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이 써지고, 비로소 근대가 열렸다
법은 국가와 함께 존재했지만
성문 헌법은 18세기에나 탄생
전쟁과 폭력 '총'의 시대 거쳐
국가 지탱하는 힘 '펜'으로부터
헌법, 재발견되고 재평가돼야
청나라 말기 사상가 캉유웨이(康有爲)는 고국에서 추방당해 떠도는 방랑자 신세로 1908년 오스만 제국의 심장 이스탄불에 도착했다. 러시아와 영국이 자국 영토 마케도니아를 장악하자, 정부의 무능에 불만이 생긴 오스만 제국 군대가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의회의 부활과 1876년 발표됐다 철회된 최초 성문 헌법의 복원을 외쳤다. 헌법이 복원된 7월 27일 이스탄불에 도착한 그는 반달 깃발이 나부끼는 광장에서 술 마시고 춤추는 인파에 크게 놀라 이렇게 썼다.
"모든 나라에 헌법이 있습니다. 오직 튀르키예만이 그것을 선언해놓고 폐지하는 바람에 국민이 만족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군인들의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근대를 발아(發芽)시킨 촉매에 관한 가설은 오늘도 그 목록을 늘려가는 중이다. 제목부터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를 연상시키는 이 책에서 프린스턴대 역사학과 린다 콜리 교수는 헌법이 근대 세계를 탄생시켰다는 가설을 제시한다. 이 책은 헌법이 어떻게 장대한 혁명을 촉진하고 백인 남성에게 참정권을 부여했을 뿐 아니라, 기나긴 19세기에 걸쳐 토착민을 주변화하고 여성과 유색 인종을 배제하며 토지를 몰수하는 데 사용되었는지 파헤친다. '총'이 사용되는 전쟁은 국경의 '선'을 흔든다. '펜'으로 적어내려간 헌법이야말로, 그 국가를 지탱하는 보루다.
법은 국가의 탄생과 함께 존재했다. 중동 메소포타미아 통치자 함무라비의 법전을 새긴 석판은 기원전 1750년 이전부터 존재했다. 그리스 도시 국가도 기원전 7세기 정부 규정을 마련했다. 그러나 이런 고대 문헌은 단일 인물의 작품이었다. 권력자에게 제약을 가하거나 개인의 권리를 보장하는 대신, 행동 수칙 제시와 처벌에 치중했다.
1755년 코르시카는 선구적 헌법을 제정했다. 이 시기 섬에 도착한 파스콸레 파올리는 나폴리로 강제 추방된 반군 지도자의 아들이었다. 고향으로 귀환 당시 30대의 진급 가망이 희박한 군인이었다. 군사적 기량이 뛰어났던 그는 코르시카에서 반군 총사령관에 선출됐다. 11월 요새 도시 코르테에서 그는 이탈리아어로 10쪽의 헌법 초안을 작성했다.
"코르시카의 적법한 주인으로서 국민의 의회가 소집되었다"고 선언한 조각난 말 속에는 급진적인 정치적 변혁의 열망이 담겨 있었다. 이 종이는 파올리에게 엄청난 권력을 부여했다. 정치, 군사, 경제 문제를 책임지는 3개 기구로 구성된 국가평의회 의장에 올랐다. 1766년부터 법에 따라 25세 이상 남성들은 의원 선거 출마·투표 자격을 부여받았다. 18세기 세계의 어느 곳보다 폭넓은 민주주의가 이 섬에 안착한 것이다.
성문 헌법의 부상은 1776년 미국 독립 혁명, 1789년 프랑스 혁명이 도화선이 됐다. 18세기는 가히 폭력과 전쟁의 시대였다. 봉기와 혁명이 들불처럼 번져가면서 공화주의의 부상 및 군주제의 쇠퇴가 이뤄졌고, 국가를 지탱한 요새가 필요했다. 전쟁이 촉발한 위기로부터 정권들은 정부 질서의 재정비를 위한 수단으로 헌법을 사용했다. 광범위한 지지를 끌어모으고 재정적·인적 수요를 정당화하는 문서를 이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막스 베버는 독일에서 군사 훈련의 확대 필요성이 어떻게 불가피하게 '민주주의의 승리'를 가져왔는지 강의했다. 그에 따르면 한 국가의 남성들은 세금과 징병을 수락한 대가로 선거권 부여 등의 권리를 부여받았다. 19세기 중반 이후 유럽과 북미뿐 아니라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도 병역을 의무화함과 동시에 성인 남성에게만 선거권을 부여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1차 세계대전 당시까지도 여성에게 선거권을 부여하지 않은 건 여성이 군사 훈련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저자는 성문 헌법이 사고와 문화적 관행에도 영향을 끼쳤음에 주목한다. 인쇄술의 발전도 영향을 끼쳤다. 1787년 필라델피아에서 초안이 작성된 미국 헌법을 세상 물정에 밝은 출판업자들이 앞다퉈 출간하고, 다른 여러 국가의 헌법과 묶어 발행하기 시작했다. 인쇄술 덕분에 각국의 헌법은 널리 유포됐고, 헌법 초안 작성가들은 여러나라의 사상, 제도, 법률을 연구하고 자신들의 사상, 관습과 결합할 수 있었다.
헌법 저술가들은 군주와 정치인, 법조인만 있지 않았다. 장교, 은행업자, 성직자, 의사, 언론인은 물론 과거의 노예도 존재했다. 태평양의 작은 섬 핏케언이 세계 최초로 여성 참정권을 영구히 부여한 것도 놀라운 일이다. 미국 헌법의 틀을 짜기 수십 년 전에 계몽적 색채의 나카즈(Nakaz·훈시)로 헌법 기술을 실험한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여제 같은 인물도 있었다. 이 책은 1889년 일본 메이지 헌법이 인도, 중국, 오스만의 민족주의자 및 개혁가들에게 서구 헌법주의와 어깨를 겨루는 모범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는지도 설명한다. 저자는 "헌법은 오류를 면치 못하는 인간이라는 종이 창조한 취약한 창조물"이라면서도 "어떤 단일 서적도 이토록 큰 야심을 품을 수 없다"고 단언한다. 동시에 헌법은 소설처럼, 어느 장소와 거기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창조하고 들려준다고 설명한다. 저자는 "언제나 법과 정치의 영역을 뛰어넘었던 헌법은 재발견, 재평가되어야 한다"며 다시 읽기를 권유한다.
[김슬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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