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 전 생일에 벌어진 이스라엘 병사들의 강간·살해라는 ‘사소한 일’[책과삶]
사소한 일
아다니아 쉬블리 지음·전승희 옮김 | 강 | 172쪽 | 1만5000원
1948년 이스라엘 건국·점령 과정
군인들에 자행된 강간·살해 사건
사소한 우연으로 시작된 진실찾기
“끝 간 데 없이 펼쳐진 건조한 네게브 사막 위로 극심한 팔월의 더위”가 도사리던 때다. 이스라엘인은 ‘독립 전쟁’, 팔레스타인인들은 ‘알 나크바(대재앙)’라 부르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침략과 점령, 팔레스타인인 축출 이듬해가 배경이다. 1949년 8월9일 “온전한 두 채의 오두막과 부분적으로 파손된 세 번째 집 벽의 잔해”밖에 없던 니림에 이스라엘 군인들이 주둔한다. 이들의 임무는 이집트 국경에 접한 네게브 사막 남서쪽 “잔존 아랍인들을 제거”하는 일이다. 점령군 소대장인 ‘그’가 병사들에게 말했다.
“우리는 군사적 임무만이 아니라 민족적 임무 또한 수행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는 네게브를 결코 쓸모없는 사막으로, 즉 아랍인들과 그들의 짐승들이 버려두고 오용하는 한갓 먹잇감으로 놔두어서는 절대 안 된다.” 쇠를 달굴 정도의 더위도, 휘몰아치는 모래폭풍도, 황량한 언덕을 지배하는 정적도 아랍인 첩자를 색출하려는 그의 의지를 꺾지 못했다.
정찰 활동 중 “샘물 곁에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던 한 무리의 아랍인들(베두인인들)”을 발견한다. “개가 컹컹 짖자 순간적으로 몇 발짝 내딛던 낙타들의 눈과도 마주쳤다. 이어 요란한 총성이 울렸다.” 아랍인들이 머물던 곳에선 어떤 무기도 나오지 않았다. “소녀 하나의 숨죽인 흐느낌”만 들렸다.
그는 병사들이 보는 앞에서 소녀에게 물을 뿌렸다. 비누를 던져 몸을 씻게 했다. 병사들은 킥킥거렸다. 그는 위생병에게 소녀 머리 소독을 지시했다. “기회가 되는 대로 그가 직접 중앙사령부나 아랍인 지역에 데려다줄 터”였다. 그때까지 소녀를 진지 주방에서 일을 시킨다. 병사 몇이 “그녀를 건드렸다”는 보고를 듣고는 “소녀를 진지 식당에서 일하게 하든지, 아니면 한 사람도 빠짐없이 그녀를 가지고 놀든지” 선택은 둘 중 하나라고 했다가 “어떤 병사라도 소녀에게 손을 댄다면 이것(총)이 가만있지 않을 거”라고 했다.
그러고도 먼저 손을 댄 건 그다. 소녀가 감금된 방으로 가 구타한 뒤 강간한다. 여러 병사의 집단 강간도 내버려둔다. 그와 병사들은 진지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으로 소녀를 데리고 간다. 소녀가 폭력을 당할 때마다 짖던 개가 이때도 쫓아온다. 병사들이 모래에 구덩이를 판다. “소녀가 도망가면서 울부짖고 있었다. 그러다 모래 위로 쓰러지고, 이어 오른쪽 관자놀이에서 총성이 들렸다.” 여섯 발을 더 쏴 ‘확인 사살’한다. 1949년 8월13일 아침에 벌어진 일이다. 팔레스타인인 ‘나’는 우연히 이 사건 관련 기사를 읽는다. “지속적인 살해가 지배적인 곳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들과 비교했을 때 정말로 딱히 특별할 게” 없는 ‘사소한 사건’이지만, “그들 중 오직 한 명의 살해와 관련된 지엽적인 사실”이 나를 계속 괴롭힌다. “집단 강간의 최종 행동으로 일어난 그 살해의 특이점”은 내가 그 사건 25년 뒤 같은 날인 1974년 8월13일 태어났다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세상의 비참함을 다루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과거로 돌아가서 더 많은 비참함을 들춰낼 필요는 없다”고 여기면서도 “그 두 일 사이의 연결 가능성, 혹은 숨겨진 연결고리의 존재를 배제”할 수도 “(소녀가 강간당하던) 그날 밤 그 개의 끈질긴 짖어댐이 내 안에 야기한 불안과 공포를 극복”할 수도 없었다. 소녀의 이야기를 자세히 다루지 않은 기사는 총체적 진실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여긴다.
나는 직장에 갈 때면 검문을 당한다. 총구가 겨눠지기도 한다. 이스라엘 점령하의 ‘A구역’(요르단강 서안 지구의 팔레스타인 구역)은 청년 셋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저항했다는 이유로 그들이 있던 건물도 폭격당하는 곳이다. 나는 “바리케이드를 치고 있던 청년 셋이 살해됐다는 사실보다도 폭격 때문에 자기 책상에 떨어진 먼지에 더 신경을 쓰는” 성향을 지녔다. “책상 위의 먼지나 명화 위의 파리똥같이 사소한 것들에 집중하는 시각을 진실에 도달하는 유일한 방법이자 진실의 존재에 대한 확실한 증거라고 보는 사람들” 중 하나다.
낙타를 직접 보지 않고도, 모래에 난 삐뚤빼뚤한 낙타 발자국, 모래에 흘린 기름가 포도주 방울, 낙타가 홀린 털 등을 두고 “낙타가 하얀색이고 눈 하나가 멀었으며, 안장 위에는 가죽 주머니 두 개를 싣고 있는데, 주머니 하나에는 기름이, 다른 하나에는 술이 가득” 찬 걸 맞힌 삼 형제에 관한 옛날이야기처럼 말이다.
불안과 공포라는 정신적 경계선, 군인과 검문, 이스라엘 군사 분할 구획과 팔레스타인인 통행 제한이라는 군사적·지리적 경계선을 넘어 진실을 찾으려 한다. 25년 전 사건 현장을 찾아 나선다. 사건 관련 서류를 둔, C구역 밖 이스라엘 방위군 역사박물관과 기록보관소에 가려고 동료의 파란색 신분증을 빌린다. 내 초록색 신분증은 A구역 통행만 가능하다. 다른 동료 신분증으로 렌터카를 빌려 니림으로 떠난다. 가는 길에 1948년 지도에 있던 팔레스타인 마을들은 지금 없다는 걸 깨닫는다. 주민들이 추방당하고 마을이 파괴당했다는 사실도 지도를 보며 눈으로 확인한다.
‘범죄 현장’인 ‘니림’은 유대인 정착지였다. 댕거라고 부르던 지역을 유대계 이집트인 부호의 이름을 따 니림이라고 지었다. 유럽에서 온 이스라엘 이주민들과 현지 주민인 베두인 사람들은 처음엔 우정과 신뢰를 나눴다. 1948년 발발한 전쟁 때문에 그 관계는 끝이 났다.
박물관과 기록보관소를 거쳐 ‘범죄 현장’으로 간다. “내 생일과 우연히 일치하게 된 그날의 범죄를 단죄할 아무런 단서도 -중요한 것도 사소한 것도- 발견”하지 못했지만 걸음을 계속한다. 군대가 강간 사건 이후 이 지역을 떠난 적이 없다는 사실도 확인한다. 즉 범죄 현장은 군사지역이다. 내가 탄 하얀색 소형차를 발견한 병사들이 총을 겨누고, 소리를 지르면서 소설은 결말로 나아간다.
<사소한 일>은 1949년 8월의 강간 사건을 다룬 1부는 ‘그’를 주인공으로 한 3인칭 객관적 시점으로, 그 범죄 현장을 찾는 2000년대 지식인 여성인 ‘나’의 여정을 다룬 2부는 1인칭 주관적 시점으로 구성했다.
소설 속 나와 같은 1974년생 작가
“차이를 억압 구실로 쓰는 기제
저항 않고 방관 땐 우리도 가해자“
옮긴이 전승희(보스턴칼리지 한국학 교수)는 해설에서 “놀랍게도, 이렇게 사소하게만 연결된 듯한 두 삽화는 팔레스타인인들이 반세기가 넘는 긴 세월 동안 겪어온 점령과 폭력과 억압의 현실과 그 근원적 문제점을 놀라울 정도로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다”고 했다. “1948년의 알 나크바, 즉 대재앙이 결코 일회성 사건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지속적으로 확대되고 심화되어왔고, 그것이 그때나 지금이나 다양성의 평화로운 공존과 상호작용이 아니라 차이를 억압의 구실로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체제의 산물이라는 것을 역설한다”고 했다. “(아다니아 쉬블리는) 팔레스타인의 현 상황은 민족이나 종교의 문제가 아닌 윤리적인 문제, 억압과 폭력의 현 체제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윤리적 선택의 문제라고 말한다”고 했다. “차이를 억압의 구실로 활용하는 기제가 있다는 것을 자각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런 기제에 저항하지 않고 방관한다면, 누구나 가해자가 될 수 있고, 아니 이미 얼마간 가해자”라는 취지의 말이다.
작가 아다니아 쉬블리는 소설 속 ‘나’와 같은 1974년생 팔레스타인 소설가이자 문화연구자다. 세 번째 소설인 <사소한 일>은 2021년 부커상 인터내셔녈 최종 후보에 오르는 등 호평을 받았다.
충격과 여운을 주는 결말에 대한 평가도 포함된다.
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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