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도의 숨은 명산 고성 거류산] 소가야 거류산성 본거지…엄홍길을 키운 산
새벽 숲길의 새소리는 청량감을 더하고 고속도로 자동차 질주 소리가 섞여서 들린다. 곰솔·산벚·예덕나무 사이로 아침 햇살이 길게 드러누웠는데 흐릿한 숲속을 환하게 비춰주고 있었다. 장마철이라 오후부터 비 내린다고 해서 아침 일찍 산행하기로 했다. 오전 5시에 일어났다. 엄홍길전시관이 산행 들머리, 넓은 주차장과 화장실, 급수대도 있다. 입구에서부터 키 큰 곰솔 숲길 따라 거류산 정상까지 3.2km, 그나마 약간 흐린 날씨지만 나무데크 오르막길에는 바다에서 떠오르는 해가 구름에 살짝 가려졌다.
오전 6시 반 갈림길(정상 2.8·전시관 0.3·당동리 5·장의사 1.5km) 오른쪽으로 당동포구가 보인다.
거류산(571m)은 내륙의 산들에 비해 높지 않지만, 바닷가 해발고도 원점에서 시작하는 산치고 꽤 높은 편이다. 느닷없이 우뚝 솟은 산 능선에 오르면 고성·통영 지역이 잘 보인다. 곰솔과 바위가 이곳의 주인인데 정상 못미처 2,000여 년 전 소가야 때 신라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거류산성의 자취가 남아 있다. 고성군의 진산으로 고성 벌판, 당동과 당항포, 한려해상의 풍경이 멋스럽다. 전시관까지 되돌아오는 데 6.4km 정도 4시간가량 걸린다.
돌탑을 지나자 비목·개암·진달래·청미래덩굴·산뽕·자귀·붉나무들이 제철을 만난 듯 가지와 이파리의 기세가 맹렬하게 뻗었다.
"거류에서는 여자들이 오래 살아. 다리 벌린 아랫도리 닮은 산이라…."
엊저녁 기운 넘치던 포구의 식당 주인 해설에 한참 웃었다. 하여튼 주모의 기세도 대단했지만 나는 골산骨山의 양기를 받아서 그렇다고 둘러댔다.
오전 6시50분 편백·삼나무 숲에서 잠시 숨을 고른다. 엉겅퀴가 자주색 꽃을 피우며 길섶에 섰다. 이 산의 식물은 이파리마다 유난히 푸르고 드문드문 벽오동나무처럼 생긴 것이 보인다. 벽오동은 오梧, 동桐은 오동, 통칭해서 오동나무다. 자세히 보니 벽오동이 아니라 예덕나무인데 비슷하게 생겼다.
잠시 후 바위 전망대에서 통영항이 보인다. 점점이 박힌 다도해, 안정 국가산단, 어젯밤 해안의 둥근 불빛의 정체는 가스 돔이었다. 자귀나무는 꽃을 피우려 봉오리 맺었고, 바위 틈에 산조팝·소사나무, 물안개 머금은 곰솔 이파리 끝에 물이 뚝뚝 듣는다. 식물들이 살기에는 열악한 바위산이지만 몰려다니는 안개 덕분에 이파리마다 유난히 푸름을 알겠다.
소나무 껍질이 검어 검솔, 곰솔이 되다
바닷바람 버티며 바위에 선 곰솔의 줄기에 검푸른 이끼가 덮여 산전수전 다 겪은 연륜을 실감한다. 곰솔로 부르는 해송海松은 해안 지역을 따라 자란다. 자람이 빠르고 척박한 땅, 바다의 거친 바람과 염분에도 잘 견뎌 방풍림으로 많이 심는다. 거북등처럼 갈라지는 나무껍질이 검어 검솔, 곰솔이 됐다. 바늘처럼 뾰족한 잎이 억세 강인함의 상징이다. 일본에서는 사무라이 쿠로마츠黑松, 진짜 소나무로 친다.
아무리 여름날 우기雨期라도 오늘은 맑았으면 좋으련만 희망 사항일 뿐, 발아래 보이던 바다는 잔뜩 흐려졌고 안개는 금방 산길을 다 덮어버렸다. 굴피나무에 걸린 거미줄과 중나리꽃, 돌채송화는 안개를 뒤집어써서 온통 하얗다. 호수 같은 바다, 오밀조밀한 섬, 밭과 집을 연결하는 고샅길. 바위 쉼터에서 바라보는 흐릿한 전경을 헤아리다 어느덧 돌탑의 문암산 495m(정상 1.6·전시관 1.6·장의사 1km) 이정표를 만난다.
개망초·승마·까치수염은 길섶에 서서 하얀 꽃을 피웠고 나뭇가지에 걸린 거미줄은 안개에 늘어졌다. 오른쪽 바다도 해무에 묻혀버렸다. 안갯길을 걷지만 능선 왼쪽의 도로와 마을은 또렷하다. 오전 7시 반, 곰솔·때죽·산벚·소사·산뽕·비목·사방오리·누리장·국수·피나무 숲 그늘 지대에 들어서니 컴컴하다. 까치수염은 특이하게 삐죽삐죽 하늘 바라보며 곧추섰다.
오전 7시 50분, 당동 임도 갈림길(정상0.4·전시관 2.8·당동 임도0.3km) 지나 당동만과 통영 바다 쪽이 보이는 듯싶더니 이내 산성 터, 거류산성에 닿는다. 거류산성은 산봉우리를 중심으로 계곡과 절벽을 안고 돌아가며 쌓는 포곡식包谷式 산성이다. 고성에 있던 소가야가 동쪽으로 신라와 남쪽으로 왜구를 방어하기 위해 쌓은 것이라 한다. 둘레 1.4km 남짓. 남쪽에 문 터, 우물 터가 있다. 바위 지대에서 올망졸망 열린 개암을 따 먹으니 아직 풋밤 맛이다. 돌탑을 새로 만들었는데 안개에 우뚝 서서 신비감을 준다. 바위에 산조팝·사스레피나무. 돌탑 사이로 햇살이 희미하고 이파리마다 안개 물방울이 맺혔다.
'걸어 산'이 거류산, 기생 월이 사연
오전 8시20분, 해발 571m 거류산巨流山 정상(전시관 3.2·감서리 1.9·거북바위 0.4·장군샘터 0.4·덕촌마을 2.2km)에 닿는다. 감시초소와 바위, 나무들마다 연기를 뒤집어쓴 듯 잿빛, 온통 안개 산이다. 꼭 9년 만에 다시 온 산이라 감회가 새롭지만 오늘 산행은 안개 덮인 시간을 정확히도 맞췄다. 그때는 표지석 옆에 오래된 소사나무가 있었는데, 올라오면서 봤던 어린 가지에 여러 개 돌을 매달아 둔 것과는 관련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어떤 처녀가 밥을 짓다 들판을 보니 산이 걸어가는데 놀라서 서라고 하자 그 자리에 섰다고 한다. '걸어 산'이 거리산巨吏山, 거류산巨流山이 됐다는 것. 소가야 산성이 있어서 태조太祖산, 가라加羅산, 조선 후기부터 거류산 명칭이 굳어졌다. 삼각뿔 모양으로 깎아지른 바위 산세가 알프스산맥 4,000m급 마터호른Matterhorn을 닮았다고 해서 고성의 마터호른이라 부르기도 한다. 산행 들머리 입구 쪽에 세계적인 산악인 엄홍길전시관이 있는데 엄 대장은 이곳 출신이다. 산악 장비 등이 전시돼 있다.
맑은 날에 정상에서 보면 활 등처럼 육지로 쑥 들어온 당동만灣을 볼 수 있고 사방이 탁 트였다. 북쪽으로 당항포, 시계방향으로 구절산, 오른쪽 당동만, 면화산, 통영시, 벽방산과 고성만 너머 갈모봉산, 천왕산, 고성 벌판은 그림 같지만 흐리다. 당항포 수문다리 왼쪽은 바다가 끝나는 지점으로 왜군들이 속은 갯가라 해서 '속싯개'로 불린다. 간척사업으로 예전의 모습은 많이 사라졌다. 머리가 떠다닌다고 하여 '두호頭湖마을', 육지로 도망한 곳을 '도망개', 도망간 왜군이 멀리 가지 못하고 잡혔는데 '잡안개'라 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어떤 나그네가 고성의 주막집舞妓亭에 찾아왔다. 기생 월이月伊는 그가 전에도 온 것을 알고 있었다. 조선을 염탐하러 온 첩자였다. 동래·진해·마산을 지나 정세를 살피러 온 것. 술에 취해 "일 년 후면 내가 이 고을의 주인이 될 것"이라 지껄이는데 그의 품속에서 지도를 발견한 월이는 육지를 바다로 그려놓는다. 당항포가 막다른 곳이 아니라 고성 읍내까지 바다로 이어진 것처럼 바꾼다. 마침내 전쟁이 터져 지도만 믿고 왜군들이 고성으로 함대를 끌고 들어오다 갑자기 바다가 사라지고 육지가 나오니 우왕좌왕하다 전멸한다. 당항포해전이다. 진주에 논개가 있다면 고성엔 월이가 있었다.
잠시 바위에 앉아 빵·우유·달걀로 아침을 먹는데 바람에 어설프고 일기가 좋지 않아 올라온 길로 다시 돌아가기로 했다. 화살나무·노박덩굴, 울긋불긋 꽃싸리, 까치수염, 중나리와 헤어져 내려가려니 뻐꾸기는 대놓고 떠들고 새들도 분주하다. 안개는 이리저리 산성을 몰고 다닌다.
춥고 바람 불어 바쁘게 내려가는데 오전 9시 20분 문암산 근처에 이르니 안개가 걷히고 사방이 환해졌다. 한반도 지형과 비슷하다는 당동 포구를 배경으로 몇 번 셔터를 눌러보지만 여의찮다. 내리막길에서 올라오는 대규모 관광버스 산악회원들과 만났다. 한참 동안 그 자리 서서 길을 비켜주다 장의사 갈림길(장의사 1.4·당동리 4.9·거류산 2.7·전시관 0.5·문암산 1.7·거북바위 3.6km). 입구에 거의 다 내려왔다. 오늘은 안개나라 숲의 요정을 만나고 온 듯. 다시 햇살이 내린 솔숲을 걸으니 휘파람 소리 절로 난다. 멀리 통영항 쪽으로 눈길을 돌려 흘러가는 섬을 헤아리다 그만두기로 했다.
산행길잡이
엄홍길전시관 주차장 ~ 나무계단(데크) ~ 문암산 ~ 당동 임도 갈림길(쉼터) ~ 산성 터 ~ 거류산 정상 ~ 이하, 같은 길로 내려오는 원점회귀 코스
※ 왕복 6.4km, 4시간 정도, 주차장 주차료 없음, 급수대, 화장실, 먼지떨이기 이용 가능. (무료 관람, 문의 055-670-2674)
교통
통영대전고속도로 동고성IC → 거류면 당동리 방향으로 내려서 좌회전
※ 내비게이션 → 엄홍길전시관(경남 고성군 거류면 거류로 335)
대중교통은 고성 버스터미널에서 당동으로 가는 농어촌버스로 바꿔 타고 마동정류장 하차.
숙식
고성군 거류면, 고성 읍내, 통영 시내에 모텔과 다양한 식당이 즐비하다(주말 복잡).
※ 거류면 당동리에 숯불구이(이진 숯불구이), 횟집 등이 많다(통영시 광도면 인접).
주변 볼거리
당동 포구, 당항포 관광지, 고성 공룡박물관, 통영항 일대 등.
월간산 8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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