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지도에서 사라진 나라…염소도 염소가 끌려가면 알아채는데
국내 첫 소개… 2021년 부커상 후보
거대담론이 소거한 디테일에 천착
“고통의 반복이 지겨운가”
사소한 일
아다니아 쉬블리 지음, 전승희 옮김 l 강 l 1만5000원
이 작품의 결말을 예상할 이가 얼마나 될까. 다 읽고 보니 여성 주인공의 소소한 심리적 소요와 그를 모두 언어화하려는 강박 자체가 세세한 복선이 되고 만다.
따라가 보자, 푹푹 찌는 1949년 8월. 작품 1부의 배경이다. 한 해 전 텔아비브에서 건국 선언을 한 이스라엘이 중동전쟁을 승리하고 이집트와 마주 그은 휴전선 지대. 일대 네게브 사막은 아랍계 베두인이 오래 유목하던 데로, 그중 니림은 2차 세계대전 후 유럽 이스라엘 청년들이 세운 남단 정착지 가운데 하나다.
정착지로선 이집트군의 첫 폭격지가 됐던 니림에 전후 주둔한 이스라엘군 소대의 임무는 국경 사수요, “잔존하는 아랍인들을 모조리 제거하는 것”이다.
작가는 1부 주인공인 소대장의 행동거지 하나하나를 지나칠 만큼 촘촘히 추적한다. 소대장은 합리적이고 면밀하다. 위경련과 두통에 시달리나 수색정찰에 전념한다. “군사적 임무만이 아니라 민족적 임무”라는 사명감 때문이다.
8월12일 새벽, 평소와 달리 ‘지도’도 없이 감행한 수색 중 사구 아래 샘물가에 무리지어 있던 아랍인들과 마주친다. 이윽고 총성. 낙타 여섯마리의 피도 모래에 스몄다. 상대의 무기 따위는 발견되지 않았다. 살아남은 소녀가 울부짖었고, 개가 짖었다.
소대장은 소녀를 씻기고, 중앙사령부나 아랍인 지역에 보내기 전까지 진지에서 주방 일을 시키기로 한다. 그날 저녁 소대는 새벽 순찰에 대한 포상인 양 회식한다. 소대장은 끝날 즈음 말했다. 한나절 만에 이미 “병사 몇이 그녀를 건드렸다”고. “소녀를 진지 식당에서 일하게 하든지, 아니면 한 사람도 빠짐없이 그녀를 가지고 놀든지.” 병사들이 놀라 멈칫하다 이내 후자라며 들썩 순서를 정하려 들자 소대장이 권총을 가리킨다. “소녀에게 손을 댄다면 이것이 가만있지 않을 거”라고.
13일로 넘어가는 새벽, 소대장은 소녀의 입을 틀어막고 강간한다. 이른 아침 순찰 복귀하며 소녀의 막사에서 뛰어나오는 병사들도 보아 넘긴다. 그날이었다, 소대장은 소녀를 진지 밖으로 데리고 가 사살한 뒤 모래에 묻는다.
2부는 2000년대 서안지구에 사는 한 팔레스타인 여성의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된다. 주어진 ‘경계’를 종종 넘어 버릇한다. 스스로 말하길, 덜 합리적이고 서툴러 그렇다. 가령 버스 승객들을 검문하며 신분증을 요구하는 이스라엘군에 총부터 좀 치워달라 ‘더듬더듬’ 말하고 마는 성미. 다른 승객들까지 공연히 위험에 처해진다. 겁이 없어서가 아니다. 여성은 어느 날 1949년의 아랍 소녀에 관한 뒤늦은 신문 기사를 보고 괴로워한다. 소녀의 사망일과 자신의 생일이 겹친 탓이다. 말하자면, 예의 사소한 것에 대한 집착. 실제 참상의 개요만 보도될 뿐 소녀의 이야기는 없다. 직접 보고 싶다.
하지만 기사의 원자료가 현지 박물관, 기록보관소에 있다 한들 어떻게 확인한단 말인가. 이스라엘이 군사분할한 A구역민 신분증으로 여성이 지금껏 시도한 가장 먼 여행은 ‘집에서 직장까지’다. B구역은커녕, 네게브는 상상만으로도 공포다. 여성은 고통스러워하다 결국 “장애물에 대한 공포에서 생긴 공포라는 장애물”부터 넘기로 한다.
집을 나와 수년간 걸어서도 가본 적 없는 우회전 길로 차를 돌리고, “공포의 거미가 내 피부 위로 돌아와 스멀스멀 기어 다니며 서서히 나를 마비시키”는 감각을 ‘반복’하며 검문소를 지나고, 다른 길로 가지 않은 사실을 후회하고, 다시 공포에 짓눌려가며 군사적 경계선에서 지리적 경계선, 지리적 경계에서 심리적 경계, 마침내 정신적 경계까지 넘어서본다.
근래의 이스라엘 관광지도와 옛 팔레스타인 지도를 비교해가며 가는 길은 “팔레스타인과 관련된 모든 것의 부재”를 새삼 실증하는 여정이다. 가령 야파와 아스칼란 사이 사라진 수많은 마을은 지인들이 나눠준 기억 속에 있지만, 막상의 표지판, 집과 나무, 행인들은 하나같이 여성을 거부한다. 그 불안은 또 다른 검문소 앞에서 영락없이 공포로 증폭한다.
마침내 니림 어디께, 마을 흔적은 사라진, 대신 샘물의 흔적이 선명한, 지금은 군사지역 표지판만 놓인 곳에 닿고, 군사통제 표지판이래 봐야 B구역서도 흔했으므로 여성은 멈추지 않고 더 걸어 들어갔으니 무리지어 있던 낙타 여섯마리와 마주친다. 그리고 그녀를 주시하는 한 무리의 군인들. 1949년 8월 그 소녀를 적발한 소대의 시선이 그랬을까. “그 자리에 서” 외치는 한 병사, 총부리를 겨누는 또 한 병사. 여자는 전신이 마비되어 꼼짝하지 않는다. 그 소녀도 그랬던 걸까.
소설의 1·2부는 데칼코마니의 구조를 띤다. 지도의 안팎에서, 생을 파묻은 소대장과 생을 파헤치려는 여성, 둘 사이 짖는 개, 휘발유(냄새) 따위 불안의 신호들이 선명히 겹친다. 전쟁 중 이스라엘인들이 새긴 구호 “탱크가 아니라 인간이 승리하리라”는 2부에도 반복되거니와, 뒤집어 이젠 팔레스타인인의 것이어야 무색하질 않겠다.
이는 폭력과 억압의 상대성을 함의할 텐데, 그보다는 다시 접어 25년, 또 접어 50년 뒤에도 그대로일 공포의 데칼코마니적 회귀성으로 더 송연해진다. 오늘의 비극은 어제치가 아닌 내일치가 등사된 것이리라.
팔레스타인 출신 아다니아 쉬블리(49)는 2020년 9월 미국 예술잡지 ‘BOMB’과의 인터뷰에서 ‘팔레스타인의 입지가 아닌 팔레스타인의 고통’이 관심사라며 “같은 고통을 반복하면 듣는 자들은 지겨워하지만, 사실은 고통이 계속되고 있다는 뜻이고 그래서 결국 고통은 커지게 된다”고 말했다.
이는 정치·민족·역사의 거대담론에서 소외·소거된 진실이 디테일을 반복하는 언어로 드러나리란 쉬블리의 문학관과 닿고, ‘사소한 일’에 12년을 매달린 동력이었을 거다. “나의 문학은 팔레스타인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이유도 마찬가지. 태어나면서 인간성을 박탈당하는 사태에 대한 보편적 관심이 진실의 향방인즉 쉬블리는 되묻는다. “염소도 다른 염소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것을 아는데, 인간은 왜 그러질 못하는가?”
이스라엘의 건국을 팔레스타인인은 ‘알 나크바’로 부른다. 75만명가량이 천년의 터전을 잃게 된 ‘대재앙’. 유엔은 올해 5월15일 뉴욕 본부에서 사상 최초로 알 나크바 75주년을 공식 기념했다. “이스라엘은 1949년 유엔 가입 때 약속한 팔레스타인 난민들의 귀환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며 마흐무드 압바스 팔레스타인 대통령은 1시간 넘게 연설했다. 이것이 정치 언어라면, 문학 언어는 이러하다. “지도상의 언어적 말소로 언어의 배신을 처음 경험하게 된다. 지도에서 팔레스타인을 지우는 일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소설을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면? “유약한 언어가 어떻게 패배하지 않는가다.” 팔레스타인 사태를 현실화한 영국의 2021년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롱리스트)에 ‘사소한 일’(Minor Detail)이 오르며 이뤄진 주최 쪽 인터뷰에서 작가가 던진 말이다. 그 언어를 붙잡고 있다.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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