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악어가 발끝까지 왔는데도, ‘책만 보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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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는 그림책을 보면서 그 자체를 즐길 뿐 아니라, '책 읽는 법'도 배운다.
게으른 그림책은 독자가 어린이라는 이유로 단조롭고 우스꽝스러운 이야기로 장면들을 채운다.
어쩌다 흥미를 느낄 수는 있겠지만, 어린이는 그런 책을 다시 보지 않는다.
대체 '책'이 뭐기에 오리도 악어도 저토록 좋아하는 것일까? 그건 바로 지금 어린이가 손에 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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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는 책만 보고
이은경 글·그림 l 보림(2023)
어린이는 그림책을 보면서 그 자체를 즐길 뿐 아니라, ‘책 읽는 법’도 배운다. 그림 보는 데 익숙해지고 글자를 깨친다. 책이라는 매체 안에서 이야기가 어떤 식으로 시작되고 흘러가는지, 어느 부분까지 가야 결말을 짐작할 수 있는지, 그 짐작이 맞아떨어지거나 빗나갈 때 얼마나 큰 즐거움이 생겨나는지를 익힌다. 마지막 장면을 본 다음, 방금 마음에 어떤 물결이 지나갔는지 깨닫기도 한다. 독자로서 첫걸음을 떼는 것이다.
게으른 그림책은 독자가 어린이라는 이유로 단조롭고 우스꽝스러운 이야기로 장면들을 채운다. 어쩌다 흥미를 느낄 수는 있겠지만, 어린이는 그런 책을 다시 보지 않는다. 좋은 그림책은 새롭고 유쾌한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가고, 책임 있게 독자를 인솔한다. 이런 책은 읽고 또 읽어도 지겹지 않고 오히려 더욱 즐거워진다. 훈련이 거듭될수록 책을 더 잘 읽는 자신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오리는 책만 보고’는 좋은 점이 많다. 이야기가 재미있고 그림에 위트가 넘치고 처음부터 끝까지 다정함이 배어 있다. 무엇보다도 어린이가 책을 더 잘 읽게 만든다는 점이 좋다.
주인공 오리는 시작부터 절체절명의 상황을 맞이한다. 악어가 오리를 먹잇감으로 노리고 다가와서는 등에 태워 버린 것이다. 바로 잡아먹을 수도 있었겠지만, 말벌이 나타나는 바람에 악어는 방향을 틀어가며 헤엄쳐야 한다. 악어가 말벌을 겨우 따돌리자 오리를 노리는 다른 악어들의 공격을 받는다. 이리 풍덩 저리 풍덩, 악어들이 뒤엉켜 강에는 소란이 일어난다. 악어 등 위의 오리도 이리 휘청 저리 휘청, 악어에게 잡아먹히는 것보다 강에 빠지는 게 더 걱정스러울 지경이다.
그런데 이 난리통에도 오리는 아무렇지 않다. 아니, 아주 태평하다. 지금 책을 읽고 있기 때문이다. 오리는 책만 보느라 자기가 악어 등에 탄 건지 물 위에 떠 있는 건지, 어디 풀밭에 앉아 있는 건지 생각도 안 하는 듯하다. 악어 등 위에서 균형도 잡아보고, 드러누웠다가, 옆으로 누웠다가, 배를 깔고 엎드렸다가 하며 책만 본다. 악어가 오리를 잡은 게 아니라, 오리가 악어를 잡아탄 것만 같다. 혹시 오리가 무슨 꾀를 내려고 시간을 끄는 걸까? 책을 보는 척하면서 사실은 달아날 궁리를 하는 건 아닐까?
드디어 악어가 오리를 잡아먹으려는 순간, 오리는 화면을 가득 채울 만큼 큰 소리로 “꽉꽉꽉” 웃어 댄다. 여태 정말 책에 푹 빠져 있던 것이다. 그걸 보고 화가 난 악어는 “뭐가 그렇게 재밌어? 나도 좀 보자.” 하고 외친다. 오리는 깜짝 놀라 달아나고, 악어는 오리가 보던 책을 아기 악어와 함께 본다. 대체 ‘책’이 뭐기에 오리도 악어도 저토록 좋아하는 것일까? 그건 바로 지금 어린이가 손에 든 것이다. 오리처럼 자신도 방금 책에 푹 빠졌었다는 걸 깨닫는다면 어린이는 독자로서 또 한 걸음 나아가게 될 것이다. 자꾸만 다시 보게 되는 책이다.
김소영 독서교육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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