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0회 영농수기 가작] 너거 아버지 뭐하시노?

관리자 2023. 8. 18. 0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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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부문 서율(44·경남 밀양시 상남면)
“우리 아버지는 농사지어. 너네는?”
한 친구의 물음에 한대 얻어맞은듯
부끄럽게만 여기던 굴레 벗고 해방
‘당당한 농부 아빠’ 이젠 나의 목표
3년 전 경남 밀양으로 귀농해 아버지 서일수씨(72·오른쪽) 뒤를 이어 농사꾼이 된 서율씨. 부자가 다정하게 집 앞 정원에 섰다.

기(起) - 농부는 전생의 벌

‘농부란 직업은 전생에서 천벌을 지은 사람과 그 가족에게 내리는 가장 큰 형벌이다.’

토요일 이른 새벽, 채 동이 트지 않은 안개가 자욱한 묘한 들녘에 나왔다. 늙으신 부모님과 젊은 40대 아들이 못자리에서 모판을 떼고 있다. 들판 이곳저곳 흩어진 논에 모심기를 마치려면 서둘러야만 했다. 일어난 직후 바로 나왔기에 간밤의 피곤이 아직 가시지 않았고 배는 고프고 몸은 경직된 상태다. 장화를 신고 한발 떼고 다른 발을 내딛기가 쉽지 않은 진흙투성이 논에 발을 딛고 서서 허리를 숙여 자세를 잡은 다음 목장갑 낀 손을 논 깊숙이 넣었다. 수분을 가득 머금고 웃자라 여간 무겁지 않은 모판을 들고 논두렁까지 걸어서 운반하는 작업을 반복하느라 따가운 봄 햇살이 미처 제자리를 잡기도 전에 내 온몸에 땀이 가득 자리를 잡도록 만든다.

‘아, 괜히 내려왔나. 괜히 농사짓는다고 했나. 괜히 부모님을 돕는다고 했었나….’

한발 떼기도 힘든 진흙의 시궁창 안에서 반복되는 작업으로 몸은 묶였지만 머릿속 생각은 어떠한 구속 없이 날개를 단 듯 자유로웠다. 얼굴엔 땀이 수돗물 넘쳐흐르는 세숫대야처럼 흘러내렸고 새벽녘의 습한 대지에 자리한 안개는 점차 걷히고 있었다. 바야흐로 따가운 아침 햇살이 어떠한 그늘막도 없는 논 한가운데 있는 나를 정통으로 바라보았다. 나의 상상은 농부란 직업에 대한 불평과 한탄을 넘어서 ‘전생에 죄를 지으면 농부가 되는 게 아닐까’ 하는 출처 없는 분노에 이르렀다.

‘나도 자전거 타는 거 참 좋아하는데, 벌 받는 것도 아니고 옆에서 지옥 같네.’

갈수록 따가워지는 봄 햇살 아래서 땀을 흘리는데, 마침 그 새벽녘부터 우리 논에 붙은 둑길에서는 자전거 장비를 갖추고 주행을 즐기는 무리가 계속 지나갔다. 그들이 주말 아침에 레저로 흘리는 땀방울이 부러웠고 그것은 불과 얼마 전까지 서울에서의 내 삶이었다. 순간 화가 났다. 더러운 옷을 입고 냄새나는 장화를 신고 그늘이 전혀 없는 곳에서 무방비로 노출된 내가 초라했다. 내가 진흙탕 속 체력의 극한을 맛보는 그 공간에서, 도시에서 출발한 그들의 사치스러워 보이는 취미생활과 비교돼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러 벌 받는 것만 같아 혼자서 괜스레 이 모든 상황이 화가 났다. 생각해보면 이 감정의 뿌리는 어릴 적부터 시작되었다.

승(承) - 아버지와 그 아버지의 이름으로

“집안의 장손으로서 너거 아버지를 이어 가문의 전답을 지켜라.”

조선 후기 고종이 다스리던 시기인 1906년 태어나신 할아버지께서는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1998년에 내게 말씀하시길, 할아버지께서 물려주신 땅을 평생 지키신 아버지처럼 대학에 가지 말고 고향에서 집안의 전답을 부치며 농사를 지으라고 하셨다. 아직 발표는 나지 않았지만 태어나 자란 시골을 당당하게 떠나 ‘서울에서의 대학생활’이라는 즐거운 상상을 하며 기대감과 해방감으로 가득 차 있던 내게 100세 가까운 할아버지의 말씀은 백여년 전 흥선대원군의 통상수교 거부정책처럼 시대 흐름을 못 읽는 답답한 말씀으로 들렸다. 고생만 하고 대접은 못 받고 사회적 지위는 실상 천한, 농사짓는 삶은 탈출하고 싶은 징역 같은 굴레였기에 오히려 벗어나고자 공부를 열심히 하였다.

“농사꾼 아들은 아무 데나, 바닥에 앉아도 된다.” 면에서 태어나 읍의 초등학교로 전학 간 내게 임용 2년차의 부산 출신 젊은 선생님이 한 이 말속에도 내심 농부를 업신여기고 있음을 어린 나조차 느낄 수 있었다.

전(轉) - 너거 아버지 뭐하시노?

“우리 아버지 농사짓는다. 너거 아버진 뭐하시노?”

다행히 아버지는 학교에 오신 적이 없었다. 오직 단 한번 내가 전교학생회장 선거에 나가서 연설하는 것을 보려고 운동장 끝에 서서 보신 적을 제외하곤 학교에 오시지 않으셨다. 시골에서 얼굴이 매우 하얀 편이었던 나는 도회적 이미지로 학교를 잘 다니고 있었고 초등학교 졸업생이 그대로 입학하는, 바로 옆에 있는 하나뿐인 중학교에도 도회적 이미지를 지닌 채 들어갔다. 그리고 나중에 우리 중학교의 전교학생회장이 된 다른 초등학교에서 온 성이 같은 친구 하나와 친해져서 이런저런 얘기하는데, 그 친구의 어머니와 우리 아버지는 같은 마을에 사는 초등학교 동창 친구였다. 서로의 공통점을 많이 발견한 그 친구는 내게 “우리 아버지 농사짓는다, 너거 아버지는 뭐하시노?”라고 물어보았다. 나는 크게 한 대 맞은 듯했다. 농사짓는 아버지를 당당하게 말하는 그 친구를 통해 그동안 짧다면 짧은 내 평생을 억눌러왔던 해방감을 느낄 수 있었다. 

‘농부가 부끄러운 것이 아니구나.’ 

그 해방감이란 할아버지를 이어 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나 자란 나의 억눌린 부끄러움이 당당한 자아를 찾는 것이었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할아버지는 한평생 땅을 일구셨고, 장남인 아버지도 그 땅에서 평생을 성실하고 묵묵하게 해 뜨기 전 새벽부터 해질 때까지 휴일 없이 일하셨다. 여느 농부들처럼 성실하게만 일할 뿐, 가족 나들이나 외식, 피서 같은 문화생활이나 여가 활동은 꿈도 꿀 수 없었고 본인의 취미생활도 없이 새벽에 일어나서 일찍 잠드실 때까지 쉼 없는 일의 연속이었다. 가족을 위해서 하는 그 지난하고 반복되는 노동을 그 아버지의 장남으로서 지켜보며 자란 우리 4남매는 논이 놀이터요, 밭이 피서지였고 과수원에서 일하다가 먹는 과일이 외식이었다. 농부의 아들로 학교가 파하거나 휴일일 때면 아버지를 따라다닌 그 모든 농업 보조 활동에서 부모님의 땀과 나의 추억이 가득 존재하고 있었음을 나는 그날 이후 서서히 깨달을 수 있었다.

“농사를 지어서 너희 4남매를 공부시킬 수 있었다.”

점점 눈에 띄게 나이 들어가시는 아버지께서는 농사가 예전보다 점점 수월해진다고 말씀하신다. 그런데도 모판 만들기와 수확기의 농업 보조 활동은 젊은 우리에게도 최소 3일 치의 근육통과 보름간의 피부 화상, ‘다시 입을 수 있을까’ 싶은 옷을 선물해주었다. 여전히 투덜대는 우리가 긍정적인 마음을 갖기란 쉽지 않은 것이었다. 그럴 때 어머니는 “할아버지께서는 평생을 땅을 일구다가 돌아가셨다"며 "지금 이 땅을 파서 너희 4남매 모두를 공부시킬 수 있었다”고 하신다. 나는 논을 떠올리면 단순히 그늘 없이 따가운 햇볕의 고단한 일만 연상됐는데, 부모님께 이 땅은 단순히 평당 얼마짜리 재산이 아니라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로부터 이어진 피와 땀이자 우리의 현재를 가능하게 하는 고마운 존재임을 알았다. 땅은, 논밭은, 농업은, 단순히 우리 집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넘어서 우리나라 모든 선조가 피와 땀을 일궈 삶의 가치를 주고 지금 우리 현재를 이어주고 있는 그런 존재였다.

 결(結) - 희망·청년·젊음·꿈·미래, 이 모든 것의 농업

“얼굴이 하얀 게 농사꾼 같지 않네.”

시커먼 농부 아버지를 부끄러워했던 하얀 초등학생인 나는 전학 간 초등학교의 전교학생회장 선거에서 2등으로 낙선하였고, 장손이 대를 이어서 고향을 지키며 농사를 짓기 바라셨던 할아버지께선 내가 공부하러 떠난 고향을 끝까지 지키시며 100세를 넘어 장수하셨다. 평생 이 땅을 통해 우리 세대를 이어주시며 노고를 다 하시는 아버지의 손발은 갈라지고 거칠어졌다. 힘이 장사이고 종아리 근육이 엄청나셨던 아버지의 다리는 근육이 빠져서 홀쭉하고 얇아졌다. 강하고 무섭고 한없이 높기만 했던 아버지가 어느새 힘없는 노인이 됐다. 그래도 힘이 있는 한 이 땅을 떠나지 않으실 것을 알기에 나는 늙은 아버지를 도우러 뒤늦게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말씀에 호응하여 고향으로 돌아왔다. 돌아온 지 오래되지 않아서인지, 선크림과 모자를 잘 챙겨서인지 주변 분들이 한 번씩 나를 보면 얼굴이 농사꾼처럼 검지 않다고 하신다. 나는 검게 건강하게 그을린 농부가 참 멋있어 보인다. 그래서 아직은 내가 진정한 농부가 되지 않은 것만 같아서 그 평가가 그리 자랑스럽지 않았을 때가 있었다. 

‘하얀 농업, 그늘 농업, 화장실 농업.’

하지만 농민이라고 해서 꼭 얼굴이 검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할아버지께서 평생 땅을 일구신 것과 그 땅을 지키는 것은 정말 소중하고 아버지처럼 우직하고 성실하게만 일하는 것도 필요하다. 하지만 변화하는 시대에 농업과 농민도 그 업과 그 삶에서 좀 더 조화롭게 변해야 한다고 본다. 농업도 하나의 산업이고 농부도 하나의 당당한 직업군으로서 그 밖의 가족과 여가 활동, 자신만의 취미생활, 피서·휴가를 즐길 수 있어야 한다. 그 직업 안에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그늘과 언제라도 다녀올 수 있는 수세식 화장실이 존재해 우리가 수확하는 하얀 쌀알처럼 하얀 농업, 하얀 농부도 가능할 수 있어야 할 것 같다. 

‘내 아들은 아버지를 농부로 소개할 수 있을까?’

그때 중학교 친구의 질문에 나는 “우리 아버지도 농사짓는다”라고 대답했다. 과연 다음 달이 첫돌인, 늦은 나이에 본 내 아들이 나중에 자기 친구에게 아버지의 직업을 내 친구처럼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까? 농업은 국사책에만 나오는 할아버지 산업이 아니라 현재에도 그리고 미래에도 살아 숨 쉬는 국가에서 희망을 주는 중요한 산업으로서 나보다 젊은 청년들이 이 산업에 꿈을 실을 수 있다면 미래가 있을 것이고 우리 아들은 나처럼 농업과 농부를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이다. 단순히 아버지를 부끄러워하지 말라는 도덕책 같은 말이 아니라 실제로 농업에 희망이 있고 농민으로서 당당한 미래의 대한민국을 보고 싶다. 그렇게 내 목표는 우리 아들에게 당당한 농부 아버지가 되는 것이고, 나아가 우리 아버지‧ 할아버지에게도 자랑스러운 이 땅의 농사꾼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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