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자 어디가] 자네, 오지 중의 오지 영양으로 오지?

박찬은 시티라이프 기자(park.chaneun@mk.c 2023. 8. 18. 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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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나무와 별이 있는 오지, 영양 여행①
별 볼 일 만나러 간 영양에서 얻은 힐링

영양 죽파리자작나무숲[사진=영양군청]
“영양에 없는 세 가지가 뭔지 아세요? 4차선 도로, 고속도로, 철도입니다.” 해설사의 말대로 삼재(전쟁, 역병, 재해)가 미치지 않는다는 경북 3대 오지 ‘BYC(봉화, 영양, 청송)’ 중 하나인 영양은 ‘영양서 초보 떼면 베테랑 된다’고 할 정도로 악명 높은 꼬부랑 고갯길을 자랑한다. 그러나 조지훈과 이문열을 고향으로 계속 불렀을 영양의 은하수와 반딧불이는 계속해서 사람들을 이곳으로 오게 만든다. 자작나무숲, 무려 국제밤하늘보호구역이 있는 아름다운 오지, 영양으로 떠났다.
밤하늘 보호구역이 있는 영양군 수비면에선 캠핑장 한편에서도 별이 쉽게 보인다[사진=영양수비별빛캠핑장 제공)
선바위와 서석지의 낭만
1,000m가 넘는 산군들을 아무렇지 않게 어깨에 둘러메고 있는 영양은 전체의 90%가 산이다. 그중에서도 전국에서 청정일수가 가장 긴 일월산에서, 그 유명한 영양의 곰취나물과 영양 고추가 태어난다. 영양군의 현재(2023년 7월 기준) 인구는 1만5,818명. 전국 군 단위 가운데 인구 2만이 되지 않는 곳은 영양이 유일하다. 울릉도에 이어 인구 밀도가 가장 낮은, 폐암 발병률 전국 최하위 도시. 그 힘은 바로 영양의 물 맛, 공기 맛일 게다.
영양읍으로 가는 길에 선바위 관광지에 차를 세우고 공기를 한껏 들이켰다. 선바위라고 하면 바로 앞에 우뚝 서 있는 폭포 석벽이라고 착각들 하지만 반변천을 거슬러 내려가 좌측을 봐야 촛대 모양 선바위를 볼 수 있다. 선바위가 “어이 서울 촌것, 왔어?”라고 하는 듯 고개를 든다. 입암(立岩), 신선바위(仙岩)로 불리는, 마치 촛대를 세워 놓은 것 같은 이 바위가 ‘선바위’, 석벽과 절벽을 끼고 흐르는 두 물줄기가 합류하여 큰 강을 이룬 것이 ‘남이포’다. 그런데 왜 남이포인가.
겸재 정선의 ‘쌍계입암도’와 실제 선바위, 소원봉 앞 정자와 우뚝 선 선바위
세조 때 역모를 꾀한 무리가 반란을 일으키자 조정에서 남이장군(南怡將軍)에게 토벌할 것을 명했고, 역모가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큰 칼로 산맥을 자른 것이 선바위, 그 물줄기가 남이포다. 남이포 앞으로 솟아오른 선바위와 건너편의 소원봉 앞 정자가 일월산에서 발원한 반변천을 몸에 두르고 섰다. 100㎞가 넘는 길이로 『동국여지승람』에 대천(大川)이라 기록된 ‘영양의 젖줄’이다.
(좌로부터)선바위 관광지의 고추 조형물과 초화주, 서석지의 은행나무 풍경
선바위 관광지에서 일월산에서 채취한 약재와 지하 164m 암반수로 만들었다는 영양의 증류주 ‘초화주’를 한 병 샀다. 30도 375m가 1만 원도 하지 않는다. 저녁에 영양의 명물인 죽변식당 연탄닭갈비에 반주로 먹어야지. 선바위를 지나 근처 연당리의 서석지로 향한다.
조선시대 민간 정원 서석지는 조선3대 정원 중 하나다.
담양 소쇄원, 보길도 부용원과 함께 조선 3대 정원 중 하나인 서석지는 조선시대 대표적인 민간 연못으로 400년 된 은행나무가 객들을 맞는다. 신선이 노는 선유석(僊遊石), 구름 봉우리 모양 상운석(祥雲石) 등 20개 가까운 서석(瑞石)이 연못에 놓여 있다. 과연 상서로운 바위(瑞石)라 이름 붙일 만 하다.
대청마루의 문을 들어올리니 연꽃이 흐드러지게 핀 연못이 한눈에 들어온다. 세조 때 진사에 합격했으나 1608년 이후 광해군 때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이곳에서 학문 연구로 일생을 마쳤다는 정영방 선생이 만든 연못이다. 사우단 앞에는 지조를 상징하는 매난국죽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연못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서석지의 모습(아래 두 사진 영양군청 제공)
Info 선바위(경북 영양군 입암면 영양로 883-16) 서석지(경상북도 영양군 입암면 연당리 394-2번지)
자작나무와 반딧불이숲에서 즐기는 디톡스 타임
지난 겨울, 쌓인 눈 때문에 접근하지 못해 실패했던 죽파리 자작나무숲(30ha) 탐방에 재도전한다. 그러나 이번 장애물은 눈이 아니라 무거운 내 다리다. 죽파리 자작나무숲은 최대한 차를 끌고 간 다음, 자작나무숲까지 3㎞ 이상 숲길을 걸어야 풍경을 허락한다. 스마트폰도 터지지 않는다. 그나마 근처에 있는 검마산자연휴양림 방문객들에 의해 알음알음 알려졌다가 최근엔 수림 보호를 위해 차량 진입도 막고 있는 상황. 지난해 여름부터 운행을 시작한 반딧불이 전기차를 타면 근처까지 갈 수 있다.
죽파리 자작나무숲[사진=영양군청]
이곳은 국가지정 국유림 명품숲으로 인제 원대리의 속삭이는 자작나무숲(25ha)보다 훨씬 크다. 1993년 죽파리 검마산 일대에 식재한 30㎝ 묘목들이 30년간 사람들의 발길을 만나지 않은 채 20m 이상 자라난 것. 자작나무숲 선베드에 누워 손거울 반영 사진을 찍어본다. 휴대폰 데이터가 통하지 않으니 조바심 대신 빙글빙글 웃음이 나온다. 8월부터 진행된 자작나무숲 내 전선 지중화 작업으로 10월 말부터 출입이 가능하니 전화로 확인 후 방문하는 것이 좋다.
고립을 원하는 여행자에게 영양은 천국이다. 영양읍에서도 차로 40분 더 올라가야 하는 경북 영양군 수비면 수하리도 자작나무숲만큼이나 사람이 없다. 불빛 관리를 잘해 인공위성으로 보면 북한과 비슷하게 빛이 없는데, 국제밤하늘협회(IDA)는 2015년 10월 수비면 반딧불이 생태공원 일대(3.9㎢)를 아시아 최초의 국제밤하늘보호공원으로 지정했다. 1급수에만 있는 다슬기를 먹고 사는 반딧불이는 그만큼 주위 환경이 깨끗해야 볼 수 있는데, 반딧불이 생태공원에서는 8월 늦반디를 볼 수 있다.
영양 수비면의 한 캠핑장에서 본 은하수(사진 영양수비별빛캠핑장 제공)
영양에 오면 별 볼 일 많다는 게 이것 때문이었구나. 반딧불이와 천체 관측을 한 곳에서 할 수 있는 지역은 영양뿐이다. 반딧불이 천문대에서 돔형의 천장이 열리자 천체망원경 너머로 목성과 토성이 한눈에 들어온다. 거리의 조명까지도 땅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도록 설계됐을 정도로 밤하늘에 진심인 덕후들이 있는 곳이다. 하늘의 별에 이어 땅의 별까지 볼 수 있는 영양에서는, 별 볼 일이 참 많다.
돔형의 천창이 열리면 망원경으로 별자리를 볼 수 있다.
8m 원형돔이 있는 천체투영실에서 별자리와 우주여행 모션 체험을 한 뒤 천장이 오픈되는 주관측실에서 토성, 견우성, 직녀성 등을 관찰한다. 그러나 천문대까지 오지 않아도 수비면의 캠핑장이나 주차장에서 쉽사리 은하수를 볼 수 있다. 반딧불이 천문대 밤하늘보호공원은 한국반딧불이연구회가 지정한 반딧불이 보호지역으로, 천체 체험이 끝나면 천문대 앞에서 해설사가 동행하는 야간 반딧불이 탐사가 진행된다. 핸드폰을 끄면 풀숲 사이로 날아다니는 반딧불이의 향연이 마치 일본 영화 애니메이션처럼 펼쳐진다. 하늘의 별 은하수를 보고, 땅의 별 반딧불이를 본다. 자, 불을 끄고 별을 켜 보자.
여중군자, 장계향을 아십니까?
최초의 한글 조리서 『음식디미방』에 쓰여 있는 ‘어만두’ 요리법을 보면 생선 살을 저며 만두피로 만든다. 이색적이다. 누가 썼을까. 『음식다미방』은 350여 년 전 영양에 살았던 사대부가의 여인이 쓴 최초의 한글 조리서다. 여성이 책을 쓴다는 것 자체가 통념에 어긋났던 조선시대에 식품의 과학적 조리법을 최초로 기록한 진취적인 여성 과학자, 장계향(1598~1680).
이미지: 장계향문화체험교육원에 전시된 장계향의 초상화
『음식디미방』은 퇴계 이황의 후손인 남편 석계 선생과는 서로가 손님을 대접하듯이 공경하고, ‘글 잘한다는 소리보다 착한 행동이 중요하다’는 자세로 10남매를 키워낸 그녀가 일흔이 넘은 나이에 남긴 책이다. 전복을 참기름에 재워 상하지 않게 하는 법, 소금을 넣은 밀가루죽에 복숭아를 넣어 보관하는 법이 신기하다.
그녀는 냉장고가 없던 시절 과학적인 식품 보관법, 발효방법과 조리법 등 146개 항목에 달하는 음식조리법을 총망라해 1670년에 책을 냈다. 17세기 중엽 실제 조선인들의 식생활과 가정식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문헌이다. 146개 항목 중 술 만드는 법이 51개에 이를 정도로 술에 진심인 것도 특징.
음식 보관법에 대한 전시와 한글조리서 <음식디미방>
『음식디미방』의 제일 마지막 쪽에는 “이 책을 이리 눈 어두운데 간신히 썼으니 이 뜻을 알아 이대로 시행하고 딸자식들은 각각 베껴가되 이 책을 가져갈 생각일랑 생심(내지) 말며 부디 상치(상하지) 말게 간수하여 수이(쉽게) 떠러(떨어져) 버리다(버리게) (하지) 말라”라는 말이 나온다.
장계향은 빼어난 화가이자 서예가, 과학자였으며 선생이자 시인이기도 했던 요리 연구가로, 남편이 시묘살이를 하는 동안 넓은 땅과 300여 명의 가솔을 거느리던 여장부다.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지키자고 호소했던 사상가이자, 고아나 과부, 노약자들을 남몰래 도우며 전란에 신음하는 민초들을 구휼한 사회사업가이기도 했다.
장계향이 남긴 『음식디미방』(가장 우측 사진)에 담긴 레시피대로 만들어본 잡채와 석류탕. 꿩고기를 넣어 만든 잡채, 석류 모양처럼 만든 만둣국이 이색적이다.
장계향문화체험교육원에서는 『음식디미방』에 소개된 그녀의 레시피대로 복원한 조선시대 상차림을 직접 맛볼 수 있다. 전통음식, 전통주 등도 만들 수 있는데(사전예약 필수) 선조들의 주안상을 받아보는 느낌은 다소 건강했다. MSG따위 전혀 넣지 않은 심심한 맛. 그 옛날에도 건강한 음식들은 다소 심심한 맛이었나 보다.
정부인상을 예약했더니 도토리죽에 이어 찹쌀과 멥쌀에 누룩을 넣어 반죽했다는 감향주가 나온다. 만둣국인 석류탕에 숭어만두와 연근전을 받고 동아누름과 대구누름전으로 식사를 마무리 하니 입은 심심하지만 건강해진 느낌이 들었다. 이게 바로 350년 전 장계향 할머니의 손맛이겠지.
Info 장계향문화체험교육원(경상북도 영양군 석보면 두들마을1길 42) 12시 점심과 16시 저녁 2회, 소부상 3만 3천 원, 정부인상 5만 5원, 전통음식 조리 체험 1인 1만5000원
두들마을의 맛과 멋…이문열과 두들마을
석간고택과 두들마을
‘두들’은 경상도 사투리로 둔덕, 언덕배기를 뜻한다. 말 그대로 언덕배기 위에서 사람들의 안위를 살피는 것 같은 두들마을엔 장계향문화체험교육원 외에도 가볼 곳들이 많다. 1640년 병자호란의 국치를 부끄럽게 여겨 귀향한 석계 이시명 선생이 자리를 잡았고, 후손인 재령 이씨 일가가 집성촌을 이룬 곳이다. 석계 선생이 정착한 후 훌륭한 학자와 독립운동가들을 많이 배출했는데, 항일 시인인 이병각과 함께 작가 이문열의 고향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석계 이시명 선생의 부인이었던 장계향은 이문열 작가의 선대 할머니쯤 되겠다.
학문 연구가 이뤄지던 별당인 ‘석간정사’
두들마을에는 장계향과 남편이 살았던 석계고택, 후학을 가르치던 서당, 이문열 작가가 유년시절을 보냈던 생가인 석간고택과 학문 연구가 이뤄지던 석간정사, 항일시인 이병각 시인의 생가 유우당, 도서관과 카페, 산책로 등을 만날 수 있다. 거북 형상의 주춧돌 위에 세워진 유우당은 전형적인 ‘ㅁ’자 한옥에 사랑채와 아름드리 나무를 앞세우고 있다.
거북 형상의 주춧돌 위에 세워진 유우당은 항일 독립운동 인사들을 많이 배출했다.
유우당을 설명하던 재령 이씨 후손이 말한다. “노천명 시인, 오장환 시인, 그 양반들 맥인다고 우리 할매가 죽다 살아났심더.” 문화와 예술인들을 길러내고 지원하고 그들의 문학적 소양이 될 수 있는 토대가 되었던 두들마을은 사람들 전체가 문인들을 귀히 여긴 듯 보인다.
두들마을에선 다도체험, 전통혼례, 고택음악회와 스몰웨딩, 고택 체험, 전통 음식 조리 및 시식 등이 가능하다. 마을 뒷편에는 재령이씨 소유의 도토리공원이 있다. “이 땅을 훼손하지 않아야 후손들이 번창한다는 조상들의 뜻에 따라 수백 년 간 훼손 없이 잘 보존되고 있어요. 혈자리라 묘도 못 쓰지요. 마을 사람들끼리 누가 아프거나 안 좋은 일이 있을 때 ‘니 뒷재(도토리공원) 몇 번 가봤노?’ 물을 정도예요.”(주민)
두들마을 도토리공원(뒷재)
현재 위급한 인명을 살리기 위한 응급닥터헬기 인계점으로도 사용되고 있다는 도토리공원은 후손들의 건강뿐 아니라 병자호란 시 도토리 죽을 쑤어 가난한 사람들을 구휼한 장계향 선생의 생명존중 사상과도 연결되는 듯 보였다. 두들마을은 심지어 조선시대 국립병원인 광제원(廣濟院)이 있던 자리가 아닌가. 별 볼 일 많은 영양, 다음엔 어디로 가볼까.
※다음 기사에서 영양 여행 2편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글 박찬은 기자 사진 박찬은, 영양군청, 영양수비별빛캠핑장]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893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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