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남수의 視線] 공산전체주의 맹종자들

천남수 2023. 8. 18.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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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요미우리신문은 지난 16일 ‘윤 대통령 역사 문제 언급 없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윤석열 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에 대해 “옛 징용공(일제 강제동원 노동자의 일본식 표현)이나 위안부 등 역사문제에 대한 언급이 없고 일본의 책임을 호소해 온 역대 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와 차이가 두드러졌다”고 평가했다. (연합뉴스)

지난 15일 광복절을 지나자 갑자기 울화병이 났다. 치밀어 오르는 화를 누를 수 없다. 어디 담벼락에라도 분풀이를 해야 할 정도다. 돌이켜 보면, 짧지 않은 인생을 살면서 요즘처럼 화가 나는 경우도 드물다. 한국전쟁의 총성이 멈춘 지 70년.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며 성공신화를 이룩한 대한민국을 좀먹은 세력이 아직도 이 땅을 배회하고 있다니. 21세기 디지털 첨단시대에 그것도 공산전체주의라는 유령이. 어찌 화가 나지 않겠는가.

지난 광복절 윤석열 대통령은 광복절 경축사에서 공산침략에 맞서 유엔군과 함께 싸워 우리의 자유를 지키고, 그 후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산업화의 성공으로 세계가 놀랄 만한 성장과 번영을 이루고 있는데, 공산전체주의를 맹종하여 조작선동으로 여론을 왜곡하고 사회를 교란하는 반국가세력들이 여전히 활개를 치고 있다고 밝혔다. 또한 분단의 현실에서 이러한 반국가세력의 준동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걱정했다.

이 땅의 공산전체주의 세력은 자유사회가 보장하는 법적 권리를 충분히 활용하여 자유사회를 교란시키고, 공격하고 있다면서 이것이 공산전체주의 세력의 생존방식이라고 했다. 특히 공산전체주의 맹종자들은 민주주의 운동가라든가 인권 운동가, 진보주의 행동가로 위장하고 허위 선동과 야비하고 패륜적인 공작을 일삼고 있다고 폭로했다. 그러면서 이러한 공산주의 세력은 물론, 맹종 세력과 추종세력들에게 결코 굴복해서는 안 된다고 힘주어 강조했다.

윤 대통령의 경축사 상당 부분을 차지한 이 내용을 보면, 아직도 우리나라에는 공산전체주의자들이 곳곳에 암약하면서 우리 사회를 해치고 있는 듯 보인다. 공산주의를 그저 맹신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고, 이를 추종하는 사람까지 합치면 아마도 어마어마한 세력들이 사회혼란을 부추기고 있다는 것. 그것도 민주주의와 인권, 진보 등으로 철저히 위장해서 한시라도 빨리 우리 사회를 가난과 궁핍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으려고 시도하고 있으니, 어찌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발본색원(拔本塞源)! 근본까지 모조리 없애버리겠다고 굳게 다짐하는 것은 물론이다.

▲ 고 김지하 시인은 1970년 풍자시 ‘오적(五賊)’으로 필화를 겪고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는 등 독재에 항거한 대표적 저항시인이었지만, 1991년 조선일보에 쓴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라는 칼럼으로 변절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사진은 1991년 5월 5일 조선일보 칼럼·연합뉴스)

이를 위해서는 우선 공산전체주의 맹종자들의 정체를 파악해야 한다. 윤 대통령에 의하면, 그들은 진보적 성향을 지니고 민주주의와 인권 보호를 위해 활동하는 사람 중에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은 너무 많다. 어떻게 이들 중 공산전체주의 맹종자들을 가려낼 수 있을까. 아, 이들 중 허위 선동과 야비하고 패륜적인 공작을 일삼는 자들을 찾아내면 되겠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갑자기 나는 누구인지, 나는 지금 어느 시대에 살고 있는지 갑자기 혼란스러워졌다. 일단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볼 수밖에.

순간, 1945년. 광복의 기쁨도 잠시, 남북은 갈라졌고 국민은 좌익과 우익으로 나뉘어 대립하는 등 혼란스러운 장면이 눈앞에 펼쳐졌다. 김구, 여운형, 송진우, 장덕수 선생이 암살되는 등 좌우를 막론하고 안타까운 죽음이 이어졌다. 1950년. 급기야 한국전쟁이 발발되면서 동족 간 무자비한 학살이 자행됐다. 같은 인간으로서, 그것도 얼굴을 맞대며 살았던 동족 간에 서로 죽고 죽이는 참상이 벌어졌다. 1953년. 어렵사리 전쟁을 멈추고도 남북은 크고 작은 충돌을 하면서 적대적 관계는 지속됐다. 분단의 여파도 있었다. 1970년대 인혁당 사건 등으로 많은 젊은이가 간첩으로 몰려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1980년대 들어서는 민주화 운동을 향한 ‘빨갱이’ 낙인찍기가 유행처럼 번졌다.

문득, 허상을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랜 민주화 투쟁의 과정을 거치면서 1987년 6월 민주항쟁을 계기로 마침내 이 땅에 민주주의 시대가 열린 것 아닌가. 그러나 수십 년 이어온 이념 대립이 온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실제로 1990년대 들어 공안정국이 전개됐고, 잇따른 젊은이들의 죽음이 있었다. 그리고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라는 한 시인의 일갈에 민주화 운동마저 한순간에 부도덕한 것이 되어 버렸다. 수십 년이 흐른 뒤에야 무혐의가 됐지만, 유서 대필 사건은 언제든지 민주주의가 후퇴할 수 있음을 일깨워 줬다.

그럼에도 한국 민주주의는 한발 한발 나아갔다. 각계각층의 요구를 제도화하고, 정책에 반영했다. 이와 함께 국민의 의식도 한층 성숙해졌다. 사회 전반에 걸쳐 선진문화가 형성됐다. 특권과 반칙으로 혜택을 보는 일들은 현저히 줄어들었다. 나보다는 상대를 먼저 배려하는 사회 풍토도 정착되어 갔다. 이는 선진국의 모습이었다. ‘어느 날 깨어보니, 선진국이 되어 있었다’라는 말이 실감 났다. K-팝을 비롯해 K-드라마, K-뷰티, K-푸드, K-웹툰 등 대한민국은 세계가 부러워하는 문화강국으로 우뚝 섰다. 그러나 정치는 예외였다.

▲ 윤석열 대통령이 ㅈ난 15일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 대강당에서 열린 제78주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경축사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민주주의는 대화와 타협을 가능하게 하는 제도다. 사회 전반에 걸친 양극화가 심화했다고 하더라도 이를 조정하는 것이 정치다. 국민의 선택으로 국정을 대행하는 사람들이 정치인이다. 그들의 결사체가 정당이다. 국민 총의의 집합체가 국회다. 그러나 국회는 대립을 넘어 치킨게임을 벌이고 있다. 현 정부는 전 정부와의 대립을 노골화하고 있다. 여야 간 정권교체도 몇 차례 있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언론도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다. 정치가 제 역할을 못함으로써 분열과 혼란이 심화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있는 우리 정치의 현주소다.

광복절 윤석열 대통령의 경축사는 한국 정치의 후진성을 그대로 노정 시켰다. 앞서 필자가 분노했던 진짜 이유는 이 땅의 공산전체주의가 활개를 치기 때문이 아니다. 국민을 향해 공산전체주의 맹종자들, 반국가세력이라고 했다. 민주주의와 인권, 진보라는 탈을 쓰고 여론을 왜곡하고 조작 선동하고 있다고 했다. 이는 78년 전의 잣대를 2023년에 들이대는 것과 같다. 21세기 디지털 첨단시대에 느닷없는 사상논쟁이 대통령의 입에서, 그것도 광복절 78주년 경축사에서 듣게 될 줄을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럼 이렇게 시대착오적 것을 윤 대통령은 왜 꺼냈을까.

설마 적을 구체적으로 특정함으로써 위기를 벗어나려는 의도였을까. 물론 아닐 것이다. 내년 총선을 겨냥한 의식적 발언이었을까. 당연히 아닐 것으로 믿고 싶다. 대통령의 말은 천금과 같다. 그의 입을 통해 국민은 오늘을 돌아보고, 내일을 기대한다. 그의 역사에 대한 인식을 통해 미래의 꿈을 키운다. 그러나 대통령의 말은 광복절 경축사에서 언급한 조작과 선동을 일삼는 공산전체주의 맹종자들의 행태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정치적 이익을 위해 사실을 왜곡하고, 현실을 과장함으로써 국민을 갈라치기 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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