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적 사고’ 앞세웠던 수능 30년…공부의 목적을 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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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8월20일 아침. 후덥지근한 공기를 가르고 전국 수험생 74만2668명이 시험장으로 향했다. 교육부는 시험감독관 4만명을 투입해 삼엄한 관리에 나섰다. 처음 시도한 언어와 외국어 영역 듣기 평가를 앞두고 국방부와 교통부에는 비행기 이착륙 자제를 요청했다. 1981~1992년(시행일 기준) 12년의 학력고사 시대가 막 내리고 최초의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이 치러지는 날이었다.
박도순 고려대 명예교수(교육학)는 이날 치러진 대학교육적성시험(수능의 옛 이름) 실시 계획을 세상에 내놓으며 ‘새 시험의 이상’을 설명했다. “시험 내용을 ‘기초수학능력’과 ‘고등정신능력’ 측정에 둠으로써 암기 위주의 입시 교육을 방지하고… 과외 수요 감소 등의 효과를 기대한다. 대학입학시험이 학교에 주는 영향은 자연히 줄어들 수밖에 없고, 더욱 건전한 방향으로 학교 교육을 이끌 수 있다.”(한겨레 1989년 8월30일치 기사) 수능은 애초 ‘통합적 사고력’을 측정하고, 이를 통해 대학 공부에 필요한 만큼의 자질을 판단하는 ‘자격시험’으로 설계됐다. 이는 ‘건전한 학교 교육’만으로 얻을 수 있어야 했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2023년 8월. 고3 김희주(이하 가명)양은 ‘대입 상대평가 헌법소원 청구’의 원고로 이름을 올린 채 3개월 앞으로 다가온 수능을 준비하고 있다. 지난해 11월 교육시민단체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은 ‘대입 상대평가 헌법소원 청구 및 위헌 선언’ 기자회견을 열어 “살인적인 대입 상대평가는 학생들의 건강권, 행복 추구권을 무참히 짓밟고 있다”고 청구 이유를 밝혔다. 취지에 공감한 희주양은 다른 고교생 2명과 원고로 동참했다.
하지만 희주양도 수능을 포기하진 못했다. “선생님도 사회에서 수능으로 인생이 바뀌는 것처럼 말하니 놓아버리는 건 두려웠어요.” 여느 수험생처럼 그도 학교, 학원, 스터디 카페를 오가며 하루 15시간 공부한다. 2023년 여름 희주양한테 닥친 수능 부담과 그에 따른 사교육, 이 모든 수고의 혼란 앞에 희주양의 혼란 앞에 박도순 교수마저 “수능은 한계에 이르렀다”고 말했다.
부담: 가혹해진 상대평가와 늘어난 무게감
희주양은 수능을 3개월 앞두고 자신이 느끼는 부담의 이유로 ‘상대평가’와 ‘입시에서의 무게감’을 짚었다. “시험이 다가오면 친구 보면서 ‘내가 올라가려면 누구든 아래로 내려와야 하는데’ 생각하는 나 자신이 싫어요. 수능이 인생의 출발점이라는 얘기를 들을 때는 확 두려워져요.”
30년 동안 지역 격차, 노동시장 격차를 따라 대학 서열화는 되레 공고해졌고 수능은 애초 수학 능력 자격 검증을 지향했던 이상과 달리 학생의 순위를 매겨 대학 배치를 결정하는 구실을 맡게 됐다. 학생 변별이 수능의 핵심 목적이 될수록 상대평가는 한층 촘촘해졌다.
6개 영역으로 구성된 현재 수능에선 국어·수학·탐구 영역이 상대평가로 점수 매겨진다. 2005학년도 수능부터 원점수가 성적표에서 사라지고, 0~200점 표준점수(평균으로부터의 거리를 나타낸 점수)만 표시돼 상대평가로서 성격이 한층 짙어졌다. 국어·수학 영역 표준점수는 같은 과목 시험을 보는 다른 학생들의 실력(공통과목 평균)까지 따져 등수를 매긴다. 유례를 찾기 어려운 복잡하고 강력한 상대평가 체제다.
수능이 꾸준히 ‘작은 차이도 점수로 구분할 수 있는 변별력’을 앞세우는 과정에서 특히 상위권 대학을 중심으로 입시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늘었다. 다른 입시 요소에서 공정성 문제가 일 때마다 정량화된 변별력이 ‘수능으로의 회귀’를 주장하는 근거가 된 탓이다. 다양한 전형 요소 등장으로 꾸준히 줄어들던 수능 중심의 정시 비중은 학생부종합전형 신뢰도가 문제되자 2022학년도부터 서울 지역 주요 대학 16곳을 중심으로 20~30%에서 40%대로 확 높아졌다.
애초 상상했던 모습이 아니다. 박도순 교수는 “수능은 대학별 고사 등 여러 평가 방식 가운데 하나의 참고 자료로 쓰자는 계획이었는데 지금은 필수적이고 절대적인 잣대가 됐다”고 짚었다. 상대평가와 절대적인 잣대라는 무기를 쥐고 강력한 변별 도구가 된 수능은 입학 점수 구분을 통해 다시 대학의 서열화를 강화하는 순환 구조를 만들었다.
영향: 학원과, 학원으로 변한 학교
수능의 가장 직접적인 영향은 사교육을 둘러싼 좌절에서 읽을 수 있다. 헌법소원에 동참한 학부모 박영미(56)씨는 사교육 앞에 자녀와 함께 운 기억을 떠올렸다. “아이가 ‘미적분의 최대 최소 정리’ 문제가 안 풀린다고 한 적이 있는데, 이과 전공자인 나도 도저히 답을 모르겠더라고요. 다음날 친구에게 물어보니 바로 풀더래요. 학원에서 풀이법을 통째로 외웠다면서.” 박씨는 “아이를 학원에 보내지 않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는데 벽에 부딪히고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면서 같이 울었다”고 했다.
학생 1인당 월평균 사교육비는 2012년 23만6천원에서 2022년 41만원으로 올랐다. 이혜정 교육과혁신연구소장은 “수능이 암기 위주 문제를 벗어났다 해도, 여전히 오지선다형으로 누군가 정한 옳고 그름을 맞히는 방식인 탓에 문제를 많이 푸는 학습 방식이 유리할 수밖에 없다”고 짚었다.
오지선다 문제 풀이에 특화된 사교육과 경쟁하며 공교육도 차츰 변질했다. 학부모 최선영(50)씨가 자녀에게 헌법소원 참여를 제안한 이유는 ‘학원처럼 변한 학교’에 대한 문제의식이다. “아이가 중학생일 때 고등학교 입시 설명회에 갔는데, 교무부장이 ‘우리 학교는 고2 때까지 교육 과정을 마치고 고3 때는 수능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자랑하더라고요. 기가 찼어요.” 선영씨 자녀는 다른 학교로 진학했지만 그곳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고3이 되자 ‘심화수학’ 같은 수업 이름을 내걸고 교육방송(EBS) 수능특강 문제집만 잔뜩 풀었다.
혼란: 어떤 사람을 기를 것인가
촘촘한 상대평가와 과도하게 쏠린 입시에서의 무게감, 오지선다 문제 풀이라는 수능의 특성이 만든 고통 앞에 헌법소원 참여 학부모들은 시험의 목적조차 혼란스럽다. 희주양 아빠 김승현(49)씨는 “수능에서 조금 낮은 등급을 받는 학생이어도 대학에서 수업을 들을 능력과 사고력은 충분히 갖추고 있는데, 현재는 100명 중 4명(1등급)을 고르는 데 혈안이 된 시험처럼 보인다”고 말했다. 희주씨도 ‘수능 준비로 얻게 된 것’을 묻자 한참 고민한 끝에 말을 이었다. “긴장감 같은 것을 덜어내는, 중요한 순간에 차분해지는 능력 정도가 생긴 것 같아요.”
이 때문에 △절대평가와 수능의 자격고사화 △면접·학생부 등 다른 입시제도로 부담 분산 △서술형 시험 등이 현재 수능 중심 대입제도의 대안으로 주로 제시된다. 다만 정부가 이달 안에 발표할 ‘2028년 대입 개편안 시안’을 코앞에 둔 현재까지 관련 논의는 이뤄지지 않았다. 여전히 수능이 강점으로 앞세우는 형식적 공정성과 변별력의 벽이 높은 탓이다.
전문가들은 논란의 서른살을 맞은 수능과 대입제도에 대한 질문부터 바꿔야 한다고 했다. 김경범 서울대 교수(서어서문학)는 “수능은 어떤 능력을 측정하는 시험인가, 그 능력은 타당한가, 이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학생들은 어떤 능력을 기를 수 있는가라는 가장 중요한 질문에 답하지 않은 채 변별력, 공정성 논란만 벌이며 30년째 수능을 고쳐왔다”며 “이제는 미래 인재를 양성할 수 있는 학교 교육과 연계해 대입제도를 모색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민제 기자 summer@hani.co.kr 박고은 기자 eu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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