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회 영농수기 가작] 오래된 질문

관리자 2023. 8. 18. 0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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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부문 가작 이겨레(32·강원 원주시 부론면)
풀을 벨 때도 더위 먹을 때도
‘할 건지 말 건지’ 그것이 문제
고향인 강원 원주로 돌아온 이겨레씨가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가운데 홍고추를 수확하고 있다.

한 가지 질문이 밭을 매는 나를 따라온다.

“할 거야, 말 거야?”

등에 멘 예초기가 덜덜덜. 내 팔도 몸도 가슴도 마음도 덜덜덜. 예초기를 멘 어깨가 뻐근하고 손목도 시리다. 언제나 질문은 반복되고 밭은 뭐 도와주는 것 하나 없이 묵묵하다.

위엥 위엥.

내 속도 모르고 예초기는 제멋대로 자란 풀을 베며 돌아간다. 새벽에 일어나면 목 뜨거울 일도 없고 땀도 덜 흘리겠지만 나는 늘 해가 중천일 때 깎는다. 하필 밭이 마을 한가운데라 “일할 시간이 몇 시인 줄도 모르고 대낮부터 일하냐!”라는 말을 어르신들에게 들을까 봐 눈치부터 선다. 하긴, 대낮에 돌아다니는 마을 어르신은 몇 없다. 다들 새벽바람 맞으며 일어나 아침 새가 울 때쯤 집에 들어가시니까. 나는 여태 멀었다.

그럼 또 질문이 든다.

“할 거야, 말 거야?”

밭에선 말을 거는 이도, 말을 걸 사람도 없는데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는 게 아니라 질문들로 꽉 찬다. 이게 맞나, 잘하는 걸까, 이 정도 노동이면 밖에 나가 하루 일당이라도 버는 게 이득이지 않을까, 왜 농사를 그것도 유기농으로 그중에서도 비닐멀칭 하나 안 치고 키우겠다고 했을까 등등 질문은 나를 밭 한가운데서 흔들어 댄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일할 때마다 자주 흔들리는 나를 붙잡는 몇 가지 것들이 있다. 그 몇 안 되는 것 중 하나가 묵묵한 이 밭이다. 말이 없는 땅에서 나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개 버릇 남 못 준다고, 발바닥에 흙 묻는 기억이 잊힐 때쯤 나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향이란 동네가 시골 중에서도 깡시골이라 흔히 말하는 미래에 사라질 인구 소멸 지역이다. 그렇다고 살 수 없는 동네가 아니다. 사람 대신으로 자연 풍경 그윽하면 으뜸이다. 아쉽게도 내가 사는 동네는 덤프트럭이 새벽부터 오고 가고 주변에 축사에 돈사도 자리했다. 그런 고향에서 먹고살려고 당장 붙잡은 게 바로 이 밭이다.

나를 붙잡는 게 밭뿐인가. 익숙한 얼굴들이 붙잡는다. 낯선 얼굴들과 낯선 관계만을 맺는 도시와는 달리 익숙한 얼굴들이 주름지어 가며 반긴다. 50가구 사는 이 동네에서 가장 나이 많은 옆집 할아버지, 농사도 짓고 공장도 다니는 앞집 아저씨, 먼 필리핀에서 이 깡촌까지 와서 아이를 셋이나 낳고 사는 옆 옆집 아줌마, 앞 앞집에 소문난 스크루지 아저씨, 매일 아침 8시만 되면 버스 타러 나오는 뒷집 아저씨까지. 모두가 그대로 그 자리에서 산다.

처음에는 그 얼굴들이 얼마나 반갑던지 새삼 궁금하지도 않았던 이름도 물어보고 하고 싶은 거, 좋아하는 것들을 물어보며 다녔다. 얼마나 좋았는지 평생 챙기지도 않았던 크리스마스를 마을 잔치처럼 열어서 동네방네 어르신들 초상화도 그려드리고 같이 음식도 해 먹고 장터도 열고 꽃 선물도 다발로 나누면서 말이다. 나는 산타클로스가 되고 싶었던 걸까. 아니다. 그렇게라도 “할 거야, 말 거야”라는 질문에서 흔들리고 싶지 않았던 게 분명하다.

“할 거야”를 위해서 한 일이 이것뿐인가. 밭에만 있자니 말이 고팠다. 종일 밭에 있자니 고작 하루에 서너 마디 밖에 안 하는 것 같았다. 밭을 두고 밖으로 나갔다. 밖에 나가니 웬걸. 우리 동네에서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30대, 40대 청년 농업인이 와글와글 모여있는 게 아닌가. 그래, 이거다. 이 활동이 내가 계속 농사를 짓게 끔 해줄 거라고 믿었다. 성공을 향해 가는 청년 농업인을 보면서 배우고 나누면서 가자고 꿈에 부풀었던 걸까. 말이 고팠던 나는 물에 빠져도 입만 살아있는 금붕어처럼 뻐끔뻐끔 수다만 떨며 밖으로 돌아다녔다.

밭에 있어야 할 시간 동안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바람에 작년에는 결국 농사를 망쳤다. 밭에 농부가 없는데 잘 될 리가 없다. 가뭄 때문이라고 탓하고 싶지만 동네에서 제대로 망한 농사꾼이 나뿐이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했다면 마음이야 편하다. 봄에 귓등으로 팝콘 옥수수가 잘 팔릴 것 같다고 해서 죄다 팝콘을 심어놨더니 고라니인지 두더지인지가 매달려 말라가는 팝콘 옥수수를 먹어버렸다. 남은 팝콘 옥수수를 수확한다고 가족들을 모아 이틀을 매달렸다. 팔 수가 없어 한 해가 훌쩍 지난 요새도 자급자족으로 팝콘을 튀겨먹는다. 죄다 망한 게 이것뿐일까. 

들깨를 장마가 다 지난 8월 초 땡볕 아래서 심는 바람에 하루 심으면 그다음 날 말라 죽고 또 죽어라 심으면 말라 죽어서 한 달 내내 들깨만 심었다. 7월 장마에 심지를 못하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태양에 말라 죽지 않고 산 들깨는 내 무릎 높이까지도 자라지 못했다. 그것도 들깨니까 허리 숙여가며 모두 긁어모아 타작해 들기름을 짜니 350㎖로 겨우 서른 병 남짓 나왔다. 나는 왜 들깨는 비를 맞으며 심어야 살고 옥수수 사이에 심으면 후작으로 으뜸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걸까. 이게 끝일까.

농사 중에서도 고추 농사를 잘 지어야 진정한 농부라는 소문에 어떻게 하면 성공할 것인가 고민했다. 탄저에 약한 고추를 비닐멀칭 없이 키우자니 돼지감자대로 멀칭도 대신해보고 자라는 풀들도 멀칭으로 대신하기를 반복했다. 좀 되는가 싶어서 나 소질 있나 보다 하고 욕심을 부렸다. 고추에 끼는 진딧물을 옥수수가 다 가져간다고 해서 옥수수와 고추를 같이 심었다. 옥수수도 먹고 고추 왕이 될 작정으로. 웬걸. 옥수수 그늘에 고추가 미처 빨갛게 익지를 못하고 겨울을 맞았다. 발아부터 함께 했던 무려 6000포기의 고추가. 이게 다일까.

가게에 손님이 없어 파리가 날려도 건물주면 갓생이라던데. 이 드넓은 밭이 내 땅이라면 나도 내 모습이 이해가 갈 것이다. 아쉽지만 내 땅은 단 한 평도 없다. 3년째 밭에서 가져가는 것도 없으면서 임대료만 까먹고 있다. 상권 좋은 몫보다야 시골 농지가 저렴하지만 그만큼 버는 것도 없다. 저렴한 임대료마저 까먹다니. 혹시 내가 까먹고 있는 게 돈인 건지 다시 돌아오지 않을 내 꽃 같은 젊음인 건지 가끔 의아할 때마다 질문은 들어온다. 

“할 거야, 말 거야.”

농촌에 청년이 없다고 제도는 적극적으로 청년들이 살 수 있도록 생활비를 주고 대출상품도 열어줬다. 당장 나는 주머니를 열어도 돈 한 푼 없고 담보라는 게 없어 농협이 빌려줄 수 있을까 의아하지만 1.5%라는 요즘 금리에 말도 안 되는 이자를 제공해준다. 한도 5억까지 투자해 대박을 쳐서 이 시골에서 돈을 벌며 살 수도 있을 것 같다. 만들어 놓고 쪽박 차면 5억은 농지를 팔아서 갚으면 된다고 한다. 단군 이래로 땅값은 떨어진 적이 없으니 망하더라도 손해 볼 건 없다고 한다. 귀가 솔깃하다.

타협을 볼 수도 있는 일이다. 예를 들어 동네 사람과 잘 지낼 일도 없이 집값도 저렴한 근거리에 있는 읍내 아파트에 살며 사람 부려가며 적정수준의 대출 낀 관행으로 임대만 잘 받아 농사를 지으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익히 보고 알고 있는 농사는 나에게만 “할 거야, 말 거야”를 묻지 않는다. 

남편과 함께 운영 중인 카페의 건물 외부에 앉아 있는 이겨레씨.

관행농으로 16만5289㎡(5만평) 이상 평생 농사지은 옆집 아저씨의 입에서도 똑같은 질문이 나온다. 말은 “힘들어, 하지마.”하면서도 매일 새벽 밭으로 나가는 아저씨와 내가 어딘가 닮아 보인다. 유기농이 아니면 농촌에서 돈도 잘 벌고 먹고살 만한가? 갓 들어온 청년이 농사가 손에 익으면 그곳에서 살 만한가? 나처럼 농작물이 망하지 않고 한 해에 대풍년이 오면 농민들은 살 만한가? 

한겨울에 옆집 할아버지가 담배 한 갑을 사기 위해 면에 있는 슈퍼까지 차로 약 10분이 걸리는 길을 경운기를 타고 오갔다. 몇 분 정도 걸리냐 물으니 웃으시면서 왕복으로 50분 정도를 말씀하신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남편과 함께 지낼 공간 중 일부에 담뱃가게를 차렸다. 그 공간은 시골 구멍가게에서 동네 어르신들이 새참 찾는 공간으로 지금은 밭에서 자란 것들을 멀리서 오는 사람들에게도 차림새 좋게 내놓는 일을 하고 있다. 그곳은 밭과 마찬가지로 “해!”라고 부추기고 붙잡는다.

고추 밭인지 모기 밭인지 모를 밭에서 모기에게 깨물릴 땐 나는 냅다 “안 해!” 하고 도망간다. 그러다 감자를 캘 때면 어찌나 기분이 좋은지 흙에서 없던 게 생기는 게 신기해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감자만 캔다. 예초할 때도 마찬가지다. 멀칭을 하지 않아 무럭무럭 자라난 풀로 풀 멀칭을 해보겠다며 풀을 벨 때 소복소복하게 쌓이는 풀 때문에 격주에 한 번은 예초를 한다. ‘동네에서 소문난 예초 장인이 될지도 모르겠다’하면서 말이다.

나는 성공한 농업인이 아니다. 나오지 않을 내 인건비 계산하기가 무서워서 임대료와 자잿값만 계산기로 두드리고 맞지 않은 순이익을 따지길 좋아한다. 작물 심는 시기를 놓치기 일쑤고 거두어 타작하는 날도 미루기 바쁘다. 아마 미래에도 성공과는 다소 거리가 먼 농부일 것이다. 

그러나 그저 매일 “할 거야, 말 거야”라는 질문을 반복하며 거름을 주고 씨앗을 심고 물을 주고 풀을 매고 액비를 만들고 시비를 하고 수확하고 팔고 먹고 싸며 다시 거름주기를 반복한다. 이 과정이 오래된 질문에 대한 답이라면 답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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