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비’ 못하는 나라엔 미래 없다[이현종의 시론]
왜란 7년의 기록 담은 징비록
조선은 禁書, 일본에선 인기
미국도 아프간 판 징비록 기록
잼버리 망신 잠깐 사과 후 정쟁
‘전북도가 피해자’ 황당 주장
尹대통령부터 읍참마속 해야
가톨릭 미사 중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내 큰 탓이로소이다’라는 기도가 있다. 가슴을 가볍게 치면서 하는 이 기도는 나로 인한 모든 죄에 대한 반성과 성찰의 의미가 있다. 남 탓을 하기 전에 나에게는 문제가 없는지 살피는 과정이다. 고 김수환 추기경이 생존해 계실 때 가톨릭은 ‘내 탓이오’ 운동을 대대적으로 펼쳐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런데 요즘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신부들이 길거리로 나와 입에 담기 힘든 악담으로 윤석열 정부를 비난하는 행태를 보면 그들에겐 기도가 별 효과가 없는 듯하다.
국가적인 차원에서의 ‘내 탓이오’ 운동은 한마디로 ‘징비(懲毖)’라고 할 수 있다. ‘지난 잘못을 스스로 꾸짖어 후에 환란이 없도록 삼간다’는 뜻으로 시경(詩經)의 구절에서 따온 말이다. 서애 류성룡(1542∼1607)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7년을 겪으면서 쓴 ‘징비록’으로 잘 알려져 있다. 다시는 전란을 겪지 말아야 한다는 심정으로 임진왜란의 원인과 경과, 자신의 잘못과 조정의 실책, 백성들의 조정에 대한 비판을 담았다. 그러나 이런 징비록에도 당시 조정은 계속 정쟁에 매몰돼 정묘호란(1627)과 병자호란(1636)을 겪으며 삼전도의 굴욕을 당하게 된다. 징비록은 되레 일본에서 큰 인기를 끈 반면, 숙종(1712) 때 조선의 정보가 일본으로 유출될 것을 우려해 금단서로 지정돼 누구도 읽지 못했다.
역사 속에서 징비를 구현하지 못하는 국가의 존속은 어렵다. 소 잃고도 외양간을 고치지 않으면 소를 키울 수 없다. 위기 뒤에 제대로 징비를 하는 것이야말로 국정 리더십의 핵심이다. 실패하고도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려고 하지도 않고, 고치지도 않는다면 그 나라의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다. 지난 2021년 아프가니스탄에서 쫓기듯 철군했던 미국은 다시는 이런 잘못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연방 정부 내 독립 감찰 기관인 ‘아프간재건감찰관실(SIGAR)’에서 철저한 반성과 분석을 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분기마다 활동 내역을 담은 보고서를 연방 하원에 제출하고 누구나 읽을 수 있도록 인터넷 홈페이지에도 올린다. 60번째 보고서까지 낸 이 활동은 미국판 징비록인 셈이다.
전북 새만금에서 열린 ‘2023 세계스카우트잼버리대회’에서 준비 부족으로 세계적 망신을 당한 정부와 조직위원회, 전북도는 지금 징비록은커녕 ‘남 탓’에 여념이 없다. 말로는 다들 반성한다고 하면서도 정작 책임 문제가 나오면 모두 현 정권, 전 정권, 전북도 탓만 하고 있다. 집행위원장을 맡은 김관영 전북지사는 “잼버리 화장실·폭염 대책, 우리 책임 아니다”고 발뺌했다. 심지어 SNS 때문에 오해를 키웠다고 책임을 엉뚱한 데 돌렸다. 전북 지역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들은 “전북이 가장 큰 피해자”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잼버리 행사 종료 후 16일 처음으로 열린 국회 행정안전위원회는 민주당이 김 지사의 출석을 막는 황당한 행태 때문에 26분 만에 파행됐다. 민주당 소속 김 지사가 나오면 전북도와 문재인 정권 책임으로 비치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다. 5년 동안 공정률 37%밖에 못해 놓고 문 전 대통령은 “부끄러움은 국민의 몫이 됐다”고 마치 남 얘기하듯 했다.
윤석열 정부도 책임 떠넘기기는 마찬가지다. 지난 1년 6개월 동안 어떤 사전 경고도 없었다. 행사를 맡은 김현숙 여성가족부 장관은 국회에서 “폭염·폭우 대책이 다 마련돼 있다”고 했는데 현실은 정반대였다. 대통령실 참모 그 누구도 이런 문제를 사전에 파악하지 못한 것 같다. 당연히 윤 대통령에게 보고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징비록을 써도 모자랄 판에 이대로라면 아예 쓰지도 못하고 흐지부지될 듯하다. 정치권은 문제 해결 능력을 상실했다. 수해나 대형사고, 학교 폭력 등 사고가 발생하고 나면 늘 따라오는 얘기가 이미 국회에 대비책을 담은 법안이 올라가 있는데도 한 번도 논의된 적이 없다는 것이다. 문제를 뒤늦게라도 반성하고 고치면 기본은 할 텐데 이젠 잠깐 반성 모드 이후엔 아무 관심이 없다. 지자체의 무능은 치유 불가능 상태에 왔고, 정부의 무책임도 심해지고 있다. 국회는 문제 해결이 아닌 문제 유발자가 됐다. 윤 대통령은 읍참마속의 심정으로 자신에게 가혹할 만큼의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것부터 징비록을 쓰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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