을 행사하는 집단 이기주의를 보여준다. 하지만 그들의 진정한 타락은 영탁의 꽤 성공적 영도 아래 스스로의 사유와 정치적 행위를 포기하는 순간 벌어진다. 즉 기존의 디스토피아 재현에서 문명을 벗어난 인간이 반사적으로 추악한 본색을 드러낸다면,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선 인간성을 지킬 수 있는 작은 가능성을 남기되 정치의 부재로 그 일말의 가능성이 지워지는 과정이 그려진다. 이 차이는 매우 큰데, 전자에서 인간의 조건이 외부 요인에 종속되어 필연적으로 무너진다면 후자에선 스스로의 정치적 기획과 실천으로 인간의 조건을 지키거나 재건할 수도 있는 것이다. 세상이 문자 그대로 무너졌을 때조차.
 
하여 어떤 의미로든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진일보한 한국형 재난물이다. 극한 상황에서의 지옥도를 재현한다는 점에선 기시감이 느껴지지만, 정치의 부재라는 맥락을 기입하며 영화는 역설적으로 정치의 필요에 대한 전망을 남긴다. 하지만 바로 이 지점에서 영화는 기존의 디스토피아 재현의 한계를 비슷하게 반복한다. 재난 이후 생존을 우선에 두며 했던 황궁 아파트 주민들의 선택들이 어떻게 차곡차곡 쌓여 전체주의적 사회가 만들어지는지, 작품은 세심히 쫓는다. ‘아파트는 주민의 것’이라는 심플한 구호 아래 외부인을 바퀴벌레로 규정하고 영탁 휘하의 방범대가 외부인을 숨겨준 가구를 징벌하고 문 앞에 표식을 칠하는 장면은 노골적으로 나치의 유대인 색출을 모사한다. 문제는 전체주의적 기획이 구체적인 구호와 선동, 생존에 대한 성공의 경험으로 응집되는 반면, 명화(박보영)와 도균(김도윤) 등 인간의 선함을 대표하는 인물들은 인간된 도리에 대해 호소할 뿐 현재의 전체주의적 사회를 대체할 정치적 공동체에 대한 기획을 제안하지 못한다. 기존의 작품들이 인간이 바닥을 보여줄 환경에 인물을 던져 바닥의 인간을 자연스레 도출하는 데 그치며 과연 우리에게 어떤 도덕적 선택이 가능했을지 제시하지 못한다면,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전체주의가 발아할 정치 부재의 상황으로 밀어 넣고 그 지옥도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되 과연 정치가 실제로 어떤 가능성을 열어줄지에 대해선 완전히 침묵한다. 철학자 모리스 메를로퐁티의 표현을 빌리면 “정치가 정치로 남기 위해서는 질서에 대한 새로운 단어들을 가져야 하고, 스스로 현실적인 정당성을 발견해야 하며, 현존하는 세력들 속으로 비집고 들어가야 한다.” 너무 엄혹한 요청일까. 하지만 방범대가 바깥에서 약탈하듯 가져오는 자원 자체는 거부하지 못하면서 민성에겐 방범대에서 빠지라는 명화의 바람은 인간적이되 공동체의 새로운 질서로 입안되기엔 너무 허약하다.

엄태화 감독은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재난영화에 나오는 정의롭고 이타적인 캐릭터는 너무 답답하게 느껴지는 경우가 많지 않나. 명화 역시 언뜻 보면 그런 캐릭터 같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되레 개인의 욕망이 강한 사람임을 표출한다”고 밝혔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 한국 재난물에 대한 자백처럼도 보인다. 이들 작품 다수는 종종 악의 평범성을 묘사하는 데는 성공하지만 선의 입체성과 우월함에 대한 묘사는 실패하거나 아예 관심이 없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엄태화 감독의 말처럼 선역으로서의 명화에게 캐릭터의 입체성과 능동성까진 부여했지만, 그가 견지하던 인간에 대한 믿음과 도리는 어떠한 정치적 비전도 만들어내지 못한다. 명화가 영탁의 지배에 균열을 내는 건, 그가 실은 아파트 주민이던 진짜 영탁(박종환)을 죽이고 그 자리를 차지한 외부인이라는 사실을 밝히면서다. 즉 ‘아파트는 주민의 것’이라는 질서에 기대 영탁을 축출한다. 때마침 쫓겨났던 외부인들이 습격하며 황궁 아파트의 체제는 모래성처럼 무너지고 영화는 이 파국을 마치 전체주의의 예정된 수순처럼 연출하지만, 사실 이 파국은 명화의 활약과 영탁 축출 이후에도 황궁 아파트엔 기존의 질서가 그대로 남았을 거라는 불편한 진실을 가리기 위한 서사적 테크닉에 가깝다. 같은 이유로 아파트에서 탈출한 명화가 폐허에서 만나 의탁하게 되는 코뮌은 최소한의 희망적 엔딩을 위한 장치일 뿐 실제로 재난 너머 인간의 조건을 보여주진 못한다.

위근우 칼럼니스트

코뮌은 황궁 아파트가 포기한 가능성의 어떤 경로가 닿았을지 모를 이상향이지만, 그들의 정치가 어떻게 실현될 수 있었는지 그것의 체제적 우월성은 어디 있는지에 대해 영화는 무기력하게 관객의 상상에 맡긴다. 여기서 다시 그 우스꽝스럽던 정치인의 얼굴이 떠오른다. 정치가 삶에 대한 유의미한 각본을 더는 제공해주지 못한다는 실망과 무력감이 누적될수록 정치는 냉소의 대상이 되고 궁극에는 정치의 부재가 대안이 된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이런 불길한 분위기를 비판적 관점으로 담아내지만 또한 영화의 매 순간 정치 불능에 대한 무력감이 경험된다. 가장 진일보한 형태의 한국형 재난 영화인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그래서 어쩌면 이제 더는 재난물이 효용을 가질 수 없다는 증명처럼 보인다. 정치적 무력감이 일상화된 시대에 “이러다 다 죽어”라는 <오징어 게임>의 경고는 아무런 반향도 일으킬 수 없다. 이제는 어떻게 인간답게 잘 살 수 있을지에 대한 각본이 필요하다. 그것이 지금 그 어느 때보다 예술적 상상력에 요구되는 것이다.

위근우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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