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문 헌법의 탄생을 추동한 건 전쟁과 제국주의였다
"성문 헌법은 비록 열정 또는 기만의 순간에 유린당할 수도 있지만, 깨어 있는 자들이 다시 국민을 결집시키는 구심점으로 삼고 국민에게 상기시킬 수 있는 텍스트가 되어줄 것이다."
1802년 미국 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의 말이다. '성문 헌법'을 바라보는 이 같은 관점은 오늘날 전 세계 국가에서 유효하다. 국가의 통치 이념과 시민의 기본권을 규정한 헌법은 그 자체로 '법 중의 왕'이라고 불리지 않는가. '헌법적 가치' '헌법적 권리' 같은 단어를 쓸 때, 언어 사용자는 기대한다. '헌법적'이라는 표현만으로 민주주의적 진보와 초월적 권위를 위풍당당하게 드러낼 수 있을 것이라고.
흔히 헌법은 혁명의 산물, 공화주의와 자유주의의 결실, 근대 국가의 성장 기틀 같은 것으로 이해되나 영국 출신 역사학자 린다 콜리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는 '총, 선, 펜'에서 헌법의 태동을 그리 고상하고 숭고한 것으로만 보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다. 그는 '전쟁 위협'과 '전쟁의 발발'이 성문 입헌주의의 시행과 확산을 가능케 했다고 본다. 역자는 저자의 주제 의식을 한 문장으로 요약했다. "국가는 전쟁을 만들고, 전쟁은 헌법을 만든다."
1750년대부터 20세기까지 전 지구적 차원의 성문 헌법의 방대한 역사를 아우르지만, 책의 요지는 '총, 선, 펜'이라는 명료한 제목이 모든 것을 설명한다. 전쟁(총), 운송·통신 기술(선), 인쇄술(펜)의 세 가지가 성문 입헌주의의 탄생과 지구적 확산을 추동했다는 것이다.
1700년 이후 유럽을 비롯해 모든 대륙은 제국주의 팽창에 따른 크고 작은 전쟁에 휘말렸다. 과거에는 육지에서만 발생했던 전쟁이 이 시기에 들어 대규모 하이브리드(육지뿐 아니라 바다와 해양까지를 아우르는 전쟁 형태) 전쟁으로 확전됐으며 빈도와 피해도 기하급수로 늘었다. 국가는 육군뿐 아니라 해군까지 포괄하며 세계의 모든 대륙으로 확전될 가능성이 있는 전쟁을 감당해야만 했다. 인명 피해 등 심각한 피해를 입을 수 있었고 전쟁에 나가고 싶어 하지 않는 이들도 동원할 수단이 필요했다. 이 과정에서 성문 헌법이 묘안으로 등장했다. 정부 질서를 재정비하고, 광범위한 지지를 끌어모으며, 전쟁에 대한 재정적·인적 수요를 정당화하는 문서로 말이다.
"비(非)귀족 대중의 협력을 확보하기를, 그런 연유로 무기를 그리고 정치권력을 그들 손에 넘겨주기를 희망했고, 또 부득이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헌법 논쟁에 휘말린 사회학자이자 법학자 막스 베버의 말은 헌법이 옛날부터 내려온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주로 국가와 권력자)의 필요에 의해 개발된 것을 정확히 알려준다. 저자가 빈번하게 책에서 헌법을 '새로운 정치 기술'이라 칭하는 이유다.
책에는 헌법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는 갖가지 사례와 서술이 넘쳐난다. 법률가, 정치인, 공직자 등 지식 권력의 전유물인 것으로 간주되는 헌법은 기실 18세기 말 프랑스에서는 시, 연극, 소설과 유사한 문학적이자 문화적인 창조 양식으로 이름 모를 개인들이 추구한 글이었다. 세계 여러 지역의 다양한 헌법은 그 자체로 인기를 끈 텍스트였기에 1790년대에 세상 물정에 밝은 출판업자들이 여러 헌법을 한데 묶어 발행하기도 했다. 1811년 멕시코에서 발표된 카디스 헌법은 세계 최다 번역 문서 가운데 하나였다. 1814년에서 1836년 사이 독일어 번역본만 11개가 나왔다. 헌법은 영속적이지도 않다. 베네수엘라는 1810년에서 1830년대까지 6개의 헌법을 가졌다. 뉴그라나다의 영토는 1811년에서 1815년 사이에만 최소 10개의 헌법을 채택했다.
'헌법'이라는 주제 하나로 600페이지 상당의 벽돌책을 직조해낸 저자의 방대한 지식과 독자들에게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는 통찰이 놀랍다. 미국과 프랑스 같은 이른바 선진적인 헌법을 갖춘 것으로 평가받는 나라의 유명한 헌법을 비틀어 보고, 세계사에서 미미한 존재감을 가지고 있으나 근대 국가의 헌법에 큰 영향을 준 각종 헌법을 소환하며 그 의미를 되짚는다. 세계 최초로 헌법에 여성에게 영구적인 참정권을 부여한 태평양의 작은 섬 핏케언이나, 미국 헌법이 탄생하기도 전 계몽적 성격의 성문 '나카즈'로 헌법 기술을 실험했으나 여성이라는 이유로 그 기여가 평가절하되곤 했던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 같은 인물도 새롭게 조명한다.
"그 어떤 단일 서적도, 그리고 분명 그 어떤 단일 저자도 18세기부터 제1차 세계대전 시기까지 해상 및 육상의 국경 지역을 넘나들면서 발생하고 오늘날까지 내내 경계와 정치와 사상의 패턴을 주조하고 있는 엄청난 규모의 헌법적 창의성과 논쟁 그리고 결과물을 본격적으로 다뤄보겠다는 야심을 품기 어려울 것이다." 머리말에서 밝히는 저자의 말에 담긴 기세가 자못 당당하다. 10년간 작업의 결실인 책을 덮고 나면 이 같은 자부심을 충분히 수긍할 수 있게 된다.
이혜미 기자 herstor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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