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語西話] 탑골공원 돌기둥 4형제가 이사 간 곳
입추, 말복이 지나면서 한풀 꺾이긴 했지만 낮 더위는 여전하다. 서울 종로구 동숭동 대학로의 넓은 나뭇잎들이 만들어 내는 그늘 아래 숨어 폭염을 식히는 붉은 벽돌 건물을 뒤로하고서 모퉁이를 돌아가는데 고만고만한 사각형 돌기둥 4개로 만든 특이한 교문이 눈에 들어온다. 걸음을 멈추고 살펴보니 안 쪽 두 기둥 중간쯤 S사범대 부설 초등학교 및 여자중학교라고 새긴 패(牌)를 걸어 놓았다. 생김새를 보아하니 건축 조경 분야의 문외한이라 할지라도 한눈에 일본식임을 알게 해준다. 1991년 사적 354호로 지정된 까닭에 안내판까지 설치하고서 지나가는 이들의 이해를 돕고 있다.
본래 이 자리가 아니었다. 일제강점기 탑골공원 정문으로 만든 것이라고 했다. 짐작건대 원래 자리에는 사찰식 사천왕문이 있었을 것이다. 1919년 삼일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면서 이 터에는 또 다른 의미가 더해진다. 삼일절 50주년이 되던 해 1969년 삼일절 독립선언 기념탑이 건립되면서 입구에 있는 일본식 대문 구조물은 그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주변인의 입방아에 자주 오르내렸다. 3년 후 ‘삼일문’을 새로 만들었다. 우리나라 관청 건물로는 가장 오래되었다는 강릉 객사문의 형식을 본떴다.
용도를 다한 기존 돌기둥 대문은 옮겨야만 했다. 인근 S법과대학 정문으로 기증했다. 네 돌기둥은 본래 자리를 떠났다. 공원 정문에서 졸지에 학교 정문으로 용도가 바뀐 것이다. 1975년 그 대학마저 관악산 아래로 이전했다. 기존 건물은 다른 학교 시설로 용도가 바뀌었다. 하루아침에 대학 교문에서 초·중학교 교문으로 변신한 것이다. 갑자기 바뀐 문패 때문에 잠시 정체성에 혼란이 일어나긴 했지만 그래도 그 자리를 지킬 수 있는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여기면서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리고 비로소 깨달았다. 나는 변하지 않았는데 주변이 변하면서 나 역시 변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하긴 원래 자리도 공원으로 용도가 바뀌기 전에는 사찰이었다. 고려 시대 흥복사 터에 조선 세조 임금이 원각사를 중건했다. 연산군 시절에는 종교적 기능을 인위적으로 멈추게 하면서 왕의 개인 공원이 되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주인 없는 터는 자연 발생적으로 인근 주민들의 쉼터 기능까지 겸했다. 1897년 최초로 근대 공원으로 조성된다. 한양의 가로망(街路網)과 도시 공간 정비 사업의 일부였다. 주변에 자문해 이름도 서양식으로 ‘파고다 공원’이라고 지으면서 근대국가를 지향했지만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다. 10여 년 후 탄생한 일제식 돌기둥 4개가 수십 년 동안 공원 입구를 지킬 수 있는 결과로 이어졌다. 공원의 역사만큼이나 대문의 역사도 우여곡절이 많았던 셈이다.
그 속에서도 꿋꿋하게 제자리를 지킨 것은 1467년에 완성된 원각사 십층 석탑이다. 대리석을 이용한 12m 높이의 백색 탑은 종로 거리 상징이었다. 하지만 언제부턴지 무슨 연유인지는 알 수 없지만 탑 상층부는 이미 본체와 분리된 상태였다. 해방 후 미군정 시절이던 1946년 2월 미 24사단 공병대가 땅바닥에 있던 세 층을 기중기로 제자리에 올렸다. 공해와 풍화 그리고 비둘기 배설물에 따른 훼손을 막고자 2000년 유리 건물 보호 각을 씌웠다. 더불어 그 이름도 ‘파고다’가 아니라 ‘탑’으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원각사 터’의 명칭도 ‘서울탑골공원’으로 공식화되었다.
터의 역사도 사찰과 대문 역사만큼 변화의 연속이었다. 그러는 가운데서도 백탑은 길게는 오백 년 짧게는 근대 백 년의 현장을 오롯이 지켰다. 숨 가쁜 변화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그 무엇을 찾고자 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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