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에서 잊혀진 사람들[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
● 죽어서도 이름 없는 탈북국군포로
유엔사 자료 등에 따르면 정전협정 후 공산군에 붙잡힌 국군포로는 약 8만2000여명, 이 중 8343명만이 인도되고 나머지는 북한에 억류됐다. 이들은 대부분 북한에서 수용소를 거쳐 탄광에서 강제노역에 시달렸다. 북한 내 국군포로는 2014년 560여 명이 생존해 있는 것으로 집계된 후에는 정확한 숫자도 파악되지 않고 있다. 조창호 소위 이후 2010년까지 80명의 국군포로가 탈북해 한국으로 왔다. 고령으로 일부만이 생존해 있다. 탈북국군포로는 북한에도 가족이 있어 살아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을 뿐 아니라 죽어서 부고도 내지 않는다고 한다.
북한 억류 국군포로는 탄광에서 임금은 커녕 안전장치도 없이 강제노역에 시달리고 차별 속에 지낸 사실이 몇몇 탈북 국군포로의 수기에 나와 있다. 허재석 씨는 ‘내 이름은 똥간나 새끼였다’에서 “국군포로는 죽어도 괜찮다는 생각으로 안전교육도 시키지 않고 바로 굴속으로 밀어 넣었다. 제일 낮은 막장에서는 기온이 40도까지 올라 숨쉬기도 힘겹고 땀을 비 오듯했다. 한참 일을 하다 보면 사람인지 짐승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탄광에서의 생활은 지옥이었다”고 증언했다.(허재석, 34쪽)
더욱이 국군포로는 본인이 평생 ‘43호’라는 낙인이 찍혀 차별을 받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자식에게도 이어졌다. 자식들도 ‘43호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진학이나 군입대, 취업 등에서 차별을 받는다. ‘국군포로’는 북한 사회에서 영원한 반동분자로 남아있다.(유영복, 195쪽)
● 북한의 부인, 남한의 무관심
북한은 공식적으로 국군포로의 존재를 부인하고 ‘전쟁 시기 소식을 알 수 없게 된 자’라고 부른다. 2000년 첫 남북 정상회담 이후 한국 정부는 국군포로를 이산가족의 일부로 분류해 협의하기로 했다. 실제로 이산가족 상봉 때 납북자와 국군포로를 ‘특수 이산가족’으로 분류해 만나도록 했다.
휴전협정상 명백히 ‘국군포로’이고 북한에 생존자가 있다는 것이 많은 귀환 포로를 통해 확인됐는데 별다른 송환 노력이 없었다. 한국 정부는 1960년대 초까지 군사정전위 등을 통해 송환을 요구했으나 북한이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자 사실상 손을 놨다.
북한 억류 국군포로들은 2000년 김대중-김정일 회담에 희망을 걸기도 했지만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그 후 노무현 문재인 대통령이 평양에 다녀왔지만 국군포로나 납북자는 거론되지도 않았고 한 명도 데려오지 않았다. 일본 정부가 공식적으로 규정한 납북 피해자 17명을 귀환시키기 위해 북일 접촉에서 가장 우선순위로 내세우는 것과 대비된다. 15명은 2002년 9월 고이즈미 총리의 평양 회담 직후 귀국했다.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의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에 앞서서도 3명의 미국 국적 억류자가 돌아왔다.
유영복 씨는 “북한이 (북한 억류 국군포로가 없다고) 억지 주장을 하니까 대화가 전혀 안 돼 하나도 안 데려왔다”며 “그럼 과연 유사시에 나라를 지키기 위해 최전방에 나가라 할 수 있겠냐”고 안타까워했다.(이혜민, 87쪽)
● 탈북국군포로, 김정은 상대 재판 잇단 승소
서울중앙지법은 2023년 5월 김성태(91) 씨 등 5명의 탈북국군포로가 북한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위자료 5000만원씩을 지급하라”고 승소 판결했다. 북한은 김 씨 등에게 강제노동을 시키며 억류한 반국가 단체로 북한의 행위는 고통을 준 불법행위라며 판결 이유를 밝혔다. 김 씨 등은 2020년 9월 소송을 함께 냈으나 소송이 오래 지연돼 3명은 작고하고 유영복 씨는 거동이 불편해 법정에 나오지 못했다.
앞서 서울중앙지법은 2020년 7월 한재복 씨 등 2명이 낸 소송에서 “북한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두 사람에게 각각 2100만 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북한에 대한 한국 법원의 재판권을 인정하고 손해배상 명령을 내린 최초의 판결이었다.
미국 워싱턴DC 연방법원도 2021년 2월 1968년 푸에블로호 사건과 관련해 23억 달러를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나포 당시 고문, 가혹행위 등에 대해서 승조원, 승조원 가족, 유족 171명에게 배상하도록 했다. 워싱턴DC 연방법원은 2018년 12월에도 북한 여행 중 억류됐다가 풀려난 뒤 숨진 대학생 오토 웜비어 가족들에게 약 5억113만 달러를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 미국은 선박 몰수, 한국은 안면몰수?
한국과 미국에서 잇따라 북한을 상대로 한 배상 소송에서 승소 판결이 나오고 있지만 판결 집행에서는 큰 차이가 있다.
한재복 씨 등은 승소 금액을 받기 위해 국내 매체들이 북한 방송 영상 등을 사용하고 지불한 저작권료를 걷어 온 남북경제문화협력재단(경문협)을 상대로 소송을 내 승소했다. 법원의 추심명령도 받아냈다. 그런데 서울동부지법은 2022년 1월 “경문협이 공탁한 저작권료는 북한 정부가 아닌 북한 작가 등의 소유”라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북한은 법적으로 권리 의무의 주체가 될 수 있는 권리능력이 없다고도 했다. 그런데다 고등법원은 경문협이 저작권료 지급에 관한 내용을 북한 측과 합의서에 명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추심 명령 집행을 신청한 한재복 씨 등의 신청을 각하했다.
소송을 대리하고 있는 구충서 변호사는 “북한의 저작권을 관리하는 기관은 정부 기관이고, 이 기관이 경문협과 계약으로 권한을 위임해 사실상 북한 정부의 소유인 저작권료를 배상금으로 할 수 있다”며 배상금을 받아내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 추심 집행 명령 소송은 대법원에 올라가 있어 상당한 시간이 걸릴 전망이다.
북한이 억류한 국군포로에 대한 강제 노역 등 행위에 대한 북한 당국이나 김정은의 배상에 대해 국내 법원에서 두 가지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것이다. 국내 법정에서 복잡한 법리 논쟁을 벌이는 사이 고령의 탈북국군포로 사망자는 늘어 2023년 8월 현재 80명의 탈북국군포로 중 12명만 남아있다.
반면 미국은 북한을 대상으로 한 배상 판결에서 승소한 뒤 배상 집행을 위해 북한 선박을 몰수했다. 오토 웜비어의 부모는 2019년 7월 법원에 북한 선박 ‘와이즈 어니스트’(Wise Honest) 호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면서 몰수 소송 청구서를 제출했다. 이 선박은 북한이 보유한 두 번째로 큰 대형 화물선으로 고철값만도 300만 달러에 이른다. 그해 10월 뉴욕 남부연방법원은 해당 선박에 대한 몰수 판결을 내렸다.
대학 3학년이던 웜비어는 2016년 1월 북한 여행 중 평양 양각도 호텔에서 정치 선전물을 훔치려 했다는 혐의로 15년 노동교화형을 선고받았다. 웜비어가 이듬해 6월 미국으로 돌아왔으나 귀국 6일 만에 사망하자 웜비어의 유족은 북한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 ‘6·25 기획 납북’
‘당신은 철사줄로 두 손 꽁꽁 묶인 채로/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맨발로 절며절며 끌려가신 이 고개여’
1956년 발표된 ‘단장의 미아리 고개’ 가사에 6·25 전쟁이 남긴 상처 중 ‘강제 납북’의 사연이 그대로 담겨있다.
북한은 전쟁 중 모든 점령 지역에서 남한 사회 각 분야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인사들에 대한 납치 계획을 세웠다가 조직적으로 납치하는 ‘기획 납치’를 자행했다.
납치 대상은 ‘저명인사’, 북한에 적대적인 ‘우익인사’, 남한 사회 요직에서 활동하던 ‘지식인 계층’ 등 크게 세 부류였다. 저명인사들은 납치된 뒤 북한 체제의 정당성을 선전하는데 동원됐다. 당시 언론에는 각급 법원 판사 38명이 행방불명으로 북한군에 의해 납치되었을 수도 있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동아일보 1950년 11월 12일 자)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상하이 임시정부의 민족대표로 참가했던 김규식, 손진태 서울대 문리대학장, 미군정청 민정장관과 2대 국회의원을 지낸 안재홍, 손기정 일장기 말소사건 때 동아일보 기자로 일장기를 지웠던 이길용, 국학자 정인보 등이 대표적인 저명인사들이었다.
북한은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병력 손실이 커지고 보급이 어려워지자 점령지에서 ‘의용군’이라는 이름으로 대대적으로 청장년을 강제 징집했다. 북한의 인재 납치는 북한 체제에 필요한 인재를 확보하고 남한에는 인력 활용에 타격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 납북 피해자는 10만 명가량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수치는 파악되지 않고 있다.
● ‘전후(戰後) 납북자’
납북자 가족의 고통은 이산(離散)의 아픔에 그치지 않는다. 납북 가족이 정치적 선전에 이용되고 일부는 간첩으로 남파되는 등의 공작으로 사회적으로 부정적인 인식도 생겨났다. 심지어 납북이 월북으로 오인되는 일까지 있어 사회적 불명예와 차별까지 당하는 경우도 있다.(납북자기념관, 78쪽) 북한은 ‘납북자는 없다’고 주장하며 생사 확인마저 거부하고 있어 납북자 구출을 위한 노력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북한의 납북, 납치가 6·25 전쟁 정전협정이 맺어진 후에도 계속됐다. 북한은 협정 이후 어선 비행기 납치와 베트남 전쟁 등을 통해 국내외에서 남한 국적을 가진 민간인 총 3835명을 납치했다. 이 중 500여명의 ‘전후 납북자’는 북한에 억류되어 있다. 1960년대와 1970년대 어선 납치가 대부분이지만 백주 대낮 여객기 납치도 있었다.(납북자기념관, 146쪽)
1987년에는 ‘동진 27호’ 어선이 납북됐다. 가족 일부는 몇 차례 이산가족 상봉을 했다. 최연소 선원 임국재 씨는 3차례 탈북을 시도하다 붙잡혀 정치범 수용소에 수감됐다가 사망했다는 주장도 나왔다.
● KAL 납치 ‘특수이산가족’이 된 미귀환자
그간 정부는 목숨을 걸고 전쟁에 나섰던 국군포로 송환에 손을 놓았을 뿐만 아니라 ‘전후 납북자’ 중 대한민국 상공에서 납치해 간 여객기의 승무원과 승객들도 사실상 방치했다.
1969년 12월 11일 오전 9시 반 강릉발 김포행 첫 비행기 YS11A가 권총을 소지한 채 탑승한 간첩 조창희(당시 42세)에 의해 납북됐다. 64인승 쌍발기에는 승객 47명과 승무원 4명이 탑승했다. 1970년 2월 14일 KAL기 납치 피해자들이 판문점을 통해 돌아왔으나 승무원 4명과 승객 7명은 돌아오지 않았다.
2001년 2월 26일 평양고려호텔 이산가족 상봉장에 KAL 승무원 성 모 씨가 김일성대 교수인 남편, 20대의 아들딸과 함께 ‘특수이산가족’으로 나와 남측의 모친을 만났다. 다른 미귀환자 10명은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 尹 정부, ‘납북자 대책반’
윤석열 정부는 통일부에 납북자와 국군 포로, 억류자 문제 담당 기구를 장관 직속으로 신설해 운영하기로 했다. 정전 협정 체결 70주년을 하루 앞둔 7월 26일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는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정부에 납북자 전담부서를 만들어 달라고 요구했다. 이같은 요구가 나온 지 사흘 후 신임 김영호 장관이 취임하면서 통일부가 내놓은 방안이다. 납북자 전담 기구에 대해 “통일부 조직의 어젠다이자 장관의 어젠다로 챙기기로 했다”고 강조했다.
정전 70년을 맞으면서 가장 큰 현안으로 남았던 납북자 및 가족들의 인도적 비극과 상처가 어느 정도 치유될 수 있을지 관심이다. 북한의 핵과 미사일 능력 고도화로 남북 관계가 어느 때보다 경색되어 있는 가운데 북한 정권의 ‘아킬레스건’인 인권 문제에서 어떤 진전이 있을지 관심이다.
<참고 문헌> |
유영복,『운명의 두 날』, 도서출판 WON, 2010. 이혜민 지음, 『아무도 데리러 오지 않았다』, 깊은 바다 돌고래, 2023. 허재석 지음, 『내 이름은 똥간나 새끼였다』, 원북스, 2008. 『잊지 않기 위하여』, 국립6·25전쟁납북자기념관, 2019. 김강녕, ‘한국의 국군포로문제 해결노력과 향후 과제’ 『한국과 세계』, 제1권 2호, 2019. |
구자룡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 bonh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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