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훈의 유행민감] 작가에겐 굿, 독자에겐 나쁜 뉴스… 비평의 몰락

김도훈 문화칼럼니스트 2023. 8. 18. 03:03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헛소리’ 가득한 최근 자기계발 베스트셀러, 권위 있는 본격 비판 찾기 힘들어… 자칫하면 수천 악플 감당해야 하기 때문
잘근잘근 가치 논하던 ‘멋진 비평’ 어디갔나… 좋은 소리는 욕먹을 일 없으니 애매한 호평만
일러스트=박상훈

오랜만에 서점에 갔다. 온라인 서점 시대에 나는 아직도 서점에 간다. 책은 재미있는 물건이다. 이제 모든 문화 상품은 디지털로 대신할 수 있다. 음악은 스트리밍화됐다. 영화도 스트리밍화됐다. 두 문화 상품은 실물로 구입할 이유가 사라지고 있다. 나는 얼마 전 걸그룹 뉴진스 새 앨범을 CD로 구입했다. 그건 광적인 팬심에서 나온 소비라 예외로 해야 할 것이다. 책은 다르다. 나도 한때 전자책 단말기를 굴려본 적이 있다. 여행 때마다 종이책을 들고 가는 게 귀찮아서였다. 몇 달 만에 포기하고 팔아버렸다. 책을 읽는다는 느낌이 없었다. 바스락거리는 종이에 인쇄된 활자를 읽는 경험은 음악이나 영화와는 달리 디지털로 대체할 수가 없었다. 위 세대가 들으면 혀를 차겠지만, 결국 나도 그놈의 ‘물성’에 매달리는 꼰대가 된 것이다.

서점에 가면 꼭 들르는 곳은 베스트셀러 코너다. 진중한 독서가들은 베스트셀러 코너를 멀리하는 경향이 있다. 나는 그 코너를 꽤 좋아한다. 요즘 사람들이 어떤 책을 읽는지 궁금해서다. 나도 에세이를 몇 권 낸 저자다. 대형서점 베스트셀러 10위 안에 오른 책은 당연히 없었다. 지피지기 백전불태. 뭐가 팔리는지를 알아야 나도 팔리는 책을 쓸 게 아니겠는가. 오랜만에 간 서점에서 비밀을 완벽하게 알아낼 작정이었다.

나는 한탄했다. 에세이의 시대는 갔다. 가버렸다. 한때는 모두가 에세이를 썼다. 대형서점 가판대는 누워 있는 캐릭터를 담은 삽화로 가득했다. 죽고 싶어도 떡볶이는 먹고 아무 일 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위로와 힐링의 아지랑이가 가판대 위로 피어올랐다. 코로나 범유행 이후 세상은 쉬거나 누워 있기에는 지나치게 팍팍해졌다. 그래서 사람들이 선택한 것은, 적어도 서점 가판대에 따르면 ‘성공’이다. 성공을 위한 자기계발서다. 나는 자기계발서를 좋아하지 않는다. 성공한 사람들이 성공의 비밀을 이야기하는 책은 영 쓸모가 없다. 성공한 사람들이 성공한 이유는 다 구체적으로 다르다. 성공에는 운이라는 요소가 적어도 절반은 필요하다. 내 보기에 자기계발서는 성공한 사람들이 자기 자랑을 친구들에게 늘어놓다 그걸로 돈까지 벌 수 있을 것 같아서 출간하는 것이다. 역시 성공한 사람들은 다르다.

2023년 가판대의 자기계발서들은 뭔가 달라졌다. 독해졌다. ‘역행자’라는 책이 있었다. ‘오타쿠 흙수저에서 월 1억 자동 수익을 실현한 무자본 연쇄창업마, 라이프 해커의 인생 역주행 공식 대공개’라는 문구가 뺨을 후려쳤다. 출판사 설명은 더 독했다. 이 책만 읽으면 ‘돈, 시간, 운명’으로부터 완전한 자유를 얻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 자리에 서서 책을 읽어내리기 시작했다. 서너 장을 읽고 깨달았다. 나는 이 책의 타깃 독자는 아니었다. 오히려 가장 흥미진진한 챕터는 ‘<역행자>로 인생 역행한 사람들’이라는 독자 리뷰 모음이었다. 리뷰가 아니었다. 간증이었다. 내 생각에 이 책은 종교 코너에 있어야 마땅하지만 정식 종교로 아직 인정받지 못한 탓에 자기계발서 코너에 있을 뿐이다.

아연한 기분으로 고개를 돌리다 눈에 들어온 책은 ‘차가운 자본주의’다. 익숙한 얼굴이 표지에 있었다. 유튜브에서 나도 이해하지 못할 인공지능 알고리즘이 종종 보여주는 20대 유튜버 얼굴이었다. 초판 출간 이틀 만에 베스트셀러가 된 데다 개정판까지 나왔다고 하니 읽어보지 않을 도리는 없었다. 개정판이라는 건 정말 잘 팔리는 책이나 낼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몇 챕터를 읽다가 마음으로 절규했다. 이건 자본주의에 대한 책도 아니고 경제학 책도 아니다. 애덤 스미스 영혼을 강령술로 불러내 이 책을 읽게 한다면 그는 ‘보이지 않는 손’으로 내 뺨을 후려치며 인간의 지성이 18세기 이후로 이토록 타락한 것이냐며 울부짖을 것이다.

아니다. 나는 이런 책이 출간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세상의 모든 헛소리도 출간될 권리는 있다. 다만 나는 두 책을 작정하고 비판하는 서평을 읽고 싶었다. 어떤 일간지도 서평을 쓰지 않았다. 두 책의 제목은 사회면에서나 겨우 찾을 수 있었다. 인터넷에는 이 책들에 대한 일반 독자들의 난도질로 가득하지만 내가 읽고 싶었던 것은 권위 있고 영향력 있는 매체의 서평이었다. 단련된 솜씨로 날렵하게 난도질하는 글을 읽으며 짜릿해하고 싶었다. 아마도 매체들은 이런 책들이 작정하고 비평까지나 할 만한 대상은 아니라고 여겼던 것 같다.

사실 비평은 점점 날이 무뎌지고 있다. 이제는 누구도 악평을 쓰지 않는다. 얼마 전 페이스북에 누군가가 영국 잡지 ‘이코노미스트’ 칼럼 하나를 올렸다. “비평가들이 덜 잔인해지고 있다. 작가들에게는 좋은 소식이지만 독자들에게는 아니다”라는 제목의 칼럼이다. 독자들이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잘 쓴 악평은 사라지고 어중간한 호평만 남았다 한탄하는 글이다. 칼럼에 따르면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가장 공감한 부분은 소셜미디어 이야기다. 대부분 요즘 사람들은 지면이 아니라 인터넷으로 서평을 읽는다. 서평은 소셜미디어를 통해 무서운 속도로 퍼져나간다. 악평은 그 책을 좋아하는 광범위한 독자들로부터 공격적인 반응을 얻게 마련이다. 지면으로만 독자를 만나던 시절에는 보다 대담하게 비평을 할 수 있었다. 기껏해야 성난 전화 몇 통만 견디면 될 일이었다. 이제 비평가는 수백 수천 개의 성난 댓글을 감당해야 한다. 그러느니 좋은 책만 소개하는 게 낫다. 좋은 소리는 욕먹을 일이 없다.

영화비평도 마찬가지다. 한때는 일간지들도 한 면을 털어 신작에 대한 화려한 악평을 써 내리곤 했다. 더는 누구도 악평을 쓰지 않는다. 타깃을 제대로 조준하고 잘근잘근 씹어내리는 멋진 악평의 시대는 막을 내리고 있다. 인간보다 마음이 단단한 인공지능 비평가가 등장하기 전까지 그 시대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모두가 좋아하는 영화를 깠다가 몇 번이나 욕을 먹은 적 있는 B급 영화평론가인 나로서도 요즘은 좀 자제를 해야겠다 생각 중이다. 대신 나는 자기계발서를 하나 쓸까 싶다. 대충 정해둔 제목은 ‘뜨거운 자본주의 순행자’다. 내용은 아직 모르겠다. 제목에서 강렬한 베스트셀러의 냄새를 맡은 출판사 관계자들 여러분은 연락 주시길 부탁드린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