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수저? 월 50만원도 못 버는 청년 예술인 수두룩”
전문가들 “청년 예술인 흔들리면 K컬처 산업도 타격”
(시사저널=오종탁 기자)
"그 길로 들어서면 먹고살기 힘들다는 얘기 정말 많이 들었겠지만…."
얼마 전 대학수학능력시험 사회탐구 영역의 '일타 강사'(1등 스타강사)로 꼽히는 이지영씨가 개인 유튜브 채널 영상을 통해 미술대·음악대 등 예술대 지망생들에게 격려를 건네자 뜨거운 반응이 뒤따랐다. 이씨는 미술을 전공한 친언니(유명 설탕공예가 이미영씨)의 성공 사례를 들며 "예술 전공자의 길이 너무 험난하게 느껴지더라도 평범한 이들보다 훨씬 풍부한 발전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걸 생각하면 좋겠다. 예술은 인류의 삶에 품격을 더할 뿐 아니라 미래 산업적인 측면에서도 아주 중요한 요소"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예술을 직업으로 삼으면 먹고살기 어려우니 좋은 집안 배경을 갖춰야 한다는 등의 말을 정말 많이 들어왔겠지만, 그런 게 없어도 재능과 꿈을 바탕으로 본인 선택을 간절히 밀고 나가면 나중에 어떤 방식으로든 보상받을 수 있다고 본다"고 낙관했다.
고등학생은 물론 예술대 재학생까지 수많은 영상 시청자들이 댓글을 통해 큰 위로와 감동을 받았다고 고백했다. 펑펑 울었다는 사람도 있었다. 주위에서 짐 싸 들고 말리는 길을 택한 자신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 사람은 처음이라는 반응이 많았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순수예술 분야 미래세대가 얼마나 암울하고 또 소외감에 휩싸여 있는지를 나타내는 한 단면이다.
한계 상황 내몰린 청년 예술인들
시사저널이 취합한 데이터를 살펴보면 캄캄한 현실을 더욱 적나라하게 파악할 수 있다. 2017년 여름부터 2018년 봄 사이 서울대 단과대학별 졸업생 취업률을 2020년에 점검한 결과, 의과대가 94.8%로 1위였고 사회과학대(80.1%), 공과대(79.1%), 미술대(54.3%), 자연과학대(54%), 음악대(31%) 등이 뒤를 이었다. 여지없이 예술대가 최하위권이다. 국내 최고라는 서울대 미대와 음대가 이 정도인데, 다른 대학 사정은 불 보듯 빤하다. 예술대는 전국에 290여 개가 있고 학과로 나누면 4260여 개에 이른다. 청년 28만5000여 명이 전업 예술가의 길을 걷기 위해 예술대에서 공부하고 있으나, 매해 쏟아지는 졸업생 중 꿈을 이루는 사람 비율은 20%가 채 되지 않을 것으로 문화예술계는 추산하고 있다.
가까스로 일자리를 얻어도 근속이 불가능하거나 생활고에 시달리기 일쑤다. 문화체육관광부가 3년마다 시행하는 '예술인 실태조사'의 최신 데이터(2021년 말 발표)에 따르면 2020년 한 해 동안 경력 단절을 경험한 예술인은 36.3%였다. 경력 단절 예술인의 69.7%가 수입 부족을 경력 단절의 이유로 들었다. 예술활동으로 벌어들이는 월 수입이 100만원조차 되지 않는다는 예술인은 2020년 86.6%에 달했다. 코로나19 여파가 미치지 않은 2017년에도 해당 비율은 72.7%로 높았다. 이 중 상당수는 경력이 일천하고 경제적 기반도 취약한 청년 예술인들일 것으로 추정된다.
미술, 공예, 음악(클래식), 국악, 무용, 연극 등 순수예술 분야로 범위를 좁히면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6개 순수예술 분야 예술인들의 평균 연 수입은 513만원에 불과했다. 월 수입으로 따지면 50만원이 채 안 되는 수준(42만원)이다. 서울의 한 4년제 음대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하고 졸업 후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는 이현영씨(가명·29·여)는 "(세무 당국에 신고하지 않는) 입시생 대상 개인 레슨으로 버는 돈 등을 제외하고(수입을 축소해서) 말하는 경우도 있을 텐데, 사실 요즘 우리 또래 전공자들이 개인 레슨을 할 기회 자체가 거의 없다"며 "학원 아르바이트는 1시간에 3만원이면 많이 쳐주는 수준"이라고 말했다. 이씨는 "오케스트라 객원 연주자 자리도 사전 연습부터 무대 리허설에 연주까지 다 포함해서 페이가 15만원 정도밖에 되지 않아 친구들 중 일부는 '교통비조차 안 나오는 본업 할 바에야 다른 일자리를 찾겠다'며 전공을 버리기도 한다"고 했다.
"국가적·초당적으로 접근할 때"
일반 근로자의 4대 사회보험(국민연금, 건강보험, 고용보험, 산재보험) 가입 비율이 90%를 넘는 데 비해 예술인은 고용보험 가입률 27.6%, 산재보험 가입률 28.5% 등으로 실업·상해 등 위기 상황 대처에도 취약하다. 익명을 요구한 중견 성악가는 "요즘은 젊은 후배들이고 레슨을 해줬던 제자들이고 연락해 오면 반가움에 앞서 가슴부터 덜컥 내려앉는다"며 "하나같이 고민을 토로하고 도움을 요청하지만, 일자리와 설 무대가 급격히 줄어들고 일반적인 예술인의 사회적 지위도 추락한 상황에서 나로서도 아무런 대안을 제시해줄 수 없어 안타깝기만 하다"고 전했다.
김혜경 한국미래문화예술포럼 대표는 "예술을 한다고 하면 죄다 (집안이) 부유할 거라고 넘겨짚는 시선이 아직도 많은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평범한 집안 출신에 당장 먹고살 길이 막막한 청년 예술인이 허다하다"며 "문제가 극심함에도 관련 논의는 청년 정책에서 소외돼 왔다. 그야말로 사각지대에 놓인 셈"이라고 지적했다. 한국미래문화예술포럼은 이런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최근 만들어진 단체다. 음악과 미술, 무용, 연극 등 문화예술 분야에서 내로라하는 리더들이 포럼에 합류했다. 김혜경 대표는 "어린 시절 뛰어난 예술적 재능을 발견한 후 오랜 시간 동안 한 우물만 파온 순수한 청년 예술인들이 사회의 치열한 생존 경쟁에서 속수무책으로 밀려나고 있는 것을 목도하며 선배로서 뭐라도 해야겠다 싶어 나서게 됐다"면서 "대한민국 예술의 미래가 청년들의 손에 달린 만큼 국가적·초당적인 접근과 대책 마련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한국미래문화예술포럼이 7월31일 국회에서 진행한 '미래 청년예술세대 일자리 창출과 방안 모색' 세미나는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고자 하는 첫 시도였다. 김 대표를 비롯한 포럼 관계자들과 국민의힘 김승수·양금희 의원, 박보균 문체부 장관 등 정·관계 인사가 대거 세미나장을 찾았다. 세미나의 대전제는 순수예술이 이념과 정치적인 입장을 떠나 모두가 누려야 할 정신적 향유물이자 전 세계에서 K컬처의 부가가치를 창출하기 위한 토대라는 점이었다. 참석자들은 청년 예술인들의 존립 기반이 흔들리면 한국 문화예술 콘텐츠의 질과 관련 산업도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데 공감했다.
K콘텐츠는 어느덧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수출 품목으로 자리매김했다. 2021년 콘텐츠 산업 수출액은 사상 최대인 124억5000만 달러(14조3000억원)로 119억2000만 달러였던 전년보다 4.4% 증가했다. 꾸준한 성장세로 가전(86억7000만 달러), 이차전지(86억7000만 달러), 전기차(69억9000만 달러), 디스플레이 패널(36억 달러) 등 주요 수출 품목 규모를 앞질렀다. 이번 세미나를 공동으로 개최한 김승수 의원은 "우리 정부가 2027년까지 세계 4대 콘텐츠 강국으로 도약하겠다는 목표로 추진 중인 'K콘텐츠 수출 전략'의 성공을 위해선 원활한 문화예술계 세대교체와 미래세대, 즉 청년 예술인들에 대한 투자를 즉시 실행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토론자로 참석한 신민준 예술대학생네트워크 활동가(시각예술가)는 "향후 문화예술 분야 인력 수요가 높아질 것이라는 전망과 달리 예술대는 대학의 어느 단과대보다 빨리 구조조정되고 있다. 그동안 전문인력 양성과 연구개발(R&D) 체계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영향이 크다"면서 모범 사례인 과학기술 분야를 참고해 관련 법제도를 개선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청년 예술인 특화' 지원 필요성 부각
이어 신민준 활동가는 △문화예술 영역 기본법 위상과 규범성·실효성·보충성 강화 △순수예술의 산업적 측면에 관한 법제 공백 해소 △인력 양성 정책이 학생 대상 교육에서부터 교육-현장 연계, 예술인의 경력 단계·생애 주기·대상별 솔루션으로 확장되도록 법제적 토대 마련 등 청년 예술인 입장에서 구체적인 방법론을 제시했다. 일반적인 청년 정책에 대해 그는 "청년 정책이 등장하고 발전함에 따라 일자리·주거·복지 등 기존 정책 영역에 영향을 미쳤고, 문화예술 분야에도 경력 단계별 지원이 보편적인 것이라는 인식을 심어줬다"면서도 단속적이고 일회적인 사업이 많아 청년 예술인에 특화된 중장기적인 정책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김종덕 국립무용단 단장 겸 예술감독은 "예술 표현의 방식이 현재 적용 가능한 과학기술에 발맞춰 진화해야 한다"며 정확한 정책과 더불어 청년 예술인들이 빠르게 바뀌는 트렌드에 발맞출 수 있도록 돕는 교육 인프라 구축도 시급하다고 했다.
김혜경 대표는 "예술인 복지와 성장 환경 조성을 담당하는 공공기관(한국예술인복지재단)이 엄연히 존재하지만 혜택을 받기까지 오랜 검증 절차를 거쳐야 하고, 그 과정에서 청년 예술인 다수가 사각지대에 내몰리게 된다"면서 "예술인 지원 제도가 확대돼 왔다고 해도 '기획 능력'이 뛰어난 소수 기획사나 스타 예술가에게 지원이 집중되는 경우가 많은 게 사실"이라고 꼬집었다. 그는 "청년 예술인들이 작은 기회조차 잡지 못하는 부조리가 더는 발생하지 않도록 복지 지원을 배분하는 방식도 철저히 들여다봐야 한다"고 했다. 아울러 예술행정고시 제도, 국공립 예술단체 확장, 국공립 예술기관 국가공무원직렬제 시행 등 정책을 공식 제안했다.
이날 세미나 내내 자리를 지킨 박보균 장관은 기존 예술인 지원 제도에 더해 청년 예술인 지원 방안을 고민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젊은 세대가 K컬처 세계에서 자신의 꿈을 실현할 수 있도록 일자리 창출과 경제적·법적 뒷받침을 어떻게 할지 고민할 것"이라고 했다.
■ 예술인 복지 안전망 손보기 시작한 정부
올해 들어 정부는 전체 예술인들을 위한 복지 안전망을 구축하는 데 힘을 쏟고 있다. 올해 초 발표한 '제1차 예술인 복지정책 기본계획'(2023∼2027)이 그 시작이다. 예술인 복지정책의 기본계획은 예술인복지법에 따라 향후 5년 동안의 예술인 복지정책 비전과 정책 방향을 제시한 법정 계획이다. 역대 정부 중 이번 정부가 처음 수립했다.
우선 예술인 예술활동 증명 절차를 간소화하기로 한 점이 눈에 띈다. 예술활동 증명은 예술인 복지정책 대상자 확인 제도다. 앞서 코로나19 사태로 복지 신청이 급증하면서 심의 절차 지연 문제가 불거진 바 있다. 올해는 유효기간을 3년과 5년에서 5년으로 단일화하고, 20년 이상 예술활동 증명 유지 예술인에 대한 재신청 면제 등의 조치를 시행한다.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이 단독으로 수행한 예술활동 증명 업무를 분산하기 위한 방안도 모색한다.
올해 창작준비금 지원 사업은 지난해보다 2000명 늘어난 총 2만3000명(660억원)을 지원한다. 또한 국토교통부와 협력해 예술인 특화공간을 갖춘 예술인 맞춤형 공공임대주택을 내년까지 260호 규모로 공급할 예정이다. 생활안정자금과 전세자금 대출이 가능한 예술인 대상 저금리 금융 서비스도 계속된다.
아울러 예술대학 창작 프로젝트 지원 등을 올해 새롭게 추진하고, 신진예술인 3000명을 대상으로 창작준비금(1회, 200만원)도 지원한다. 문체부 관계자는 "예술인 복지정책이 복지와 창작의 선순환을 유도하는 사회적 투자로 자리매김하고 예술인 창작활동 안전망으로 작동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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