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봉하기엔 껄끄러운 바벤하이머’… 세계 각국 속앓이

류재민 기자 2023. 8. 18.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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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라내고 늦추고 금지하고… “검열을 보면 그 나라 사정 알 수 있어”

코로나 팬데믹을 계기로 침몰했다고 여겨졌던 영화 산업이 미국발 ‘더블 블록버스터(대작 두 개)’ 열풍에 순식간에 부활했다. 이름을 합쳐 ‘바벤하이머’라고도 불리는 ‘바비’와 ‘오펜하이머’가 지난달 21일 미국에서 개봉한 후 세계 각국 극장에 이례적으로 많은 관객이 몰리면서 영화 산업에 오랜만에 활기가 돌고 있다. 16일(현지 시각) 미국의 영화 흥행 집계 사이트 ‘박스오피스 모조’에 따르면, 바비는 미국에서 전날까지 5억3739만달러(약 7212억원)를 벌어들였고, 해외를 포함한 전 세계 흥행 수입은 12억달러(약 1조6000억원)를 넘어섰다. 이날 바비는 이전 기록인 ‘다크나이트’를 넘어 배급사 워너브러더스의 최고 흥행 기록을 갈아치우기도 했다.

지난달 동시에 개봉한 두 블록버스터 '바비'와 '오펜하이머'의 포스터를 붙여 놓은 사진. 왼쪽은 영화 '바비'의 주인공 역 마고 로비, 오른쪽은 '오펜하이머'의 주인공 역 킬리언 머피./트위터

분홍으로 가득한 블랙코미디 ‘바비’와 원자폭탄 개발이란 무거운 주제를 다룬 ‘오펜하이머’는 완전히 다른 영화지만 세계 각국에서 흥행과 화제를 동시에 불러일으키고 있다. 하지만 미국에서 개봉한 지 한 달이 가까워가는 지금까지 이 영화들이 극장에 걸리지 못한 나라도 적지 않은 상황이다. 영화가 사장(死藏)된 제각각의 이유를 보면 지구촌 여러 나라의 정세를 읽을 수 있다.

한국에서 바비는 ‘12세 관람가’다. 하지만 이슬람교를 국교로 채택하고 있는 중동 국가들은 대부분 ‘바비’ 상영을 금지하고 있다. 9일 레바논과 쿠웨이트는 바비가 “동성애와 성전환을 조장하며 가족의 중요성을 깎아내린다. 신앙과 도덕적 가치와도 모순된다”며 상영 금지를 결정했다. 알제리 정부는 지난달 말 현지에서 개봉된 이 영화가 도덕성을 해친다며 수도 알제 등 주요 도시의 극장에 상영 금지를 지시했다.

그래픽=김의균

바비엔 사실 동성애·성전환을 묘사하는 장면이 나오지 않는다. 다만 영화의 단역 중에 트랜스젠더 모델과 성 소수자 배우들이 나오고 성 소수자임을 암시하는 캐릭터가 잠깐 등장한다. 일각에선 영화에서 부각되지도 않는 성 정체성이 아니라, 가부장적인 이슬람 문화에 반해 여성 캐릭터들이 너무 ‘나대는’ 모습이 눈에 거슬렸을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반면 여성에 대해 매우 보수적이라고 여겨졌던 사우디아라비아에선 예상을 깨고 지난 10일 바비가 개봉해 크게 흥행하는 중이다. 인남식 국립외교원 교수는 “무함마드 빈살만 왕세자는 최근 여성 인권을 신장한다는 이미지를 구축하고 있는데, 바비를 자유롭게 허락해 준 것도 이런 맥락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고 전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한 여성이 영화 바비의 상징 색인 핑크색 옷을 입고 중동 요리 ‘캅사’를 먹는 모습을 소셜미디어에 올린 것. 영문 자막을 통해 ‘사우디의 바비는 영화 바비의 전 세계 개봉을 기념해 최신 유행으로 핑크색 캅사를 만들었다’고 표현했다. /틱톡

베트남은 완전히 다른 이유로 바비 상영을 막고 있다. 영화 속 한 장면에 잠깐 나온 세계지도가 중국이 남중국해에 일방적으로 설정한 영해(領海) 개념인 남해구단선(南海九段線)을 표시했기 때문이다. 구단선은 중국이 남중국해의 80% 이상을 차지하는 수역에 ‘끊어진 선’(단선) 9개를 자의적으로 설정한 것으로, 베트남·필리핀·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브루나이 등 남중국해에 접한 동남아국가의 배타적경제수역(EEZ)과 겹친다. 한국으로 치면 ‘동해’를 ‘일본해’로 표기한 식이어서 이 국가들은 반발하고 있다. 비슷한 분쟁을 겪는 필리핀은 완전 금지 대신 지도 장면을 흐릿하게 처리하는 조건으로 상영을 허락했다.

영화 ‘바비’ 상영을 금지한 베트남 정부가 문제 삼은 장면. 주인공 뒤편 세계지도의 아시아 동쪽 해상에 ‘남해구단선’으로 추정되는 점선들이 표시돼 있다. 앞서 중국은 1953년 일방적으로 남중국해에 9개 선을 긋고 자국 관할 영토라고 주장했다. /워너브라더스

오펜하이머는 동아시아 3국 중 오로지 한국에서만 개봉했다. 1945년 원자폭탄 피폭(被爆) 당사국인 일본에선 워낙 민감한 사안이라 개봉일조차 아직 정하지 않았다.

중국에선 미국 개봉일보다 약 40일 늦은, 이달 30일에서야 오펜하이머가 걸릴 예정이다. 지연 이유는 ‘엄격한 검열’이다. 주인공 로버트 오펜하이머 박사를 둘러싼 공산주의자 논란을 중국 검열 당국이 어떻게 정리할지가 영화 팬들의 관심사다. 선정적인 장면이 적지 않다는 점도 중국에선 큰 걸림돌이다. 중국 매체들에 따르면, 오펜하이머는 선정적인 장면을 대거 가리거나 모자이크하고 있다고 알려졌다. 다만 침략자 일본에 투하된 원자폭탄을 개발한 오펜하이머가 친(親)공산주의자로 묘사됐다는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돼 분량 자체를 줄이지는 않을 예정이라 한다. 베이징의 한 은행 직원 위모(35)씨는 “화면 곳곳을 가려 누더기가 된 영화를 볼 생각을 하면 불쾌하지만 그나마 영화 길이가 줄어들지 않았다면 다행”이라고 했다.

중국의 ‘과도한 검열’은 워낙 악명이 높다.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는 무정부 상태를 묘사했다는 이유로 상영되지 못했다. ‘맨 인 블랙 3′에선 외계인이 중국인으로 변장하는 장면 등이 삭제됐다. 지난해 개봉한 애니메이션 ‘미니언즈2′는 범죄를 미화했다는 점이 걸려, 악당이 경찰에 붙잡혀 20년형에 처해지는 다소 난데없는 장면을 중국 버전에만 추가하고 나서야 개봉이 허락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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