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통의 추억 공간 만들어 갈등구조 치유해야”

2023. 8. 18.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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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대주택 한 단지 섞는 소셜믹스 잘못
도시 1층 공짜로 머무를 공간 이상적
건축의 묘미 살린 재건축 디자인 필요
서울, 전세계 창의적 사람 모이게 해야
유현준 건축가 겸 교수는 양극단으로 치닫는 한국 사회의 극심한 갈등 구조를 치유하는 데 건축이 소정의 역할을 할 수 있다고 털어놨다. 2002년 월드컵 때 겪은 공통의 경험이 모두를 하나로 만들었듯이, 추억을 공유할 수 있는 공간을 건축이 제공한다면 서로가 연결될 수 있다는 게 그의 소신이다. 임세준 기자

대다수 사람들이 집 또는 건물을 바라보는 관점은 계산에 기반한다. 몇 가구인지, 용적률을 몇 퍼센트로 하고 층수는 얼마나 올릴지에 따라 향후 자산 가치가 달라진다고 생각해서다. 이처럼 ‘숫자 건축’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좋은 건축’이 설 자리는 점차 좁아진다. 유현준 홍익대 건축학부 교수는 지금이야말로 좋은 건축이 무엇보다 필요한 때라고 강조한다. 건축가는 ‘관계를 디자인 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하는 그는 갈등으로 점철된 한국 사회에 건축이 ‘공통된 추억’을 제공하며 화해와 소통에 큰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강남구에 위치한 유현준건축사사무소에서 그를 만났다.

-교수님한테 건축이란?

▶건축은 저를 세상과 연결해 주는 매개체입니다. 제가 표현하는 방식이자 이 세상에 기여하는 방식이기도 하고요. 직업으로 확장해서 보면 건축가는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 등 관계를 조율하고 하모니를 이룰 수 있게 사회의 관계를 정리해 주는 역할을 해요. 사람이 사는 공간을 만들면서 그들 간 관계를 디자인하는 거죠. 어떤 것보다 감성을 자극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지극히 정치적이기도 하고, 때론 경제적인 논리에 의해서 움직이기도 하고 한 개인의 욕구를 반영하기도, 여러 사회 구성원들의 집단 의식이 반영되기도 하죠.

-요즘 인구가 줄면서 지방 구도심들은 슬럼화되고 있습니다. 이에 지방정부차원에서 도시재생을 시도하기도 하는데요, 이 맥락에서 건축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요?

▶건축물은 필요한 곳에 지어져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사회가 필요로 하는 공간을 제공하는 게 건축이니까요. 사람이 없는 곳에 공간을 만든다고 수요가 생기지는 않습니다. 지방에 혁신도시를 만들면 인구가 그쪽으로 갈 거라고 했는데 그렇지 않았고, ‘강남처럼 쾌적한 아파트가 있는 도시를 지방에 만들면 인구가 분산될 것이다’라 했는데 반대였어요. 오히려 KTX 등장 이후로 시공간 개념 자체가 달라지면서 중앙 집중 현상이 더 심해지는 경우가 생겼죠. 그래서 지방은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을 제시할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지지 않으면 소멸을 막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서울과 차별화된 뭔가 가치를 줄 수 있는 공간이어야 해요.

-연남동이나 익선동, 을지로도 낙후됐지만 젊은 사람들이 상권을 만들었잖아요.

▶그곳들이 성공할 수 있는 이유는 우선 서울이고, 방문자 대부분이 아파트에 살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아파트가 아닌 다른 공간을 찾는 사람들이 지하철을 타고 갈 수 있는 곳이 을지로나 연남동인 거예요. 인구가 있다는 게 기본 전제죠.

저는 지방에 연남동, 을지로를 만든다고 해서 활성화될 것이라 생각하지 않아요. 지방은 2~3시간이 걸리더라도 갈 만한 가치가 있어야 해요. 결국 하룻밤을 잘 가치가 있을 때 가는거죠. 향후 일자리가 줄면 주 4일 근무제 같은 걸 할텐데, 그럼 3일 휴일을 보낼 수 있을 만한 가치가 있는 라이프 스타일이나 공간이 제공이 돼야 지방에 갈 거라고 봐요.그것이 연남동과 을지로 스타일은 아니겠죠.

-특별법이 추진되기도 하는 등 과밀화된 신도시 재건축이 화두입니다. 실현 가능한 건지 또 바람직한 건지 묻고 싶습니다.

▶답변드리기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분명 그곳에 밀도를 높여서 재건축을 하면 사람은 채워질 거예요. 하지만 보다 외곽에 있는 사람들이 이사를 하겠죠.

관건은 어떻게 만드느냐에 달려 있는 것 같아요. 단순히 밀도만 높여서 그 정도 수준의 도시를 만들거라면 저는 안 하는 게 낫다고 보고요. 밀도를 높이면서 이번에는 좀 제대로 된 도시를 만들겠다고 하면 해볼 만하다고 생각은 해요.

-묘안이 있을까요?

▶개인적으로 해보고 싶은 그런 건 있죠. 걸어서 5분에서 10분 이내에 공원을 만날 수 있는 도시, 아이들은 자연과 가깝게 저층형 학교에서 지낼 수 있는 ‘스머프마을’ 같은 학교가 있는 도시, 저밀·중밀·고밀화된 곳들이 몇 백 미터 안에서 공존하면서 조금만 걸어도 그 모든 다채로움을 체험할 수 있는 도시, 그리고 일정 수준 이상으로 밀도가 높아 굳이 차를 타고 다니지 않고서도 걸어다니면서 모든 것을 경험할 수 있는 있는 도시, 상업이 한쪽에 집중화되지 않고 선형으로 돼 걷고 싶은 거리가 형성된 도시 등이죠. 그런데 중앙공원이 있고 중심 상업지역에 상가 올라가 있고 아파트 있고, 근린상가 만들고 이럴거면 안하는 게 낫습니다. 일산 신도시가 도곡동에 있을 필요는 없잖아요.

-상권의 양극화 또한 빼놓을 수 없는 흐름인데요.

▶만약 우리가 걸어갈 만한 거리에 좋은 동네 식당들이 있다면 기꺼이 5분, 10분 걸어서 가서 즐길 것 같아요. 또 상권을 가는 경험이 즐거워야 하는데 지금은 그런 도시 환경 구조가 아닌 거죠.

예전처럼 우리가 상가만 만들어 놓으면 상가 복도 4층에 있더라도 찾아가는 그런 시절은 아니거든요. 내가 그 가게를 가기까지 가는 동선과 공원을 산책하듯이 걸어 가게에 갈 수 있는 그런 구조를 만들어야 되는 거예요.

성공적으로 돼 있는 곳이 서울에서는 경의선숲길이라 보는데, 선형의 공원 형태인 숲길 주변에 상권이 적절하게 분포가 돼 있어 상권이 살아나는 겁니다. 반면 10층짜리 건물에 상가를 다 집어넣고 역세권이라고 해서 비싸게 팔면, 그건 공동체를 만드는 공간 구조가 아닙니다.

-도시의 효율성 측면에서 아파트가 최적화된 모델임은 분명해 보이지만, 한강변을 가로질러 아파트가 병풍처럼 서 있는 모습을 결코 바람직해 보이진 않습니다. 최근에도 한강변 재건축이 활발이 추진이 되고 있는데,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할까요.

▶분열되고, 양극화된 우리 사회를 보면 이 도시의 공간 구조가 성공적이라고 볼 수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재건축을 할 때는 구성원들이 공존할 수 있는 도시를 만들어야 된다고 봐요.

그러려면 공통의 추억이 만들어져야 되거든요. 공통의 추억은 확증편향과 알고리즘에 의해 끼리끼리 모일 수밖에 없는 온라인 공간에서 만들어지지 않아요. 오프라인 공간이 제공돼야 합니다.

우리가 이번에 도시를 만들 때에는 계획하는 사람과 재건축 조합원들이 그런 관점을 견지했으면 좋겠어요. ‘나는 마당 같은 발코니가 있는 집에 살고, 1층부는 일부 도시에 기여를 해서 공통의 추억을 만들 수 있는 선형의 공원을 만들자’라는 구상이요. 또 시민들이 제안을 했을 때 시에서는 과감하게 그런 아이디어에 좀 더 인센티브를 주는 쪽으로 가야겠죠.

지금이 좋은 기회라고 봐요. 단군이래 이렇게 잘 살았던 적이 없어요. 이때 새롭게 만드는 도시가 100년 뒤, 200년 뒤에 전 세계인들이 관광하러 오는 도시가 될 거라고 봅니다.

-임대주택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더불어 사는 사회를 위해 임대주택의 소셜믹스 등 실험이 이어지고 있지만, 강남 재건축 단지에선 개방형 아파트를 조건으로 인허가를 받아놓고도 담장을 설치하고 있는데요.

▶우선 임대주택을 넣어 한 단지에 넣어 소셜믹스를 하려는 것은 잘못됐다고 봐요. 강남 고급아파트는 임대주택도 비쌉니다. 주변 시세를 반영하니까 연봉 몇 억 되시는 분들 밖에 못 살아요. 원래 취지하고 안 맞죠. 차라리 비싸게 분양을 해 조성한 돈으로 다른 좋은 위치에 저렴하게, 제대로 된 임대주택을 짓는게 낫습니다.

부잣집 옆에 가난한 집을 넣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처지가 다르다는건 모두가 알죠. 그래서 제가 생각하는 소셜 믹스는 도시의 1층부에 접근성이 좋은 공간을, 공짜로 머무를 수 있는 공간을 얼마나 마련할 것이냐에요.

제일 좋은 건 단지 내 녹지를 할애해서 선형의 공원을 만들고, 거기서 더 나아가 그 공원에 도서관을 짓고, 쉴 수 있는 벤치가 있으면 좋겠죠. 주변부로 1층 상업 가로들이 완성이 되면 더 좋을 거고요. 지금은 억지로 임대주택을 넣으려다보니 임대동을 대로변 또는 뒷동에 배치시키는 뻔한 공식이 나오고 있어요.

또 담장을 두르는 강남아파트의 문제는 접근이 잘못됐어요. 건축 계획을 세우는 관리자들이 ‘너의 아파트 단지가 크니 반드시 여기를 쪼개 양분해야겠어’라는 식의 철학을 가지면 안돼요. 제대로 된 철학이라면 그 사람도 좋고 나도 좋게 해야 될 거 아니에요.

결국 ‘윈윈’할 방법을 디자인을 통해 찾아야죠. 압구정을 예로 들면 단지를 가로지르는 도로는 전형적인 토목 솔루션이에요. 건축적인 솔루션을 한다면, 길의 레벨을 다르게 하면 됩니다. 작은 높이 차이만 두더라도 시각적으로 프라이버시를 보호받을 수 있어요. 전체 단지의 녹지 15% 정도를 동호대교 라인으로 하면 선형의 공원을 만들고 거기 상업가로를 만들고, 포켓 파크도 만들수 있어요. 그럼 일반인들이 압구정역을 나와 한강까지 걸어갈 수 있겠죠. 창의적이고 입체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데 건축의 묘미가 있습니다.

-그럼 이상적인 소셜 믹스는 뭘까요?

▶앞서 말했지만 공통된 추억을 만들 수 있는 공간을 도시에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공통의 추억을 만들 수 있는 공간은 공짜여야 합니다. 실내 공간이라면 도서관, 그 다음은 교회의 마당이 될 수도 있고, 제일 좋은 것은 공원이에요.

우리가 국민드라마, 월드컵을 보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잖아요. 그 사람을 알면 이해하게 되고 이해하면 친구가 될 수 있어요. 저는 이게 안 되면 대한민국 사회에는 미래가 없다고 봅니다. 너무 심각하게 분열된 사회니까요. 지금 이뤄지는 대규모 재건축을 거치며 이를 해결하지 못하면 훨씬 더 심각한 갈등의 시대로 갈 거라 봅니다.

-공급 얘기도 해볼게요. 서울에 공급이 더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서울은 대한민국의 수도를 넘어 뉴욕이나 런던이나 파리하고 경쟁해서 이겨야 되는 도시예요. 또 자원이 사람 뿐이죠. 그러니 서울은 도시 경쟁력을 키워서, 더 살고 싶은 도시를 만들어 이곳에 전 세계의 창의적인 사람들이 모이게 만들어야 해요.

밀도를 높이는 게 가장 쉬운 방법이지만 단순히 공급을 늘리는 건 정답이 아닙니다. 사람들 간의 시너지 효과를 높이는 그런 도시 공간 구조를 만들어야해요. 자연, 사람과 맞닿게 하면서 접점을 많이 만들어주고, 길거리에 나가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도시를 만들어줘야 합니다. 자동차를 타는 것보다는 지하철이나 걷는 것을 더 많이 하는 도시를 만들어줄 수 있어야 합니다.

뉴욕 같이 만든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파리 같이 만든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거든요. 뭔가 이전엔 없었던 걸 만들어야 되는 거예요.

-무량판 사태를 겪으며 건축 설계 업계의 열악한 현실이 밑낯처럼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건축업계에선 덤핑 수임과 최저가 낙찰 관행이 지속돼 부실 설계로 이어지고 있다고 항변합니다. 이런 구조에서 창의적인 설계가 제약되는 것 같기도 합니다. 해결 방안이 있을까요?

▶언젠가 터질 사건이었어요. LH라는 조직의 문제점도 있었고 그리고 또 그것 뿐만이 아니고 대한민국 건축계의 노동자들이 다 해외 노동자로 채워지고 있거든요. 그런데 그들은 직업윤리가 크지 않아요. 건설 기술사 몇 명이 또다른 감시의 눈을 더 둔다고 해결이 될까요? 감리에 감리에 감리가 생기겠죠. 그러니 직업 윤리를 만들어줘야 하고, 젊은 사람들이 건설 현장에 가서 일할 수 있을 정도의 여건들이 만들어져야 되는 게 맞고요.

-우리나라 건축업계가 외국에 비해 창의성이 떨어진다는 얘기를 많이 듣는데요. 구조적 문제일까요?

▶지금까지 좋은 건축이라고 하는 걸 요구해 본 적이 없어서 그래요. 건축주들이 좋은 건축을 보는 눈이 없었으니까요. 좋은 건축이 뭔지 알아야 좋은 건축을 선택할거고 그래야 좋은 건축가들이 살아남을 수 있거든요.

우리나라는 훌륭한 건축가가 많지만 그들이 설계사무소를 차리면 다 망해요. 좋은 설계를 알아봐주는 건축주가 없어요. 그리고 좋은 건축을 알았다면 그 건축가에게 기꺼이 돈을 지불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알게 모르게 좋은 건축가들이 많아요. 이를 보는 눈이 있어야 되고 그래서 실력이 안 되는 건축가들이 퇴출돼야 된다고 봐요. 그래서 제가 찾은 방법은 국민들이 일단 건축에 관심을 갖게 하자입니다.

정리=박자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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