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같은 여자를 사랑…" 기계의 고백이 터뜨린 질문들

진달래 2023. 8. 18. 0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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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영미권 대표 작가 이언 매큐언
유일한 SF소설 '나 같은 기계들' 국내 출간
인조인간 통해 던진 윤리적 딜레마 의제
가상과 실재 뒤섞인 서사로 높은 현실감
1975년 등단한 이언 매큐언은 '위험한 이방인'(1981)을 시작으로 다섯 차례 부커상 최종후보에 올랐고, 그중 '암스테르담'(1998)으로 수상의 영광을 안았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속죄'(2001)로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 등도 수상했다. 1983년 왕립 문학회 회원으로 선출됐고 2011년 예루살렘상을, 2020년 괴테문화원이 수여하는 괴테 메달을 받았다. ⓒAnnalena McAfee

영미 문학권 최고 권위의 부커상 단골 후보인 영국 작가 이언 매큐언(75). 1998년 부커상 수상작인 '암스테르담'에서는 안락사를, '토요일'(2004)에서는 전쟁과 테러를, '솔라'(2010)에서는 지구온난화 문제를 다룬 작가는 이번에는 가장 현재적 주제인 인공지능(AI)을 선택했다. 이달 한국어판이 출간된 그의 열다섯 번째 장편이자 유일한 SF 소설 '나 같은 기계들'은 AI를 소재로 설계한 짓궂은 사고실험과 같다.

고도의 기술로 인조인간을 생산할 수 있게 된 가상의 세계를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은 처음부터 끝까지 독자에게 질문을 던진다. 도덕은 실재하는가. 인간 본성이란 존재하는가. "영국밖에 모르는 사람들이 영국에 대해 무엇을 알겠는가?" 소설에 인용된 조지프 러디어드 키플링의 시 '영국 국기'의 구절이 암시하듯이, 인조인간의 존재를 이 사변적 소설 세계로 끌어온 건 필연이다.

소설의 배경은 완벽에 가까운 인조인간이 최초로 판매되기 시작한 1982년 런던이다. 서른셋의 '찰리'는 "친구이자 잡역부"라는 광고처럼 친구가 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로 어머니의 유산으로 인조인간 '아담'을 구입한다. 더 나아가 사랑에 빠진 윗집 여자 '미란다'와 함께 셋이 "하나의 가족"이 될 것이라는 환상까지 품는다.

나 같은 기계들·이언 매큐언 지음·민승남 옮김·문학동네 발행·460쪽·1만6,800원

그 믿음이 깨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미란다가 아담과 성관계를 한 후 셋의 관계는 기묘해진다. 미란다에게 "바람이 난거냐"고 화를 내면서도 찰리는 동시에 자신의 말이 논리적으로 성립될 수 있는가 의문을 갖는다. 인조인간이 연적이라니. "우리는 같은 여자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혼란을 겪는 찰리에게 자신의 감정을 어떻게 할 수 없다고 털어놓는 아담의 고백은 벼락같다. '나 같은 기계'의 자기의식을 나의 자아와는 다르다고 단언할 수 있는지, 그의 감정은 숫자의 오류일 뿐인 것인지, 질문은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생물과 무생물의 명확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와 내가 동일한 물리법칙에 묶여 있다는 사실은 남아 있었다. 어쩌면 생물학은 내게 특별한 지위를 제공하지 못하고, 내 앞에 서 있는 형상이 온전히 살아 있는 존재는 아니라고 말하는 건 거의 의미가 없을 수도 있었다."

매큐언은 세 인물, 아니 두 인물과 한 기계를, 온갖 윤리적 딜레마에 빠트린다. 예를 들면 가족의 명예를 위해 강간 피해 사실을 밝히지 못한 채 자살한 친구의 복수를 위해 불법을 저지른 미란다. 그 상황을 알게 된 찰리와 아담은 어떻게 대처해야 옳은 것일까. 또 다른 일화로 '당신이 아이를 키우고 싶다면 그렇게 하라'는 무책임한 제 부모의 쪽지를 들고 찰리의 집에 온 동네 꼬마 '마크'를, 관계당국에 신고하지 않고 보살펴도 되는 것인가. 찰리와 아담이 엇갈린 의견을 내놓고 부딪히는 과정은, 곧 인간이 기계와 구별되는 지점을 찾아가는 시간이다.

게티이미지뱅크

인조인간 대부분이 자기 파괴에 이르는 설정은 주목할 만하다. 각각 다른 성격으로 설정돼 다른 환경에서 살아가는 인조인간들은 종국에 스스로 전원을 영원히 꺼버리거나 자신의 사고 시스템을 파괴해 버린다. 도덕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기계의 사고로는 "수백만 명의 사람이 이미 치료법이 밝혀진 질병으로 죽어가고" "나눌 것이 충분한데도 수백만 명이 가난에 허덕"이는 불완전한 인간 세상은 견딜 수 없는 "모순의 회오리"라서다. 역설이게도 그런 모순과 함께 살아온 인간은 잔인한 고통 속에서도 여전히 사랑을 발견한다. 이 대목은 인간의 본질에 한걸음 다가가게 한다. 문학이 "직관에 의존하는 영역"이라고 한 찰리의 말에 기대자면, 인생은 모순의 세상을 고정된 도덕률이 아니라 직관에 의존해 헤쳐가는 여정일지 모르겠다.

SF 장르를 선택한 작가의 결정은 탁월했다. 무거운 철학적 질문들에도 책장은 빠르게 넘어간다. 수학자이자 컴퓨터 과학의 선구자 앨런 튜링이 1950년대에 죽지 않고 살았다면, 과학기술의 극적인 발전을 이뤘을 것이라는 가정부터 눈길을 사로잡는다. 아르헨티나의 승리로 끝나는 포클랜드 전쟁(영국과 아르헨티나가 남대서양 포클랜드 제도의 영유권을 두고 격돌한 전쟁), 비틀스의 존 레넌과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이 암살되지 않은 가상의 세계는 실재와 허구가 교묘하게 섞여 현실감을 높인다.

진달래 기자 az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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