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드 레짐'의 부활…민주화 좌절 반복하는 동남아 정치 [박종현의 아세안 코너]
미얀마 쿠데타·캄보디아 세습 사태
필리핀, 마르코스 정치가문 재등장
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 모범 사례
“피타 후보 본인이 포함되지 않은 청원인들의 권리가 침해된 적이 없고, 직접적으로 연관되지 않았다. 청원 제기 자격이 없어 해당 사안을 심리하지 않기로 만장일치로 결정했다”(헌법재판소, 총리선출 투표 무산에 대한 위헌 여부를 판단하지 않기로 했다며)
지난 5월 치러진 총선에서 개혁·중도 세력 승리로 군부정권 종식 기대감이 분출됐던 태국 정국이 3개월째 혼란스러운 모습이다. 총리 선출을 통한 민주화 일정 복원이 지연되고 있다. 총선에서 수도 방콕을 중심으로 유권자들은 개혁성향의 전진당(MFP·까우끌라이당)을 제1당으로 만들었지만, 보수세력과 군부의 반발로 정치·민주화 시계가 불투명한 상황에 처한 것이다.
◆ 태국 총리 선출 실패 반복…1932년 입헌제 이후 쿠데타 22차례 발생
태국에서 목격되는 일련의 정치 일정은 동남아 민주주의 과제가 쉽게 실현되기 힘들다는 점을 드러내고 있다. 20세기 초까지만 하더라도 태국과 오랜 라이벌이었던 미얀마의 상황은 더 열악하다. 2021년 2월 쿠데타로 아웅산 수치 국가고문 중심의 민간정부는 군부정권에 밀려났다. 국민 저항과 국제사회 제제·비판에도 군정은 국가비상사태를 연장하며 협상을 거부하고 있다.
◆ 군정 미얀마, 순번제 아세안 의장국 포기
미얀마 군정 체제는 주변 국가에도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 내정 불간섭주의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는 동남아국가연합(아세안·ASEAN)에도 타격을 주고 있다. 군정에 대한 대응을 두고 크게 대륙부 동남아와 해양부 동남아가 의견을 달리하며 아세안이 좀처럼 통일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다.
군정은 2026년 예정된 미얀마의 아세안 의장국 지위를 포기하겠다는 입장을 최근 표명했다. 아세안 의장국은 국명의 영어 알파벳 순서에 따라 회원국이 돌아가면서 맡고 있다. 올해 의장국은 인도네시아이며, 2024년 라오스, 2025년 말레이시아 차례가 예정돼 있다. 1997년에 아세안에 가입한 미얀마는 2006년에도 의장국 지위를 포기했으며, 민간정부가 구성됐던 2014년엔 의장국 지위를 수행했다.
태국·미얀마·캄보디아에서는 군이 최고 권력집단이거나 이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점이 확인된다. 미얀마는 짧은 기간 민주주의 궤도에 올라탔다가 이내 쿠데타를 경험했으며, 태국에서는 1932년 입헌군주제 도입 이후 군사쿠데타만 22차례 발생했다. 캄보디아에서도 군부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눈을 해양부 동남아로 돌리면 어떨까, 대륙부 동남아에 비해 민주화 경험과 여건이 낫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장밋빛 상황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단적인 사례가 필리핀이다.
필리핀은 1980년대 중반 ‘피플 파워’로 민중의 힘을 보여줬지만, 일부 정치가문이 돌아가며 차지하는 집권체제를 끝내지 못하고 있다. 물러났다가도 다시 돌아오는 게 필리핀 족벌 정치체제의 한 특징이다. 지난해도 그런 과정을 보여줬다. 피플 파워로 밀려나 망명지 미국 하와이에서 숨졌던 독재자 마르코스의 장남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가 대통령이 된 것이다. 독재의 잔영이 강한 ’올드 레짐‘(구 체제)의 귀환이었다.
◆ 내년 2월 대선 인도네시아…구체제 프라보워 포함 후보 3인 각축
인도네시아에서는 10년 연임의 조코 위도도(조코위) 대통령이 연정을 펼치고 있다. 10월 정당들의 공식 후보 지명을 앞두고 3명의 유력주자가 경쟁을 펼치고 있다. 최근 구체제의 상징인 프라보워 수비얀토 국방장관이 여론조사에서 선두를 달리며, 지지세를 키우고 있다. 프라보워 장관은 2014년, 2019년 2차례 대선에서 조코위 대통령에게 연이어 패했다. 이보다 앞서 2009년엔 수카르노푸트리 투쟁민주당(PDI-P) 대선후보의 러닝메이팅 부통령 후보로 출마했다가 뜻을 이루지 못했다.
프라보워는 대선 패배에서 협치를 모토로 내건 조코위 대통령의 선택에 따라 연정에 장관으로 참여했다. 독재자 수하르토의 사위였지만, 그가 실각한 1998년 아내와 이혼했다. 수하르토는 군사쿠데타를 통해 32년간 장기 집권했다가 1990년대 말 외환위기 무렵 ‘에라 레포르마시’(개혁시대) 시작을 앞두고 실각했다. 프라보워는 당시 민주화 열기 속에서 민주인사 납치 등에 개입했다는 혐의로 비판받고 있다.
◆ 말레이시아, 민주주의 모범적 구현
여러 색감과 층위를 드러내지만 동남아 대부분의 나라들이 민주정치 체제를 뿌리내리지 못한 가운데 연방체제의 반도국가 말레이시아의 정치상황은 확실히 모범적으로 보인다.
12일 치러진 말레이시아 지방선거는 의미 부여가 가능한 과정과 결과를 보여줬다. 지방선거는 보편적 민주주의 실현 가능성을 증명해 냈다. 말레이계와 중국계, 인도계 등으로 국가 내부가 복잡한 다민족 체제라는 어려움 속에 이룩한 성과였다. 동남아 이웃나라들이 군부의 영향으로 민주주의 노정에서 힘에 부쳐하는 것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줬다.
◆ 말레이시아 정치…개혁 정부 vs 보수 야권
무히딘 야신 전 총리가 이끄는 야권은 사실상 집권여당이 패배한 선거였다고 규정하고 있다. 야권이 6개주 전체 245석 가운데 146석을 차지하고, 그간 불모지나 마찬가지였던 슬랑오르주 등에서 약진을 경험한 덕분이다. 야권 약진에는 젊은 세대의 보수화와 민족지향의 표심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분석된다.
최근 몇 년 사이 집권세력이 여러 차례 바뀌면서 중앙정부의 혼란양상이 드러나기도 했지만, 이는 선거결과에 따라 국정을 책임지는 보편적 민주주의가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미얀마 혹은 태국에서 포착되는 군부의 영향력도 크지 않다. 말레이시아는 다민족·다종교 국가라는 조건 속에서 통합적 가치를 중요시하고 있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말레이시아의 온전한 상황은 민주화 일정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고 있는 아세안의 다른 회원국의 상황에 비해 도드라진다. 말레이시아 정치권과 유권자들은 비교우위 평가에 따른 박수를 받을 만하다.
박종현 기자 bali@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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