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보영의 정상에서 쓴 편지] 5. 방태산: 마지막 여름, 마지막 오지의 산을 오르며

장보영 2023. 8. 18.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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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태산 ‘산중화원’ 주인들의 속삭임
수더분한 들꽃 소박한 과거 회상
해발 1444m 주억봉 야생화 군락
연무 절경 속 산의 관록 탐미 가능
외부 영향 미미 전국 10대 피장처
마지막 남은 오지 대명사 등반
적가리·방아골 오르는 계곡 산행
▲ 헬기장에서 바라본 구룡덕봉. 점봉산이 구름에 덮여 있고 멀리 설악산은 연무 속에 희미하다.

태풍이 지나간 자리에서 당신을 생각합니다. 잘 지내고 있나요? 그곳은 어떤가요? 무탈하다는 안부가 그 어떤 인사보다 다행인 세상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살아 있어 다행이고 그럴수록 삶이라든가 존재 등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절입니다. 그러는 사이 입추가 지났습니다. 고고하게 작열하던 태양도 그 기세를 한풀 꺾은 듯하고 줄곧 훈풍이던 바람에도 선득한 가을이 묻어 있습니다. 시대의 위기와 재앙을 논하며 견디고 버티고 서로를 위로하며 격려하던 시간이 서서히 꿈만 같습니다.

저는 요즘 머무는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저곳이 아닌 이곳에, 다음이 아닌 현재에 머무는 연습 말입니다. 서둘러 다음으로 나아가지 않고 지금 여기에 머물다 보면 어떤 시간이 보입니다. 당신과 나, 또 이 세상이 지나가고 있는 시간 말입니다. 하려고 했는데, 할 수 있었는데, 하고 싶었는데 결국 하지 못한 일, 그렇게 될 줄 알았는데 정말 그렇게 되어버린 일 앞에 오래도록 남아 있었던 지난 여름이었습니다. 미안함과 그리움과 보고 싶은 마음이 뒤엉켜 어디로도 나아가지 못하고 길고 어두운 터널 속에 웅크려 있었습니다. 잊어보려 하지도 않고 벗어나려 하지도 않은 채 같은 자리에 오래오래 남아 있었습니다.

▲ 벌개미취. 국화과의 여러해살이풀.

추억 속에 머무는 것은 그중 하나였습니다. 당신이 지나간 곳에 남아 당신을 오래오래 생각하고 싶었습니다. 여름이 다 가기 전 고향의 방태산으로 향했습니다. 해발 1444m의 이 산은 강원도 인제의 주산(主山)입니다. 방태산이 길게 뿌리를 뻗은 상남면과 기린면은 인제의 주요 소읍으로, 나무를 하거나 약초나 나물을 캐다가 홀린 듯 길을 잃어 기린면에서 상남면으로, 상남면에서 기린면으로 넘어간 일이 이곳 사람들에게는 흔했다고 합니다. 길 없는 곳을 치고 가도 마을이 나타나고 그게 또 길이 됐다고 하니 그만큼 이 산은 크고 넓은 산입니다.

그리하여 이곳 일대는 예로부터 ‘삼둔사가리’로 불리곤 했습니다. 조선 시대 민간 예언서인 ‘정감록’을 보면 전쟁, 전염병, 흉년에도 그 어떤 영향을 받지 않고 끄떡없는 전국 열 곳의 피장처인 십승지지(十勝之地)를 소개하는데 그중 한 곳이 이곳 방태산을 둘러싼 삼둔사가리인 것입니다. 삼둔은 방태산 남쪽의 살둔, 달둔, 월둔을 말하고 사가리는 방태산 북쪽의 아침가리, 적가리, 연가리, 명지가리를 말하는데 둔(屯)이란 농사를 짓기에 알맞은 펑퍼짐한 산기슭을, 가리란 밭을 갈 만한 땅뙈기를 말하니 그만큼 이곳 일대가 사람이 살기에 아주 좋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 산오이풀. 고산 중턱 이상에서 자라는 다년생 초본.

오늘 이 산이 저에게 처음은 아니었습니다. 8년 전 친구와 이 산을 오른 적이 있습니다. 그때도 이렇게 8월 한가운데였고 새벽에는 보슬비가 흩날리며 온통 푸르스름한 안갯속이었다가 오후로 갈수록 밝아지는 날씨였습니다. 이 산 가까이에 솟은 해발 1341m의 개인산도 함께 올랐는데 산길이 희미해 중도에 멈춰서 지도와 나침반을 몇 번이나 살핀 기억이 납니다. 그때는 상남면 미산리에서 올라와 두 산의 정상에 오른 뒤 차를 세워둔 미산리로 다시 내려갔는데 이번에는 기린면 방동리의 방태산 자연휴양림에서 산행을 시작합니다.

방태산 자연휴양림 제1주차장에서 산행을 위한 채비를 마친 뒤 등산로를 향해 이동합니다. 비단처럼 고운 이단폭포를 지나 적가리골에 이릅니다. 태풍 이후라 물이 아주 많습니다. 과연 여름 산행으로는 계곡 산행만 한 것이 없습니다. 계곡이 좋은 곳에서 아직 우리 곁에 남아 있는 여름을 만끽합니다. 지금이 한철이라는 것을 아는 매미는 내일은 없다는 듯 줄기차게 울어대고 하늘은 건드리면 울 것 같던 어제와 달리 한결 여유가 있습니다.

방태산 자연휴양림에서 방태산 정상까지는 4.5㎞쯤 됩니다. 그중 절반이 적가리골, 그 위 방아골을 거슬러 오르는 계곡 산길인데 완만하게 올라가는 이 길이 두고 제법 가볼 만하다며 여유를 부리기는 이릅니다. 남은 절반의 산길이 혀를 내두르는 강한 오르막이기 때문입니다. 아마 누구라도 자연스럽게 괜히 방태산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 여름에, 이 시대 마지막 남은 오지의 대명사로 통하는 방태산을 찾아온 사람들에게는 분명 어떤 사연이 있을 것 같습니다. 어쩌자고 여기까지 찾아 들어온 건지 이유를 듣고 싶지만 저마다 갈 길이 바쁩니다.

▲ 쇠서나물. 모련채라고도 불린다.

구름이 모이고 걷히는 정도에 따라 산은 얼굴을 달리하고 그에 따라 우리의 기분도 달라집니다. 다행히 상부로 갈수록 산은 환해지고 그럴수록 능선도 이제 곧 닿을 듯 가깝게 다가옵니다. 하지만 여간해서는 거리가 줄지 않습니다. 연식을 짐작할 수 없는 거대한 고목의 기둥에 몸을 기대고 쉬었다 갑니다. 멈춰서 쉬고 있으니 언젠가부터 주변에 꽃들이 보입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어여쁜 꽃들이 자신의 존재를 말없이 알리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 산은 방태산(芳台山)입니다. ‘꽃다울 방(芳)’ 자를 쓸 만큼 이 산에서 우리가 봐야 할 것은 다름 아닌 꽃입니다.

이 산의 꽃은 세상의 꽃처럼 화사하기보다 수더분합니다. 저 홀로 고고하게 빼어나려고 하지 않고 주변의 풍경과 어우러져 배경처럼 피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꽃인 줄 모르고 그냥 지나칠 때가 많습니다. 그 앞에서 들꽃처럼 소박하게 살았던 당신을 생각합니다. 보려 하지 않으면 볼 수 없는, 인생의 속도를 늦추고 겨우 멈춰야만 찾아올 수 있는 은둔의 땅에서 당신에게 찾아온 아침과 스며든 오후와 저물녘 석양의 빛은 각각 어떤 모습이었을까 생각합니다. 이곳에서 당신은 어떤 삶을 살았습니까?

많은 사람이 이 산을 들고 나지만 방태산은 여전히 완벽한 원시림입니다. 쓰러진 나무를 보고 그 위에 자란 이끼를 보고 비밀처럼 피어 있는 꽃들을 보는 동안 능선 삼거리에 이릅니다. 이곳에서 방태산 정상이자 주봉인 주억봉까지는 400m쯤 더 가야 합니다. 삼거리에서 잠시 쉬었다가 정상으로 이동합니다. 그리고 어딘가에 숨어 있던 해가 빛을 비출 무렵 주억봉에 도착합니다. 주억봉은 그야말로 야생화 천국입니다. 동자꽃, 투구꽃, 벌개미취, 풍로초, 맥문동, 비비추 등 지금까지 오르며 보았던 한두 송이 꽃들이 작은 군락을 이루며 피어 있습니다. 초롱꽃이 가장 많은 것으로 보아 이 산에는 이미 가을이 찾아온 모양입니다.

▲ 초롱꽃. 꽃말은 충실, 성실이다.

다정한 산중 화원에 앉아 배낭에 짊어지고 온 점심을 먹습니다. 저 멀리 가리산, 점봉산, 설악산이 언뜻 보이지만 오후의 연무에 가려져 아주 선명하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아련하게 솟아 있는 높은 산들의 정상과 반대편의 또 다른 이름 모를 봉우리를 보니 새삼 이 산의 관록이 느껴집니다. 느긋이 점심을 먹고 이 산을 기억하기 위해 이곳저곳을 사진으로 남깁니다. 우리가 온 산길의 반대편 산길은 배달은석, 깃대봉으로 이어집니다. 언젠가 당신에게 들었던 산의 이름입니다.

정상을 벗어나 다시 능선 삼거리로 돌아갑니다. 그곳에서 방태산 자연휴양림으로 곧장 내려가지 않고 2㎞ 남짓 떨어져 있는 해발 1388m의 구룡덕봉으로 향합니다. 구룡덕봉에서 매봉령을 지나 다시 방태산 자연휴양림으로 돌아갈 수 있는 원점회귀 산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왔던 길로 되돌아가기보다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가는 것이 좋습니다. 산도 삶처럼 앞만 보고 나아가고 싶은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나아가는 것 같지만 이 길은 8년 전 여름 거꾸로 지나갔던 길입니다. 그때는 개인산을 지나 구룡덕봉을 먼저 오른 뒤 주억봉을 올랐습니다.

부지런히 걷고 걸어 어느덧 초지대의 헬기장에 이릅니다. 사방이 시원하게 트인 이곳은 그때나 지금이나 기막힌 야생 조망터입니다. 산 모양이 주걱을 닮아 주억봉인데 여기 서서 봐야 비로소 그 면모를 제대로 알 수 있습니다. 이곳에 서니 지나온 길이 보입니다. 지나온 길, 그리고 지금까지 머물렀던 길이 보입니다. 온 줄도 모르게 여기까지 흘러왔고 나아가야 할 길은 여름내 웃자란 잡목과 수풀에 가려져 아직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다 해도 어느 순간 지금처럼 나아간 줄도 모르게 또 지나온 길이 보이겠지요. 구름이 산정 위로 흐르는 풍경 앞으로 걸어갑니다. 작가·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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