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란만 남기고 갔단다… 해체가 개혁인 ‘민주당 혁신위’[윤다빈의 세계 속 K정치]
“국소 수술이 아니라 전면적 혁신을 하겠습니다”
“계파 이익, 강성 당원의 요구에는 한 치의 관심도 없습니다”
민주당 김은경 혁신위원장이 올해 6월 20일 혁신위 출범 기자회견에서 밝힌 다짐입니다. 김은경 혁신위는 시작부터 우여곡절이 많았습니다. 이재명 대표가 선임한 이래경 혁신위원장이 ‘천안함 자폭설’ 등 과거 소셜미디어에 올린 글이 논란이 되면서 임명 9시간 만에 물러났습니다. 이후 당내 검증 절차를 강화해 고심 끝에 선임한 인사가 김 위원장이었습니다.
김 위원장의 취임 일성은 혁신위 출범 과정에서 곤욕을 치렀던 민주당으로서는 분위기 반전을 기대하게 하는 발언이었습니다. 그러나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 설화로 시작해 갈등만 남긴 ‘김은경 혁신위’
민주당을 윤리 정당으로 만들겠다던 김 위원장은 ‘이재명 대표 사법리스크’에 대해 “사법적 판단(영역)이라 혁신위가 관리할 이유는 없다”고 일찌감치 선을 그었습니다. 혁신위 출범의 이유가 됐던 ‘전당대회 돈 봉투 사건’에 대해서는 “검찰에 의해 조작됐을 수 있다”고 말했다가 논란이 되자 발언을 주워 담았습니다.
국조 수술이 아니라 전면 혁신을 하겠다던 혁신위는 김 위원장을 둘러싼 각종 논란이 이어지면서 4~5차례 나눠 발표하기로 했던 혁신안을 10일 하루에 몰아서 ‘땡처리’한 후 급하게 폐업했습니다.
계파 이익, 일부 강성 당원의 요구에 관심이 없다던 김 위원장은 마지막 혁신안으로 ‘친이재명계’ 의원들과 강성 지지층인 ‘개딸’이 요구했던 당 대표 선거 대의원제 폐지 방안을 꺼냈습니다. 현역의원 평가 하위자에 대한 공천 불이익 강화로 지도부에게 칼을 쥐여주기도 했습니다.
16일 열린 민주당 의원총회는 혁신안을 둘러싼 ‘비이재명계’의 불만이 폭발하면서 난장판이 됐습니다. 당을 혁신하겠다던 혁신위가 주류의 손을 잡고 당을 분열의 길로 안내한 셈입니다.
● 반(反)정치가 개혁이라는 혁신위
사실 김은경 혁신위는 출범 당시부터 실패를 예고하고 있었습니다. 김 위원장은 ‘금융감독원 부원장’ ‘한국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치권에서 일한 경험이 없기에 스스로 정치권에 빚이 없는 사람이라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정치권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지는 인사가 정치 혁신을 주도할 때 크게 2가지 방법을 활용합니다. 하나는 정치 자체를 혐오하는 ‘반(反) 정치’입니다. 정치인 전체를 기득권으로 규정하고, 일반 국민의 정치 혐오를 활용해 명분상 우위에 서는 것입니다. 이 경우 혁신이라는 이름으로 일시적인 지지를 얻을 수는 있지만 실제 정치 발전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 설익은 방안들이 생산될 가능성이 큽니다.
장성철 공론센터 소장은 “정치 언어를 모르는 사람이 정치권을 혁신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며 “축구선수가 야구 감독을 할 수는 없다. 의욕만 가지고 정치권을 혁신할 수는 없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혁신위 사정을 잘 아는 한 관계자는 “근본적 정당 개혁을 하기에는 시간도, 능력도 없다 보니 결국 언론에서 관심을 가질 이벤트에 매몰될 수밖에 없었다”고 지적했습니다.
김은경 혁신위는 초기 혁신위원 발표 때부터 7명 중 6명이 친이재명계라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국민이 민주당을 신뢰하지 않은 가장 큰 원인으로 꼽히는 이재명 대표의 사법리스크는 건너뛴 채 대의원제 개혁, 권리당원 영향력 강화라는 친명계의 요구사항만 들어줬습니다. 민주당 관계자는 “혁신위의 목표 자체가 친명계 지도부가 하고 싶은 일을 대신하는 것이었다는 게 결과적으로 입증된 꼴”이라고 꼬집었습니다.
● 혁신위 잔혹사…당권파의 ‘권력 연장’ 수단
역대 정당 혁신위의 사례를 보면 대부분 정당의 체질 개선보다는 비주류를 정치적으로 제거하거나 비주류가 당권을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됐습니다.
혁신위가 발표한 ‘현역의원 평가 하위 20% 배제’는 비문 의원 솎아내기라는 논란이 벌어졌습니다. 당시 민주당 소속이던 안철수 전 대표와 김상곤 위원장이 혁신안을 놓고 자주 충돌했습니다. 안철수 의원을 비롯해 비문 진영에 있던 인사들이 탈당해 국민의당을 만든 것도 김상곤 혁신위가 출발점이었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혁신위는 이 대표가 내세웠던 공직 후보자 기초자격평가 확대 및 공천 부적격 기준 강화, 온라인 당원투표제, 국회의원 정기 평가제 도입 등을 내세웠습니다. 하지만 이 대표 주도로 당을 개혁하려는 움직임은 친윤계의 반대로 사실상 좌초됐습니다.
시간을 거슬러 새누리당 시절의 ‘김문수 혁신위’도 내부 반발만 키우는 데 그쳤습니다. 당시 비주류였던 ‘비박근혜계’ 김무성 대표는 역시 비박계로 꼽히는 김문수 보수혁신위원장을 앞세워 국회의원 세비 동결, 국민공천제 등 의욕적으로 혁신안을 내놨지만 당내 주류인 ‘친박근혜계’의 반발에 부딪혔습니다. 친박계에서는 “특정인의 대권 행보를 위한 실적 쌓기용”이라는 비판이 나왔고, 혁신안은 표류했습니다.
정치권에서는 ‘당권파가 정치적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쫓겨날 때 비상대책위원회가 만들어지고, 버티면 혁신위가 만들어진다’는 자조 섞인 말이 나옵니다. 한 민주당 관계자는 “정치에서 혁신의 핵심은 ‘리더십 교체’인데, 혁신위는 현재 권력을 존중하는 것을 전제로 활동하다 보니 오히려 존재 자체가 개혁을 막는 경우가 많다”며 “한국 정치사에서 혁신위의 성공 사례가 거의 없는 이유”라고 지적했습니다.
● 정당 혁신은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는다
해외 정당에서는 한국의 혁신위원회와 비슷한 모델을 찾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선거에 패배하더라도 당의 정체성과 시스템을 바꾸고, 리더십을 교체하는 수순을 밟지 혁신위를 띄워 인위적으로 권력을 연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미국 민주당은 2016년 대선에서 여론조사 우위를 바탕으로 무난한 승리를 점쳤습니다. 자칭 ‘워싱턴 아웃사이더’인 공화당 도널드 트럼프 후보를 낮게 평가하기도 했죠. 하지만 실제 투표 결과 트럼프 후보에게 충격적인 패배를 당합니다.
당시 선거 패배 원인을 두고 뼈아픈 자성이 이어졌습니다. 민주당은 한때 노동자 계급을 대변하는 정당으로 인식됐지만 집권 기간 노동자의 실질임금 하락을 막지 못했습니다. 민주당 소속 빌 클린턴, 버락 오바마 대통령 모두 자유무역협정을 추진했고 이에 따라 수백만 명의 블루칼라 노동자는 일자리를 잃었습니다. 쇠락한 공업지대인 러스트 벨트(Rust Belt)에 사는 백인 노동자들은 트럼프의 핵심 지지층으로 돌아섰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백인 노동자의 표를 흡수했던 정책은 대부분 계승하고 나섰습니다. 자유무역에 대한 규제에 나서면서 기업이 생산기지를 해외로 이전할 경우 징벌 성격의 세금을 물리겠다고 했습니다. 제조업의 쇠락으로 미래에 대한 불안을 겪어온 백인 노동자를 배려해 사실상 보호무역으로 돌아선 것입니다.
전통적 지지층인 서민, 노동자를 위한 경제·복지·보건의료 공약은 대폭 늘렸습니다. 학자금 대출 탕감 등 서민의 학비 부담을 줄이고, 세금 감면을 추진했습니다. 정당 구조 개혁에 힘 쓴 결과 민주당은 2020년 대선에서 경합주를 탈환했고 여유 있는 승리를 차지했습니다.
물론 정치는 유권자의 수요를 따라가게 마련입니다. 빠른 결과를 원하는 한국 유권자의 특성상 정치권 역시 구조적인 해법을 찾기보다는 혁신위 같은 단기적인 이벤트를 통해 문제를 극복하려는 태도를 보입니다. 다만 역대 혁신위 사례에서 보듯 주류 세력이 반대파를 탄압하고, 이벤트식 땜질 처방만 반복하는 건 앞으로도 K정치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민주당 한 관계자는 “총선을 앞두고 최대 스윙보터는 2030으로 봐야 한다. 이들은 무당파이고 중도 성향이 강한 집단”이라며 “보여주기식 혁신을 넘어서 이들은 왜 민주당을 지지하지 않고 왜 무당파로 빠져 있는지를 먼저 파악하는 게 진짜 혁신의 출발이 될 것”이라고 조언했습니다.
‘한국 정치의 수준은 왜 나아지지 않는가?’라는 주제로 글을 쓰고 있습니다. 대통령, 국회의원 선거를 각각 두 번씩 취재하며 가진 의문에 대해 해외 정치와 비교하면서 제 나름의 생각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우리 정치의 품격을 높일 해법을 찾아보고 싶습니다. 지난주에는 허**님께서 시민들이 정확한 정보를 근거로 판단하는 자세를 갖췄을 때 전달자인 언론도 더 적극적인 취재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의견을 주셨습니다. 김**님께서는 모든 사안이 시시비비 없이 정쟁으로만 끝나는 정치 현실에 대한 비판 의견을 남겨주셨습니다. 이메일 empty@donga.com으로 독자 여러분의 소중한 의견을 기다립니다. |
윤다빈기자 empt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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