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척돔구장, 히어로즈 그리고 임영웅’ 체육행정가 시인 이병진 첫 시집 ‘나는 폭이 없는 길을 간다’ [인터뷰]
이병진 시인은 2022년 ‘월간문학’ 신인작품상을 통해 등단했으며 대한체육회에서 생활체육본부장, 훈련본부장, 사무부총장을 역임하고 현재는 업무자문관으로 근무 중이다. 이 시인의 시집출판이 더욱 주목을 받는 것은, 체육단체에서 체육행정을 하는 직원이 시집을 발간하는 일이 드문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시인은 지난 40여 년 간 틈틈이 작품을 써왔으며, 이 중 98편을 엄선해 이번 시집에 수록했다. 총 5부로 구성·편집된 시집에는 특히 스포츠를 소재로 한 스포츠 시들이 다수 담겨있어 눈길을 끈다. 축구, 야구, 양궁, 씨름, 사격, 팀코리아 등 19편의 시는 시인의 눈으로 스포츠의 묘미를 재해석했다는 점에서 무척 흥미롭다.
시집에는 계절과 인생을 다룬 감각적인 시, 가수 임영웅과 키움 히어로즈를 절묘하게 조합한 시, 일상에서 포착해 낸 철학적이고 서정적인 작품, 군 장병들의 애환과 호국 의지를 다룬 병영시, 고향의 아련한 향수를 그려낸 다양한 자전적 작품들이 포함돼 있다.
시집의 해설을 맡은 이우근 시인은 “이병진 시인의 자세는 끝없는 소환과 반추, 돋보기와 망원경, 성찰과 전망”이라고 했으며, 나태주 시인은 “이병진 시인의 일생 회고록이면서 자서전”이라고 평을 하고 ‘감꽃’을 가장 아름다운 시로 추천했다.
중견시인 김왕노는 “황량한 삶의 질곡에 내리는 푸른 비와 같다. 삶이라는 씨줄과 날줄로 엮어낸 이병진 시는 섬세한 질감이 살아있고, 현실을 부둥켜안는 따뜻함이 있다”고 응원했다.
- 첫 시집 출간을 축하드립니다. 스포츠와 관련된 시가 포함된 굉장히 유니크한 시들이 다수 수록되었는데요. 시집을 출간하시게 된 계기와 과정이 궁금합니다.
“시집을 출간하는 것은 시인의 책무라고 봅니다. 그리고 그 시집을 통해 독자들로부터 평가를 받는 것은 시인의 숙명입니다. 이번 시집에는 총 98편의 시가 담겨있습니다. 일반적인 시집보다는 꽤 많은 작품이 수록되었습니다. 총 5부로 구성했는데, 1부는 일상에서 관찰한 내용을 작품화한 것들이고, 2부는 서정적인 시, 3부는 스포츠를 주제로 한 시, 4부는 고향에서의 추억과 회상 등을 다뤘습니다. 마지막으로 5부는 군 장병들의 애환과 호국 의지 등을 다룬 이른바 병영시를 담았습니다. 다소 이질적인 시들을 조합한 독특한 시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시들 하나하나에는 제 삶이 투영되어 있습니다. 관념적인 시가 아니라 일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자서전과도 같은 작품입니다. 국민 시인인 나태주 선생님께서도 추천의 글을 통해서, ”이 시집은 시인의 자서전“이라고 평가를 했습니다. 특히 이번에 수록된 스포츠시들은 제가 체육인으로 살아오면서 꼭 담고 싶은 작품들이었습니다.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죠. 한편, 군 장교 시절에 쓴 병영시는 이번에 수록하지 않으면 영원히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수 없을 것 같아 담았습니다. 병영시도 요즘 흔하게 볼 수 없는 시라는 점에서 독자들의 눈길을 끌 것으로 생각합니다.” - 실제로 스포츠계에서 오랜 기간 일하고 계시는데요. 같은 스포츠와 관련된 상황이라고 해도 현장 실무자의 시각과 시인의 눈으로 보실 때가 다르셨을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경우가 있을까요.
“제가 보는 스포츠는, 그것도 하나의 예술이라고 봅니다. 시는 글로 표현해내는 예술이고, 스포츠는 몸으로 표현해내는 예술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100m 달리기를 하는 건각들의 모습은 그 자체가 예술입니다. 문장으로 표현해낼 수 없는 엄청난, 어쩌면 우주의 모든 기(氣)가 모여 있는 예술이랄까요. 승패를 떠나 아름답다는 생각을 합니다. 체육인의 입장에서는 시합이 얼마나 공정한가, 부정선수는 없는가, 왜 기록이 저조할까, 지도자들의 훈련방법에 문제가 있었는가, 훈련지원이 부족했는가, 국제대회에서 메달을 획득할 수 있을까 등등 행정적인 측면에서 바라보게 되죠. 그런 점에서 체육인과 시인의 시각은 출발점부터 달라집니다. 스포츠는 스포츠 외의 조건을 따지지 않고 온전하게 감상할 때 진정한 묘미를 느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선수 자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스포츠를 스스로 즐길 때 기록이 단축되고 훈련의 효율성도 높아지고, 관중들의 환호성도 더 커질 것입니다. 제가 시집 제3부에서 스포츠를 주제로 한 시를 수록하면서 ‘호모루덴스의 자가당착’이라고 소제목을 붙였습니다. 이는 ‘유희적인 인간’, ‘놀이하는 인간’이 놀이를 즐기지 못하고 경쟁에만 매달리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에서 그랬던 것입니다.”
- 지난해 등단을 하셨습니다. 시인에 대한 꿈은 언제부터 키우셨는지요.
“지난해 월간문학 신인작품상으로 등단했습니다. 월간문학은 60년 이상 된 문학계에서는 매우 권위있는 문학지입니다. 이런 문학지를 통해 등단하게 된 것은 글 쓰는 사람으로서 영광이죠. 아직도 문학적 성장판이 열려 있다고 믿어주신 심사위원님들이 고마울 따름입니다. 또한 고등학교 때 문예반에 들어가면서 꿈꿔 온 등단을 40년 만에 이뤄냈다는 것이 그저 기쁘기도 하고요. 사실 그동안 창작의 끈은 계속해서 쥐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등단을 해야겠다는 생각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음만큼 펜이 따라주질 못했습니다. 현업에 바쁘다 보니 대놓고 창작 활동을 할 여력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드문드문 한 편씩 만들었는데, 그게 어느덧 기백편 되었습니다. 20~30대에 쓴 작품 중 상당수는 이래저래 흩어지고 분실되고 없어졌습니다. 그게 무척 아쉽습니다. 이왕 시집을 냈으니 이제 더 열심히 창작해야죠. 그게 문인의 길을 걷도록 배려해 주신 분들에 대한 예의이자, 꿈을 매달고 달려온 제 영혼에 대한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 이 시인께서는 군에서 장교로 복무하신 이력이 있습니다. 소령으로 퇴임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번 시집에 보면 군 장병에 대한 시도 담겨 있는데요. 군 시절에도 시를 쓰셨던 건가요.
“저는 ROTC 장교로 임관하여 13년 가까이 군복을 입고 있었습니다. 서부전선과 동부전선, 특전사, 교육부대 교관도 했었고요. 국군체육부대 공보실장을 하면서 스포츠와 인연을 맺었고, 마지막으로 9사단 정훈공보참모로 재직했습니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군복을 벗었습니다. 사고를 치거나 진급에 누락되어 전역한 것은 아니고요. 체육관련 단체로 이직할 기회가 생겨서 과감하게 인생진로를 바꿨습니다. 제가 군에 몸담고 있으면서 가장 많은 작품을 창작한 시기는 초급장교 때였습니다. GOP부대에 순찰을 하거나, 비무장지대를 바라보면서 불쑥불쑥 떠오른 영감은 바로 작품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때 연필로 쓴 작품들은 부대를 옮기면서 대부분 분실되었습니다. 대위 때는 당시 1군사령부에서 주최한 무궁화문예전에서 대상을 받기도 했었습니다. 제가 군생활을 할 때와 지금의 병영문화 또는 환경이 많이 바뀌었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국의지나 평화통일에 대한 염원은 지금도 바뀔 수 없는 우리민족의 숙원이 아니겠습니까. 제 시가 국군장병들의 가슴에 조금이나마 닿을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 시집의 제목 ‘나는 폭이 없는 길을 간다’가 눈길을 끕니다.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 제목인가요.
“‘나는 폭이 없는 길을 간다’라고 하니 폭이 없는 길을 어떻게 가냐고 사람들이 묻습니다. 당연하죠. 물리적으로 갈 수 없는 길이니까요. 기하학의 아버지 유클리드가 “선은 폭이 없는 길이(length)이다”라고 정의했습니다만, 저는 길(road)을 간다고 제목을 붙였습니다. 폭이 없는 길은 사유가 만들어낸 길입니다. 세상의 모든 길은 사유의 프리즘을 통해 열리기 때문이죠. 생각을 닫고 있으면 길은 생기지 않죠. 생각을 드러내지 않으면 소통이 되지 않고 급기야 갈등이 생기죠. 폭이 없는 길은 사유가 만들어낸 선(線)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직선이 될 수도 있고 곡선이 될 수도 있겠죠. 직선이든 곡선이든 그 폭이 없는 길은 보이지 않는 길입니다. 독자들이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겁니다. 저는 그동안 가보지 않았던 길을 향해 인생 후반을 가보려고 합니다. 곧 제가 가는 그 길은 인생이 만들어낸 또 하나의 역사가 될 수도 있겠죠. 시집 해설을 맡은 이우근 시인이 ‘무량(無量)의 폭이라서 폭이 없는 길’이라고 한 것과 일맥상통합니다.”
- 흔히 사람들은 멋진 경기 모습을 볼 때 “예술이다!”라는 탄성을 지르곤 합니다. 이 시인께서는 이와 같이 스포츠의 예술성에 대해 일찌감치 주목하셨던 것 같습니다. 시를 통해 대중들이 스포츠에 대한 생각, 시선 등이 바뀌거나 더 깊어질 수 있을까요.
“시 몇 편으로 대중들이 스포츠에 대한 생각과 시선을 갑자기 바꿀 것이라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포츠시를 읽으면서 스포츠에 대해 흥미를 갖는 사람들이 분명 생길 것으로 봅니다. 스포츠마니아들에게는 그 종목에 대한 애정이나 깊이를 더해 줄 것으로 기대합니다. 그게 문학의 힘이니까요. 문학적인 수사를 통해, 스포츠에 대한 철학적 해석, 스포츠에 대한 형상화를 꾸준히 한다면 종목의 저변확대로 이어지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누군가는 저처럼 스포츠를 문학적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시도를 할 것입니다. 그런 작업들이 모여 스포츠는 더 친밀해지고 더 일상 속으로 파고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 비인기종목은 언론에 노출되기 쉽지 않고, 선수층 저변이 약합니다. 이런 종목을 문학적 소재로 다룬다면 아무래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 주로 시상은 어떻게 얻으시는지요. 그리고 시는 언제 쓰시는지요.
“나태주 선생님 말씀처럼 시는 억지로 짜내서 쓰려면 독자들의 공감을 얻을 수 없다고 봅니다. 문득 영감이 떠올라서 자연스럽게 써야 매끄러워집니다. 탁월한 문학적 재능을 가진 분임에도, 암호 같은 문장을 엮어 관념시를 쓰곤 합니다. 또 어떤 분은, 언어적 유희로 작품을 만들어 냅니다. 이건 시를 위한 시라고 봅니다. 저도 그런 부분이 어느 정도 있습니다만, 이것을 뛰어넘는 것은 모든 시인의 숙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저는 대중교통을 이용하거나 길을 걸을 때, 뭔가 떠오르는 단어나 문구가 있으면 메모합니다. 요즘은 스마트폰 메모 기능이 좋아서 아주 편리합니다. 좋은 책을 읽다가 깜찍한 단어가 보이면 그 또한 메모를 하고요. 그 메모가 상상의 나래를 달고 한편의 시가 되는 겁니다. 느낌이 오면 메모를 하다가 바로 초안까지 완성하기도 하고요. 원고 다듬기나 퇴고는 잠자기 전에 주로 합니다. 가장 효율이 좋더라고요. 새벽에 눈 뜨자마자 갑자기 마음이 동해서 시 쓰느라, 출근이 늦은 적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서재가 따로 있음에도 안방 침대 옆에 간이 책상을 또 만들어 놨습니다. 언제든지 벌떡 일어나 시를 쓸 수 있는 준비를 해뒀습니다. ㅎㅎㅎ”
- 스포츠 업계 종사자로서, 그리고 시인으로서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합니다.
“앞으로도 시인의 길은 계속 갈 것입니다. 지금부터 2집을 준비해서 2년 후에는 새 작품을 선보일 계획입니다. 가장 역점을 두고 있는 것은 스포츠 각 종목들을 대상으로 한 편씩 시를 남기는 것입니다. 그것은 지금껏 그 누구도 하지 않은 도전입니다. 저는 단순히 그 종목을 표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종목을 모티브로 하여 새로운 메시지를 던지는 작업을 할 것입니다. 문인이 아닌 체육인으로서 체육계에서 일정한 역할을 계속 맡고 싶습니다. 저도 이제 2년 후면 대한체육회 직원으로서 은퇴를 해야 합니다. 사무부총장까지 역임했으니, 제가 그동안 경험한 것들과 체육행정 지식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습니다. 체육계 발전을 위해, 제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부분에 작으나마 봉사를 하고 기여하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그 역할이 무엇이 될지는 좀 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양형모 기자 hmyang030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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